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 사람을 요19:1~16 2013년 종려주일 설교, 출처
※꼭 읽어보세요!
◑서론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증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울증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가면 증후군"입니다.
이 증세는, 사람들은 다들 자기 자신이 어떤 영광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있을 때 불안해합니다.
왜냐면 실제로 자기 실력보다도, 사람들이 자기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언제든지 자기의 본모습이 폭로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위치는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 가면이 벗겨질까봐 두려워한다는 거죠.
그래서 많은 정상급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연예인, 정치인, 경제인들이
이런 두려움에 많이 사로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인기나 인지도가 조금만 낮아지면, 견디지 못합니다.
'모든 게 폭로되었다. 내 부족함이 드러났다.'고 생각해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으로는 자살까지 시도하게 됩니다.
1970년 후반에 미국 조지아 주립대 심리학과에 근무하는 폴린 클랜스와 수전 임스가
이 가면증후군을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모습과
외부 사람들이 바라보는 외면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이 갭을 메꾸지 위해서, 편법을 쓰게 됩니다.
원칙대로 하지 않고, 뭔가 다른 꾀를 쓰게 되는데, 그것을 어떤 정치적인 계략을 쓰든지,
아니면 권모술수를 쓰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갭을 메꾸려 하다보니까,
많은 문제가 계속해서 파생하게 됩니다.
본문의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정치적인 야심이 크고, 또 자기가 유대총독으로 있으면서,
이곳에서 뭔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를 원하는데, 실제적으로 계속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니까
어떤 사건도 원칙대로 하기보다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상황이 아주 복잡하게 꼬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요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아무 죄도 찾지 못했으면, 총독으로서, 재판하는 자리에서 풀어주면 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이렇게 말해 놓고 일련의 다른 조치를 취해 나갑니다.
굉장히 정치적인 그런 행보를 해 나가죠.
예수님은 무죄인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석방이 안 되고
많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게 되신 거죠.
결국 예수님의 고난은, 빌라도가 자기 정치적인 부담을 좀 줄이면서
유대인들의 요구도 적당히 들어주는 시늉을 내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불필요한 고난을 많이 겪게 되신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사악함과, 빌라도의 아주 간사함이 겹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겪게 되신 거죠.
오늘은 이 빌라도의 측면에서
도대체 빌라도가 어떤 방식의 태도를 취했기에
예수님이 큰 고난을 겪게 되었는지를,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가장 저주받은 사람 중에 한 명
끊임없이 그의 죄가 고백되는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렇게 전 세계 신자들이 신앙고백을 하는데요,
도대체 빌라도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신앙고백에 까지 등장할까요.
물론 일부 학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하고 애를 썼다. 편들어 주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만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인간의 아직 극악한 죄악성이
빌라도의 행동 속에 나와 있습니다.
결국 빌라도(또는 나 같은 인간)의 사악한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것이죠.
우리가 사순절을 겪으면서, 예수님이 고난을 묵상할 때
도대체 예수님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빌라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빌라도는 <원칙을 무시>하고 재판을 진행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오게 됩니다.
요19:1절에,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4절에 계속 보면, 군병들이 조롱하고 처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백성들 앞에 '보라 이 사람을!' 하면서 예수님을 내 보이는데요. :5
▲여러분, 이 빌라도가 왜 갑자기 예수님을 채찍질 하도록 내보냈을까요?
왜냐면 바로 직전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를 찾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랬으면 풀어줘야지, 왜 잔혹하게 채찍질을 했을까요?
죄가 없으면 풀어주는 게 원칙인데, 그 채찍질을 잔혹하게 한 이유가,
로마 법대로 하지 않고, 원칙을 무시하고
뭔가 지금 권모술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나는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고 해놓고 요18:38
이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39
여러분,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 했으면, 그냥 풀어주면 되지,
갑자기 유월절 전례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예수를 풀어주는 것은, 법적으로 당연한 것인데,
유월절 전례 이야기를 갑자기 언급하면서,
유월절 특별 사면으로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그 전례를 따라서, 내가 한 사람을 놓아주려는데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랴, 즉 예수를 놓아줄까?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왔기 때문에
빌라도가 그냥 죄없다고 풀어주면, 자기 인기가 떨어질 것을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을 좀 만족시켜줘야 자기 위치가 안정될 것 같아서,
그런 계산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전례를 아주 중요시여기는 총독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유대인들이 선택을 할 때, 죄없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바라바 같은 이런 살인자를 선택하겠나?'
