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사람들 (2강) 마19:21 스크랩, 출처
*관련글 ; 화해를 원하시는 하나님 (1강)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성 프랜시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긍휼과 사랑과 봉사의 목회, 한경직 목사님
우리는 이 분들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합니다.
이 분들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사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한 여섯 분만 다시 태어나서 우리를 좀 살려주면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을 보시면, 우리들을 그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두실 것이라 봅니다.
-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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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러분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 방송을 시청하시는 여러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요? 사도바울은 '나는 다 알 수 없다.
그때가서야 예수님이 누구신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진솔한 고백이죠.
그래도 하나님이 누구신가요?
우리 아버지이시고,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 중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도 요한이 그랬죠. 예수님을 제일 잘 알았던 분입니다.
예수님 마지막 말씀을 사도 요한에게 전해 주었지요. 내 마지막 말을 좀 세상에 전해라.
그 분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한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두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세번)’
*사도요한은 노년에 설교 요청을 받았을 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똑같은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 그래서 모두를 용서해주시는,
다윗의 죄, 길선주 도사의 죄, 이기풍 깡패의 죄,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
그래서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늘 베풀어주시는 자비, 그 다음에 사랑,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아담 그 후손(가인)부터 아들부터 때려 죽이고 그랬죠.
그런데 화해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평화를 이루어서, 참 재미있게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설교가 많이 되어지는데요...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삶을 산 사람이 누굴까요? ←설교의 논지, 주제
사도 바울, 사도 요한이 다 그렇게 사셨죠.
그런데 교회역사적으로 보면, 제가 평생 교회역사를 전공하고 가르쳤는데
1) 성 프랜시스 같이 하나님의사랑을 그대로 본받았고,
그 하나님의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나타내면서 산 사람이 있을까요?
2)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처럼,
그 사랑을 모두에게.. 나환자, 공산당, 뭐 모두에게 베푼 사랑,
그 모두를 끌어안는, 그런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사람이 있을까요?
3) 한경직 목사님, 사실 1902년에 손양원 목사님이 태어나셨고,
한경직 목사님도 같은 해에 태어나셨고, 같은 해에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셨습니다.
1902년은 참 귀한 해입니다. 세 분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요!
저는 이런 사람들이 12명만 동시에 있다면, 이 나라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아니 6명만이라도 동시에 있다면, 걱정할게 없다고 생각해 봅니다.
*마치 소돔성을 위해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제가 교회역사를 전공했는데, 귀한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뭐 누구 누구 다
그런데 그 운동들이 100명이 한 게 아닙니다.
길선주 목사님과 몇 명이 한국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대 여섯 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몇 명입니다. 요한 웨슬리와 몇 명입니다.
‘아, 그래서 대여섯 명만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 나라는 문제가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끔 하는데,
그 다음에 한경직 목사님, 참 사랑의 긍휼의 사람.
영락교회를 평생 섬기며, 한목사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이창로 장로는
‘한목사님의 특징은, 한 마디로 긍휼의 사람이다’ 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화해, 한목사님께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늘 화해하시고, 늘 평화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 분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사랑과 평화의 사도 성 프랜시스
그분은 가톨릭이라고 싫어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데,
제가 프랜시스, 프랜시스 하니까
어느 제자가 ‘왜 교수님은 자꾸 가톨릭 인물을 거론하십니까?’ 제기했는데,
제 대답은, 손양원 목사님의 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야, 내가 이제는 얼마든지 성 프랜시스를 거론해도 되겠구나’ 했습니다.
(조금 후에 잠시 이 점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사실 성 프랜시스 때문에 한경직 목사님이 생겼습니다.
제가 한경직 목사님 탄생 100주년 때, 2002년에 장신대 가서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다 절망했어요. 결핵 말기에요.
그때 신학책, 철학책 다 그만두고, 성 프랜시스 책을 읽다가 한목사님은 고침을 받고,
(일제의 어려움을 뻔히 아시면서도 미국에서 자진 귀국하셔서),
제일 어려운 곳, 북한의 신의주로 가십니다.
