◈성만찬 눅22:7~23, 고전11:27~30 13.01.27.스크랩, 출처
◑서론
▲인류역사상 최고의 명화를 꼽을 때, 항상 걸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예수님과 12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배신자 유다를 지적하는 장면을, 딱 캐치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충격받은 제자들의 모습과, 체념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대조시킨 아주 걸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 옆에 앉아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모습을 보고,
그가 여자라는 상상을 누군가가 해서 '다빈치코드'라는 헛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최후의 만찬 본문을 함께 살펴보고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서막이기도 한 이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영적인 운명이 담겨있는 엄청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 최후의 만찬, 성만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배경이 되는 유월절의 기원을,
다시 한 번 짚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강퍅한 마음으로 절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보내려 하지 않는 애굽의 바로 왕을 상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10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마지막 재앙이,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의 첫 새끼까지도,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며 죽였던 그 날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세의 지시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이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쳐, 넘어가(유월, pass over)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의 시작입니다.
7절에 나온 무교절은, 유월절과 같은 개념입니다. 유월절 직후에 이어서 7일을 지킵니다.
'무교병'이란 '누룩 없는 빵'이란 뜻입니다. *없을 무, 삭힐, 발효할 교, 떡 병
왜 누룩없는 빵입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너무 급해서
아직 발효가 되지 않은 떡반죽을 통째로 옷에 싸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매년 무교절 때마다, 그때를 되새기며 누룩없는 빵을 먹습니다.
그 기간 7일 동안 여행자의 옷을 입기도 합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먹습니다.
그리고 포도주 네 잔을 마십니다. 이것이 유월절 만찬의 스탠다드(표준)의식입니다.
이 유월절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묘사한 것입니다.
흠없는 어린양은 죄없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문설주에 바른 피는, 우리들을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가리킵니다.
어린양의 피가, 히브리 장자들의 목숨을 살려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가 구원하실 모든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을 얻어낸다는 뜻입니다.
◑1. 성만찬의 의미 -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정확하게 유월절 절기와 맞추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유월절 성만찬은, 주님이 보시기에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그냥 맞이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성만찬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미리 보내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할 장소를 마련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지금 명절 대목이거든요. 요즘으로 말하면 추석 대목의 최고인기 관광지입니다.
그런데 예약도 안 했는데, 핫 시즌에 웍샵을 할 큰 회의실을 당장 구하겠다는 시도와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황당해서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여쭈어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 안에서 물동이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라고 디렉션을 주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물동이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것이다'로 나옵니다.
그 당시 물동이는 여자들이 메고 다녔지, 남자가 메지 않았습니다. 요즘과는 다른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물동이 멘 남자는, 굉장히 희귀하기 때문에, 찾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를 따라가면, 우리 12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큰 다락방을 준비해 줄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주님 말씀대로 가니까, 그런 세팅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스케줄이 항상 바쁘고 복잡합니다.
유월절을 지킬만한, 영적인 쉼표를 찍을만한 틈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바빠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어떤 영적인 이벤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바빠도, 예수님이 기도하라고 부르시는 때가 있습니다.
예배드리라고 부르시는 때가 있습니다. 부흥의 때로 부르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어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축복의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평생 교회가 2천년 동안 잊지 못할 엄청난 의식을 배우게 됩니다
눅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영어성경에 보니까 I have eagerly desired '내가 간절히 원하였노라'
이 유월절 만찬을, 너희와 먹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십니다.
매년 다가오는 유월절이 그때는 왜 그렇게 간절히 원하실만큼 특별했습니까?
왜냐면 이 유월절 만찬이,
바로 그 다음날 있을 십자가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 만찬의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는 유월절 만찬보다 하루 앞당겨서
지금 유월절 만찬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왜 하루를 앞당기셨습니까?
진짜 유월절날, 그 다음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유월절 만찬에는, 빵과 포도주와 어린양의 고기가 있어야, 정식 유월절 만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빵과 포도주만 있고, 어린양의 고기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다음날 오후 3시에 진짜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구약에 나오는 어린양의 실체인 영원한 희생양이라는 뜻입니다.