그래서 '내가 유대인의 왕을 놓으줄까?' 이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자기가 원칙대로 했으면, 이런 제안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월절 전례는 전례이고,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니까 그냥 놓아줘야지요.
유월절 전례 때문에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여러분 우리들은, 자신이 편법을 쓰고 둘러대는 이런 일들 때문에
불필요하게 다른 희생양을 찾고, 불필요한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게 됩니다.
원칙을 무시할 때, 꼭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랬더니 예를 들어서, 유월절을 경축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놓아줄까 했더니↓
요19: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빌라도의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잔머리를 굴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된 제안을 다시 철회하려고,
'내가 실수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니까 놓아주겠다..' 이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또 다른 편법을 쓰게 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보내서 채찍질 하게 합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을 잔혹하게, 온 살점이 다 떨어져나가도록, 뼈가 보이도록
잔인하게 채찍질 하게 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빌라도가 처신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원칙을 무시한 잘못된 결정을 무마하고,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 싫어서, 예수님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보라 이 사람을’ 하면서,
빌라도는, 채찍질 후에 왜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데려갔을까요?
'예수를 너희들이 죽여야 될 만큼 강한 분도 아니고, 이렇게 초라하고 별 볼일 없으니까
관심 기울이지 말라'.. 하면서
'내가 이 정도로 잔혹하게 처벌(채찍질)을 내렸으니까, 더 이상 죽이라는 요구를 하지 말아라'
지금 이렇게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군중들에게 동정심이 유발되어서,
예수님을 죽이자 라고 했던 그들의 요구가 점점 수그러들줄 알았거든요.
그랬더니 오히려 더 소리지르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죽이라고 백성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결국 예수님은 채찍질을 안 당해도 되실 분이
또 군병들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조롱을 안 당해도 되실 분이
자꾸 원칙을 제쳐놓고, (빌라도가) 자신의 정치적인 야욕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니까
결국 예수님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늘 원칙보다 정치적인 계략이 판을 칠 때
그 사회에 많은 희생양이 나오게 됩니다.
진실보다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도하려고 하면,
일이 더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역작용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요? 원칙이 무시되는 이유가 뭐냐면
결국은 빌라도가 자기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원칙이 무시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남에게는 원칙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런데 자기의 이권과 체면이 관계되면, 그 원칙을 쉽게 무시하고 다른 편법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들 때문에 고난당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 살면 되는데
자꾸 어떤 사건이나 어떤 일에 있어서, 자기의 체면을 세우면서, 말씀을 무시하고 일을 합니다.
깔끔하기는 원칙대로 하면 되는데, 자기가 실수한 것을 뒤덮으면서
일을 해결하려고 꼼수를 부리니까, 예수님이 더 욕을 먹는 것입니다.
더 많은 예수님의 마음에 채찍질이 (나 때문에) 가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습니다.
채찍질을 가해야 될 이유가 없었어요.
자신의 입장을 위해서 잔혹하게 채찍질해서라도, (자기의) 잘못된 제안을 덮기를 원했던 거지요.
결국은 자기 사랑, 자기 집착이, 자기를 무원칙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항상 우리는 진리의 말씀, 원칙대로, 진리대로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정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뭐냐면
내가 해로울지라도, 내가 욕을 먹을지라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대로 진리대로 선택하는 것이, 고난주간에 동참하는 것이지
뭐 안 먹고 안 마시고 안 놀고.. 이런 수준이,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게 아닙니다.
진리대로 살고, 말씀의 원칙대로 선택하는 결단!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의 동정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동정을 따라서
당신이 당하실 그 모든 고난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철저하게 타인 중심이셨습니다.
타인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원칙대로 살아서 그런 고난을 겪으신 것이죠.
예를 들면 사53장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하나님의 원칙이 뭐냐면, 누군가가 대신 희생양이 되면
다른 사람이 나음을 받습니다.
채찍에 맞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음을 입는 이 진리의 말씀 그대로
변명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당신이 친히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원칙대로 사셨습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분명한 원칙을 갖고 사셨고, 태어날 때도 대속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우릿간 가운데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늘 영광스런 능력을 행하면서도,
사람들의 영광을 기대하지 않고, 죽을 날만 생각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줄까?'
그래서 한 알의 밀알에 주목하셨고,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고
예루살렘에서 죽음이 기다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굳게 결심하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원칙대로
남을 위한 존재, 타자를 위한 존재로,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원칙대로, 타협함이 없이 그대로 사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왜 이렇게 채찍질로 온 몸이 상하고 고통스럽게 서 있는 예수님,
같은 동포인데, 로마 군병들에게 잔혹하게 학대를 받은 예수님을 보고서,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을까요?