거기서 고아들과 노인들을 돌보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랜시스를 본받았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세상에 성 프랜시스 같은 사람이 100년에 한 사람씩만 태어나도,
지구의 운명이 바뀔 것이고, 구원 못 얻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칭송하며 얘기했어요.
▲성 프랜시스, 그분은 사랑, 그 다음에 평화입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그 근원은, 예수님을 닮고 싶어했어요.
그 분의 간절한 소원, 마지막 라베르나 산에서 간절히 2년동안 기도에만 몰두했어요.
그 기도의 제목은 ‘주님, 제가 예수님을 좀 닮을 수 없겠습니까?’
‘주님이 고통당하신 것, 주님이 아파하신 것, 제가 좀 닮을 수 없습니까?’
주님이 아무 것도 가지시지 않으신 것처럼,
저 프랜시스도 아무 소유를 갖지 않고 살았습니다.
주님 닮고 싶은 게 그 분의 간절한 소원이었고, 그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뭐 신학교에 가서 배운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깊이 묵상해서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도 그랬습니다.
‘참된 진리는, 명상에서 얻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씀했지요.
갈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성 프랜시스는 어릴 적부터 주님을 닮고 싶어했어요.
그는 일평생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애를 썼어요.
그렇게 사시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버림(포기)과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해 지셨는데,
예수님이 하늘 영광 다 버리셨는데..’
그래서 버림과 가난과 청빈을 평생 몸에 짊어지십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였습니다. 아시시의 유명한 포목상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그 상속권을 다 버립니다. 편안한 삶도 다 버렸습니다. *성령님이 그런 감동과 인도함을 주셨겠지요.
세상의 향락도 다 버립니다.
모든 것을 버립니다.
나중에 학문까지 버립니다.
저 김명혁 목사는 그 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일평생 학문을 추구했는데,
학문도 너무 추구하면 교만해진다’는 사실을,
프랜시스를 통해서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대학을 나오셨으며, 박사를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다 버렸습니다.
가난입니다. 청빈입니다.
절대 청빈입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작은 예수로 사셨던 장기려 박사님도 그러시더라고요.
이성봉 목사님도 거의 그러시더라고요.
‘아, 가난이구나!’
집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재산도 없고, 통장도 없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빈손’이라 불리죠.
장기려 박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자원해서 ‘가난’으로 사셨습니다.
자기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가난해서 도와줄 사람이 천지인데, 도저히 땅에 쌓을 수 없었던 것이죠.
이성봉 목사님도, 마지막에는 자기 집까지 팔아서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셨습니다. *가족들은 좀 고생했죠.
그런데 프랜시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랜시스는 21살 때,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깊은 기도에 빠집니다.
그때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합니다.
성경말씀에 프랜시스는 철저히 순종한 것입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땅에서 부자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슬쩍 건너뛰지요.
마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그래서 실제로 프랜시스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제 김명혁 목사가 늘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데,
저는 세계 어디를 가든지, 아프리카를 가든지
꼭 요런 작은 가방 하나만 갖고 다닙니다. *노트북 컴퓨터 담는 가방 크기
이 가방을 가지고 선교여행을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제가 프랜시스를 닮았다는 뜻은 아니고요.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다가 도둑을 맞기도 하고,
또 짐을 놓쳐서, 짐이 그 다음날에 도착하기도 하고요,
뭐 이런 경우들을 제가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10:9~10절에 의거, 가방을 아주 최소화해서 다닙니다.
성 프랜시스는 두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그래서 가난하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가난해지셨는데, 주님이 벌거벗으셨는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셨는데,
하늘영광도, 하늘의 부요함도, 자기 생명과 피와 살까지도 다 버리셨는데..'
그래서 주님의 벌거벗은 삶을 설교하면서,
자기도 옷을 다 벗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나중에 그게 진심인줄 알고, 다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도 나중에 십자가에서 다 벌거벗으셨으니까요.
사실 마지막 죽을 때, 사람들은 다 벌거벗습니다.