요일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본문 눅22:16절에도, 주님께서는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18절에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눅22: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까지
이 땅의 음식을 먹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이제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 부활과 승천을 넘어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비전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그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노의 칼을 피해서 살아났듯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자가 보혈을 통과하고 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춤을 추는
그래서 천국에서 우리가 만나서 벌일 그 잔치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힘든 것이었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얻어질
수많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루어낼 그 천국의 그 모습을
예수님은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천국을 미리 끌어당겨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찬만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는 숙연한 의식이지만
주님을 동정하지는 마십시오. 왜냐면 이 성만찬 십자가 죽음은
죄의 권세를 극복하는 하늘의 영광의 사건이거든요.
부활의 축제,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용서 받은 흰옷을 입고 축제를 벌일 그 천국을
우리는 바라보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지만, 우리는 결코 이 땅의 절망에 사로잡혀서
무너질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성만찬을 계속 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사람들이 아니라, 죄악을 벗고 죄의 사슬을 끊고 천국잔치에 참여할 성도들이다..
라는 것을 이 성만찬을 하면서 우리는 계속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성만찬의 또 하나의 의미는 <감사>입니다.
눅22: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성만찬을 Eucharistic sacrifice 혹은 유카리스트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감사'라는 뜻의 헬라어(유카리스토스)에서 왔습니다.
성만찬의 가장 위대한 신비 중의 하나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만큼 내 안에서 그 감사의 고백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사람이라면 받은 것만큼 표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누가 펜 하나 빌려주면, 고맙다 이정도이지만
누가 여러분에게 고급 승용차나 아파트를 하나 사줬으면,
여러분은 '고마워!' 하고 그저 넘어가는 사람 있습니까?
막 끌어안고 격하게 감사를 표현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소방서 아저씨나, 의사 선생님..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만찬 앞에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가 터지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 살아가면서 '나는 별로 감사할 게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몸이 좀 아프고, 돈이 좀 안 벌린다고, 자녀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서
'나는 감사할 게 없어.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게 뭐 있어?' 이런 분들은, 오늘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시험은 떨어지면 다시 치면 되고요,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지만
영원한 천국문 앞에 서서,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탈락하는
다시 (시험) 칠 수도 없는 천국 문앞에서 여러분은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만찬 앞에서 끝없는 감사의 눈물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이때 성만찬은 갑절의 축복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3. 성만찬의 또 하나의 신비는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잔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눅22: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구심점이 되시고, '너희가 나누어야 된다.'
이 말은,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보혈을 통해서, 원래 가족이 피를 나누는 존재잖아요.
그리고 함께 떡을 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피가 아닌, 영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나눈, 하늘 가족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하죠.
'너희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격과 생각과 취향과 연령이 너무나 다릅니다.
도저히 사회에서는 섞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을, 성찬식을 나누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격 좋은 사람들끼리 대화해서 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옛 성깔이 살아 있어서, 우리가 부딪히고 서로 상처를 주지만,
보혈(성찬)앞에 설 때마다, '그래 우리가 다 같은 떡과 피에 참예하는 한 형제이지!'
이러면서 서로 끌어안고, 하나됨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성만찬의 파워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사랑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무작위로 성만찬을 나누신 게 아닙니다.
함께 삶을 같이 한 제자들, 자신의 보혈의 피로 덮어줄 구원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부터 이것을 조금 망각하는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성만찬 하면서, 잘못해서 형제들끼리 시험들었습니다.
왜냐면 현대교회에서는 조그만 떡조각과 포도주로 성찬식을 하지만
그 당시는 진짜 이 빵과 포도주가 만찬, 주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잘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가난한 형제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노예들이었거든요.
그러면 교회가 저녁 때 모여서, 이제 성만찬을 한다는 것이
전부다 식사를 같이 먹는 것인데,
먼저 도착한 부자교인들이, 식사를 다 먹어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교인들은 남의 집 일을 하고 늦게 도착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그렇다고 뭐라고 말도 못했습니다.