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동정심이 왜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지독한 자기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채찍에 상하신 그 모습을 보면, 억울하다거나
분을 내거나 그래야 되는데, 예수님은 순한 양처럼 아무 말이 없으십니다.
너무나 거룩한 모습이셨습니다. 그 고통속에서도 사랑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저렇게 흠이 없고 사랑 많고 거룩한 분을, 자기네들이 죽이려고 했다는 것 때문에
그 예수님의 고통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죄성이 더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처참하게 찢어진 예수님의 몸을 보면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원칙대로 회개를 하면 되는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왜요? 자신들의 체면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서!
결국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볼수록 자기 자신들의 죄성이 드러나는데
진실하게 원칙대로 죄를 자복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서 .. 예수님을 없애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책감이 안 느껴지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살면.. 칭찬 받는게 아니고
사람들이 자꾸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왜냐면 다 죄인들끼리 죄짓고 살면, 죄책감을 안 느끼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말씀대로 원칙대로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삐뚤어져 있고, 추하고 악하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입증되니까
견디지 못해서 희생양을 삼는 거지요.
그래서 자꾸 핍박하고, 모함하고,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리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원칙대로 말씀대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그것으로 깨끗이 끝납니다.
변명하려고 하고,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뭔가 정치적인 계략을 꾸미고 술수를 쓰게 되면, 일이 복잡해 집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고난을 주게 된 것이죠.
우리들은 너무나 잔인합니다. 예수님의 오래참으심과 인자하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상하시고
피 흘리시고, 죽임 당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미끼로, 그 오래참으심을 미끼로 해서
죄악을 즐깁니다.
원칙 없이 예수님을 대해도, 예수님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실줄 알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예수님께 한 약속을 어깁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원칙 없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고 원하면, 그 비위 맞추려고, 쉽게 예수님과 한 약속을 어깁니다.
너무나 쉽게 성수주일을 포기하고, 헌금을 포기합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교회를 모르는 척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예수님의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 거죠.
그 분의 은혜를 빙자해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원칙을 지킬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말씀에서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세상에서 미움 받더라도 나는 진리의 말씀대로 살 것이다.'
그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그때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당하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계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하심을
다시 한 번 재림하실 때 그 거룩하심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통탄해하면서, 주님 때문에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의 긍휼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멸시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뀌어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더 이상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 그분 앞에 담대히 설수 있도록, 늘 말씀에 집중하시고,
원칙대로 진리대로 승리하는
그리고 의로운 고난을 당하기로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빌라도의 두 번째 문제는 <책임전가>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죠.
인간은 자신이 지은 실수와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죄가 아무리 심각해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2011년 6월에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캄보디아 특별 재판소가 열렸습니다.
크메르 루지 정권이 집권기간 동안에 2백만명의 자국민을 학살하게 되는데,
자기 동포의 1/3을 학살한 것입니다. 처참한 일이었죠.
공산주의라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렇게 잔인합니다.
안경을 꼈다는 이유로, 또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32년만에, 드디어 재판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크메르 루지 정권에 있었던 핵심인물들이 그 다음 정권에도 있었기 때문에
재판이 열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원흉이었던 폴포트는 1998년에 이미 사망했기에 2011년 재판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서 일했던 핵심인물 4명(누온체아, 카우삼판, 이엥사리, 이엥타리트)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세기의 재판'이라고까지 불렸는데, 아주 엉뚱하게 재판이 진행됩니다.
그 중에서 누온체아는 크메르 루지 공산정권의 2인자로 불린 사람인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선그라스입니다. 그는 선그라스를 끼고 재판석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합니다. '재판이 너무 불공정하다!' 그러고는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무슨 재판에 피고로 나온 사람이, 마음대로 나가버립니까.
그 다음에 이엥사리가 나왔는데, 그는 특별사면을 전 정권에서 받았다며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나는 몸이 아프니까 간다' 하며 가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들이 다들 80세 이상 고령이 되었고, 며칠 전에 이엥사리가 사망했습니다. 13.03.14.사망
제대로 재판이 나중에 치러질지, 누가 책임을 질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많은 동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책임지는 사람이, 죄책감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민족이 지금 어떤 위기 속에 있는지 잘 봐야 되는데
다들 남을 손가락질하고, 남의 책임만 묻습니다.
'북한 때문이다. 여당 때문이다. 야당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타락한 문화 때문이다' 등등.