왜냐면 사회에서 잘 나가던 사람들, 주인 층 사람들이 먼저 와서 드셨는데 뭐라고 할 겁니까?
그러니까 이 분들은 배고프고, 힘들고, 시험에 든 것입니다.
이 상황을 보면서, 바울이 성만찬의 취지를 잊어먹고 있는 고린도교인들을 질책했습니다.
고전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그렇게 성만찬을 하고 나서, 그들은 '아, 우리가 오늘도 성만찬 했어!' 하며
아주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는데, 성만찬을 해치운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너희가 어떤 마음으로 성만찬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너희 중에서 교회가 주님의 몸인데, 왜 그렇게 세상적이냐?
교회까지 와서 가진 자와 없는 자끼리 나눠서 교제할 것이냐?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에서도 무시할 것이냐? 이것이 정말 주님이 원하신 형제사랑이란 말이냐?
주님의 보혈이 과연 부자들만 축복한 것이었느냐? 너희들은 왜 가난한 형제들을 품지 않느냐?'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4. 여러분, 성만찬은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서로를 질시하고, 반목하던 것들을 회개하게 합니다.
여러분,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형제를 향한 미움과 질시와 열등감과
이런 섭섭한 마음들, 상처받은 날카로움들이 다 씻겨져 나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들이 싸우면 부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대립하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 시간이, 서로 용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관계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래서 오늘은, 떡을 떼면서 "아버지 우리는 하나 되었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가 하나되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세상은 너무나 파를 나눠서 싸웁니다. 그러나 교회만은 하나되게 하여주옵소서.
이 교회 안에서 우리 가정이 하나되게 하시고, 순이 하나되게 하시고,
사역팀들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고, 교회가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로 인해서 보수와 진보와 가진 자와 없는 자로 나눠져 있는 우리나라가 하나 되게 하여 주시고,
이로 인해서 이 민족이 열방이 하나되게 하여 주소서.
그것이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서만 가능한 일인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성만찬 앞에선 오늘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5. 성만찬은 <주님의 몸>입니다.
눅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 떡은 사실 유대인의 주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꼭 성만찬 때 먹지 않아도,
자기들이 항상 먹는 떡인데, 굳이 주님께서 그 떡을 떼어주시면서, 자신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계속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고 배부르다고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떡은, 인간에게 끝없는 배고픔을 줍니다.
아무리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이 올라가고,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을 모르고 허무한 것이 사람입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이 말은 히딩크가 한 말이 아니라
모두가 말하는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끊임없이 배고픈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을 것이다.'
이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떡을 떼어주시면서, 예수님은 내일 십자가에서 찢기실 자신의 육체를,
인류를 위해 드려질 자신의 생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찢기는 살을 먹고, 내가 흘리는 보혈을 마셔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게 되면, 모든 죽음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죄가 절망과 좌절과 공포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든 악한 세력들이 너를 떠나게 될 것이다.
네게 새로운 구원과 생명의 시작이 열릴 것이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자 그런데 이 말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먹을 수 있습니까, 식인종도 아닌데요.
차라리 예수님을 섬기라, 순종하라, 이렇게 하면 쉽겠는데
'먹으라'고 하시니,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톨릭은, 사제가 성만찬을 집례할 때,
이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 소위 '화체설'이죠.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만찬은 반드시 사제가 집례해야 되고
포도주와 떡이 남을 때는, 결코 버려서는 안 됩니다. 땅에 떨어뜨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다 사제가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사제들이 알코올 중독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진짜 포도주를 썼거든요. 남은 것을 다 마셔야 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데, 어떻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합니까? 아니죠.
중요한 것은, '먹는다'는 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게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 음식 스파게티가 맛있게 생겼다고 하는 사람과
그 스파게티를 직접 먹어본 사람은 다릅니다.
먹는다는 것은 구경하는게 아니라, 내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경하는게 아니라, 내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은혜의 구경꾼이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성만찬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가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먹을 때, 그것이 들어와서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냥 지식적으로 '아, 1+1=2 라는 식으로 믿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에, 전 인격을 열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게 하는 거죠. 그래서 그 분이, 내 삶의 구석구석을 다스리게 하시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고 할 때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예수님의 그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인생을 주도하게끔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했으면, 내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인생을 다스리시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믿으니까, 그게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가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내 마음을 열어서 예수님께서 내 삶 구석구석을 다스리게끔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만찬을 '보이는 말씀'이라고 했거든요.
우리가 읽는 말씀을 가지고 주님과 교제하잖아요? 이것은 보이는 말씀이죠.
여러분,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아주 신비로운 예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기를 원하십니다.
성만찬의 핵심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이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임재가 우리 삶에 구석구석에 다 미치게끔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의 첫사랑을 업그레이드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 그 감격을, 세상이 퇴색시킨, 세월이 퇴색시킨 그 믿음을, 다시 한 번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만찬을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인하여 나를 기념하라. Do this in remberance of me.
이것을 자꾸 하면서, 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성만찬을 하는 게 좋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스마트폰에 넣어갖고 다니면서 항상 보듯이
이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잊어버렸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그 사랑을, 내 힘으로 살려고 했던 그것들을 다 포기하면서
십자가앞으로 계속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세미나로 교육 받는게 아니고, 십자가의 보혈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성적인 가식적인 신앙이 부지고,
십자가의 보혈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는 그런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먹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다스리시고, 채우시게 하시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나의 손과 발이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완전히 일심동체가 될 정도로 친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와 아주 깊이 교제로 들어가면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게 됩니다.
거기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잔도 마찬가지입니다.
눅22:20b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십자가의 보혈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 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예수님만 100% 남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십자가 보혈을 통과하는 사람은, 새언약을 받습니다.
구약의 옛언약과 주님이 주시는 보혈의 새언약은, 차원이 다릅니다.
구약시대 때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데,
죄를 너무나 많이 짓다보니까, 그 수많은 사람의 죄를 다 갚으려면
지구상에 있는 동물을 다 잡아죽여야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단 한번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으로
그 모든 희생제물의 피 값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유월절이, 이제 신약의 성만찬으로 바꾸어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커버하기에 합당한, 그런 보혈이 주어진 것입니다.
옛 언약은 모세의 돌비에 새긴 율법이었습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새언약은,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옛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만 커버했습니다.
그렇지만 새언약은, 온 백성과 족속 방언을 다 커버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나 파급효과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은 저와 여러분이 새언약의 수혜자들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보혈, 이 새언약의 피를 그냥 믿으라고 하지 않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바라보라고 하지 않고, 흡수해 들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바라보는 차원을 넘어서,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보혈을 여러분의 인생 안으로 흘려보내드릴 때
여러분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들이 해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과 능력이 들어올 때,
인간적으로 아무리 대화하고 설득해도 안 되었던 그 껄끄러운 인간관계들이
신비하게 하나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된 교회는, 성격좋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아니라
보혈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교회에서는 큰 삿대질하고 싸움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
보혈의 은혜가 충만하니까, 서로 다 커버해 줍니다.
실수를 안 해서 서로 사랑하는게 아니라, 사랑의 품이 넓은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문제화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문제를 문제화시키지 않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이 보혈로 초대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주님의 보혈을 마실 때,
여러분 안에 있는 우울증과 불면증과 폭력성과 음란과 미움과
시기와 열등감과 교만과 같은 모든 옛사람의 잔재들이, 그 영적인 독성들이 씻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던 어둠의 권세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여러분 인생에 정말 꼬여버리고 힘든 상황이 생기면,
여러분은 움직이기를 스톱하시고, 예수님의 보혈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다.. 완전히 속을 뒤집어놓고 대화가 안 된다.. 할 때도
여러분의 그 똑똑한 엘리트 부모의 멘탈리티로 애를 잡을 생각을 하지 마시고
'주님의 보혈로 그 아이를 덮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여러분 하십시오.