정말 아무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회개하고 애통해야 되고
죄를 자복해야 되는 순간인지 모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자
이렇게 말합니다.
요19: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말합니까.'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 그렇지만 못 박으라'
총독의 권한으로써, 총독이 책임을 지고
'그러니까 그 분은 자유다. 아무도 건드리면 안 된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그런데 아무리 식민지 백성이라도, 그들이 넘겼다고
죄를 찾지 못한다고 하면서, '너희가 데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
이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총독으로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이
십자가에 못 박히느냐/자유케 되느냐가
총독의 한 마디에 달려있는 이 순간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 너희들이 데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려면 못 박아라' :6
이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들 이렇게 책임 안 지는 분위기에서,
그 당시에 책임 있는 사람(총독)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에게 책임을 떠 넘겼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자기가 어떤 권한을 갖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요19: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자기가 놓아줄 권한이 있으니까, 죄 없으면 풀어줘야, 자유롭게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남에게 떠넘깁니다.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요.
빌라도는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남에게 떠넘겼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도 고난을 당했지만, 빌라도가 책임을 면제 받은게 아닙니다.
두고두고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신앙고백합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해서'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최종 결정권자로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 황제에 의해서, 유대의 5번째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주후26~36년까지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를 10년간 통치했습니다.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을 로마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책임을 져야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라 부르는데,
본도 지방 출신의 빌라도 라는 뜻입니다.
'빌라도'라는 말 뜻은, 헬라어로 '창으로 무장한'입니다. *헬, 필라토스
실제로 총독은, 사람을 죽일 권한도, 살릴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지금 내려놓고 책임을 안 지겠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후에 빌라도는, 그리심 산에서 사마리아 인들을 습격해서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빌라도의 행동이 너무나 옳지 못한 것을 알고는, 주후36년에 그를 소환합니다.
그리고 갈리큘라 황제가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게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빌라도는 죄책감이나 자기의 모든 무능함이 드러나면서
결국 '가면증후군'에 의해서 자살하게 됩니다.
스스로 못 견뎌서, 살 수 없어서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우리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회피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결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변론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전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변호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각오를 하십니다.
왜 그러셨나요?
예수님은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의 대속의 제물이 되시려고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든지, 내 죄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고 애를 씁니다.
가정에서도 '당신 때문이야', '아니야, 당신 때문이야'
교회에서도,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누구 때문이고, 환경 때문이고, 이렇게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데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람의 죄악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겠다' 그럴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 변명도 없으시고, 그대로 그 모든 정죄를 감당하고 계신거죠.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다 아시고
그들이 떠넘기는 죄까지 다 받아주셨습니다.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선함'이 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일치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죄를 떠넘기고, 예수님은 '그래, 내가 대신 담당할게' 하셨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승자는 책임을 지는 태도로 살며, 패자는 약속을 남발한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약을 남발하면서도, 하나도 책임감 있게 행동 안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의 그 죄, 그 아픔, 그 절망, 그 잘못을 내가 다 감당할게'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책임감이 없어질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가정에 가장이, 직장에 부서장이 책임을 안 지면
반드시 희생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신에 누군가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회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 희생양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회개하고, 누군가가 가슴아파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타락하고 교만한 한국사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한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사회를 위해서
누가 이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 것입니까?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타락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주간에 우리가 해야될 일이 뭡니까?
이슬람은 이슬람 달력 9월달에 한 달 내내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라마단이죠.
불교는 겨울에는 '冬安居 동안거' 그 기간 내내 새벽부터 깊은 기도와 참선의 생활을 합니다.
여름에는 '하안거' 그 무더운 날에 고행을 자처하며 기도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비이슬람, 불교도들도, 함부로 금식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순절 기간인데, 고난주간인데
사회에서 누가 우리를 존중하고 있습니까?
크리스천 중에 누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회개하고 통회하며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라고 누가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저들이 저렇게 우리를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우리가 존경해야지)'
그렇게 사회가 우리에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 모든 죄의 책임을 지려고 오셨습니다.
요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여러분,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된다고 말합니다. 표면적인 말을 보면 맞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당연히 죽어야 되는,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불법을 행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불법을 행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이신데 당연히 죽으러 오셨습니다.
세례요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랬습니다. 요1:29
예수님은 희생의 제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당연히 죽으려고 하셨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책임을 지고 당연히 죽는 거지
죄가 있는 죄인이 죽는 것은, 자기 죄로 죽은 것이지요.