포기가 되어야 보혈이 들어옵니다.
여러분의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똑똑한 사업수단으로 아무리해도 안 되는 이 비즈니스에
여러분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보혈이 흘러들어와 주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병고침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초대교회에서, 그리고 지난 2천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전한 믿음으로 성만찬 가운데 병이 나음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서도 병이 나을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199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에서는 기독교 역사상
쉽게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기독교인 증가율이, 지금 인도네시아가 제일 빠릅니다.
순식간에 인구의 20%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슬림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는데
무슬림들이 그렇게 많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각 교회의 성만찬 예배 때, 특히 기적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랍니다.
인도네시아가 굉장히 폭력과 음란한 사건이 많거든요.
사람들의 정신병이 낫고, 육체의 병이 낫는 기적들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만찬을 통해서요. 그래서 무슬림들이 엄청나게 많이 그냥 집단으로 개종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래서 세계이슬람본부들이 이것을 막고자, 인도네시아에 엄청난 오일머니를 부어넣어서
기독교의 확산을 막는 이슬람 학교들을 막 세우고 있는데,
기독교의 확산을 결코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이 성만찬에 나타나는 이런 기적이죠.
저는 그래서 여러분이 성만찬을 단순한 예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천년 동안 단순한 예식이라면, 예수님이 계속 하라고 하셨겠어요?
◑6. 또 성만찬의 축복은, 우리 안에 <은폐된 죄와 가식적인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눅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사실 최후의 만찬이 열리기 직전까지 이미 배신자 유다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다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유다까지 포함된 제자들을 데리고
이 성만찬을 여시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도 유다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와 관련된 말씀을 성만찬 이전에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는 가룟유다가 만찬 도중에 나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눅22장에서는, 성만찬 이후에
주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유다의 배신 사건을 주님께서 성만찬 사건 안에서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오고 있었죠.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서 제일 똑똑했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요즘 대기업 입사시험에 통과할 사람은 유다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아주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계산기를 한참 두드린 다음에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정말 예수가 다윗 같은 메시야가 되어서, 새로운 정권에 리더가 될 줄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권실세가 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야심의 도구로 예수님이 이용당하지 않으실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유다는 배신을 결심했겠죠.
주님께서도 그것을 아셨는데, 하필 성만찬 그 시간에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시니까
유다가 제발이 저려서 물어봅니다. '랍비여, 저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도다' 그런데 마치 암호처럼 주고 받는 말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여러분이 포인트를 잘 보십시오.
유다는 교회를 안 다닌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히 다녔습니다. 믿음이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변질된 믿음이 다 드러나지 않다가, 성만찬 때 예수님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다닌다고 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용해먹으려는 그런 사람들도 많아요.
우리 안에 가룟유다 같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기도해서 한 번 성공해보려는 수단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가룟유다는, 성만찬 앞에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날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이 무섭습니다. 드러내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짜를 드러내게 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가룟유다'가 다 떠나기를 바랍니다.
◑7.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세>를 조심해야!
고전11: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죽은)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만찬을 함부로 받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받지 않는 사람도 나와야 됩니다.
'이번 달에는 성만찬 참석 못하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거부하는 사람도 나와야 합니다.
특히 자신 안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 없이 매너리즘으로 참여하는 것,
특히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주님의 몸을 분열시키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 거부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함부로 먹고 마시면, 그게 오히려 자기에게 화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전에는 자기를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벌써 성만찬 나오기 전에, 집에서 한 주간 동안
자신을 회개하고 살피고 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아들을 죽이셔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함부로 경박하게 먹고 마시면
'보혈모독죄'에 걸립니다.
곧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고전11:29
이 말은, 자기의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불론, 평범함 속의 은혜 (0) | 2016.04.25 |
---|---|
희생의 신비 (0) | 2016.04.11 |
보라 이 사람을 (0) | 2016.03.23 |
세상을 이기는 믿음 (0) | 2016.02.24 |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0) | 2016.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