우리 기독교인이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면서도
환란과 핍박을 당하면서까지 이 민족을 위해서 애써야 되고, 기도해야 되는 이유는
죄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죠.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다들 자기 변명, 책임 회피, 책임 전가, '너 때문이야!'
온 언론이 다 그럴 때, 이 위기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어있지 않고
바르게 살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악으로 갚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부흥의 역사를 이루고
경제대국을 이루면서도, 우리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를 탓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렇게 민족의 죄악을 품에 안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일줄 믿습니다.
◑3. 세 번째 <수동적인 결정>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 이유는
빌라도의 <피동적인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요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고(석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놓으려고 애를 쓰는데, 결정은 철저하게 수동적/피동적으로 했습니다.
내몰려서 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요구에, 그냥 떠밀려서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면서 수동적으로 최종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중에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자기 권한 안에 있는데, 군중에게 밀리고 밀려서
자기가 원하고 애를 쓴 대로, 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빌라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그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결국은 주도권을 포기하고
그렇게 여론에 몰려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결국은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배자인데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총독인데,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는 막강한 권세를 지닌 것 같지만, 실제 자기 속은 텅 비어있는 허수아비 같습니다.
이리저리 백성들의 요구에, 떠밀려다니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총독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늘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책임있는 자리에서 주도적이지 못하면 문제가 됩니다.
요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롬13:1절에,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일정하게 자기의 권세 아래서
그 직분아래서는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직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추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에 떠밀려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야 맙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악에 빠지고, 이런 모든 것들
세상에 불행이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너는 어찌해서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했으면
세상이 이렇게 큰 불행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용서 안 하셨겠어요?
그런데 아담이 뭐라고 그랬냐면 '당신이 내게 주신 그 여자가, 내게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남자가 줏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대로 행해야죠.
왜 아담은 그냥 떠밀려서 살고 행동했습니까?
우리는 늘 남에게 떠밀려서 잘못된 선택을 해 놓고
하나님에게 핑계대고, '하나님이 제게 이런 인간을 만나게 하셨고.. 이런 회사에 보내셨고..' 운운합니다.
정말 진리대로 선택하지 않는 것이죠. 늘 남에게 떠밀려서 선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빌라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요. ↓
요19: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보면,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아니 지금 총독이 백성들에게 물어봅니다.
대신에 "너희들은 잘못되었다." 분명하게 자기 옳은 대로 해야 되는데
이렇게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못 박으까?'
이게 총독이 할 말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는데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똑같이 이 점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자녀 답게, 바르게 살아야지요. 왜 군중의 뜻에 밀려다니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결정권을 세속적으로 몰아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만큼 나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죠.
왜 눈치를 보며,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도 욕을 먹고 계십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존경할만한 크리스천이 없는 것입니다.
다들 세상에 비위맞추기 바쁘니까요.
여러분, 주님은 오히려 능동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이렇게 합작해서 못되게 하는데도
실제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땅에 자신의 생명을 주러 오셨습니다. 요3:16
여러분,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억지로 끌려가서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주도적으로 이 모든 것을 섭리하셔서
우리를 위한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마치는 말
자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울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왜 신앙고백에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나올까요?
'그 인간을 잊지 말아라. 나쁜 놈이다.' 라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하게 하려고 사도신경에 넣었을까요? (아닙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죄성에 아주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게 했는가를
너희들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재판하는 과정을 보면서,
너희가 지금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보라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너무너무나 원칙을 무시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쉽게 그냥 어깁니다.
2. 우리는 너무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면서, 내가 이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너무 쉽게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3. 너무나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사랑, 자기 체면 때문에
결국은 이런 짓을 하는 겁니다. 그냥 몰려다니고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거죠.
결국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 말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 바로 그것이 내게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고난에 처하게 했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고백입니다.
'그가 바로 나 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우리는 자기 사랑, 자기 우상화, 자기 애, 자기 영광을 구하다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가족을 희생양으로 삼고, 직장의 동료와 교우들과 이 민족을 희생양으로 삼게 됩니다.
여러분, 더 이상 희생양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말씀대로 살고, 그리고 책임을 지고, 이 민족의 아픔을 짊어지고
그리고 주도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갈 때,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고난주간이니까 보지 말고, 안 먹고, 덜 먹고
그게 고난주간에 일차적 동참이 아닙니다.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주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주님, 제가 주님의 그 뒤를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책임전가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주도적으로 주님 앞에 결단하고 살아갈 때
주님은 그 고난당하신 보람을 느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을 기쁨으로 느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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