그렇게까지 주님 닮기를 애를 쓴 성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께는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은 하나도 없었어요.
네 그분의 사랑은 산적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나환자들에게도, 무슬림에게도, 또한 이단들에게까지 미쳤고,
사나운 늑대에게도, 또한 동물들과 식물에게도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다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대들에게 찾아온 사람은
그가 친구이든, 원수이든, 살인자이든, 강도이든
반드시 형제로서 맞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9, 42, 44
그런데 마지막에는 고통도 사랑하십니다.
죽음도 사랑하십니다.
죽음도 주님이 지으셨으니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하고 죽으셨습니다.
‘가난은 나의 애처다.
고통은 나의 스승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그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였고,
주님을 더 닮고자 하는 기도였습니다.
더욱이 마지막 10일 동안은 회개만 하다가 죽었는데,
그렇게 회개 하는데도, 자꾸 회개가 나왔습니다.
회개는, 회개할수록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더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그건 앞서가신 다른 신앙의 선배들과도 일치하는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적당히 회개하지만, 나중에는 더욱 깊어집니다.
‘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이니까?
오 주 예수 나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 가지는, 할 수 있다면 당신께서 수난 중에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그렇게 오래 기도하던 중,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자기 옆구리와 손에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2년동안 그 고통을 지니고, 그렇게 행복하고 기쁘게
‘주님의 고통을 제게 주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저를 빨리 고쳐주시옵소서’ 그럽니다.
사도바울도 ‘제 병을 고쳐주시옵소서’ 하니까
주님은 ‘안 돼! 네게 병이 있어야, 내 능력이 네가 약한데서 온전해 지는 거야!’
성 프랜시스는 병까지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수준하고는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를 품습니다. 모두와 화해하십니다.
그분께는 화해가 안 되는 대상이 없었습니다.
늑대도 끌어안으니까, 늑대도 울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잡아 죽이려고 그랬는데,
‘왜 그러느냐, 내가 가서 달래겠다.’
처음에는 늑대가 으르릉거렸죠.
그러나 잘 달래서 늑대를 끌어안았더니, 늑대가 울었습니다.
그래서 늑대가 그분을 따라 마을로 내려옵니다.
같이 3년 동안 살다가, 늑대는 죽었습니다.
그 분은, 동물과도 이렇게 화해하셨습니다.
모두와 화해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나가 되셨죠.
그래서 결국 성 프랜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불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으리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런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간디를 비롯해서, 한경직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도
성자같은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신 것은,
바로 성 프랜시스를 본받고, 그분을 모델로 따라가신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처럼 사랑, 용서, 자비, 긍휼이 충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손목사님처럼 모두를 끌어안고 화해한 사람이 없어요. (1902~1950)
자기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으로 쏘아죽인 안재선을
긍휼, 용서, 자비, 사랑으로 용서할 뿐만 아니라
끌어안고 양아들을 삼으니까
화해하고, 눈물을 흘리는 효자가 됩니다.
설교한 게 아닙니다. 진리를 외쳐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저는 2년 전에, 손동희 권사님을 통해서, 손목사님의 유품인 문서 몇 점을 전달받았습니다.
-손목사님이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는 심경을 담은 글,
-손목사님 자신의 회개의 마음을 쓰신 글,
-안재선이 아버지 손목사님께 쓴 글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안재선이 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전상서
천주님의 은혜가운데 아버님, 어머님
기체 만강하심을 비옵니다.
이 소자는, 객지서, 하나님의 진리의 힘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감사합니다.
이 죄인은 아버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죗값을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중생하였습니다.
중생하였으나, 소자는 인간인고로
때때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심을 진실로 감사하며 죄를 회개합니다.
주의 피로 쌓인, 진리로 된 부산 고려 고등성경학교에서
여러 귀하신 주님의 종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12사도의 교훈과 진리를 배우게 해주신 은혜와 사랑은,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중생하고 보니, 하나님께 몸 바쳐야 되겠습니다.
나의 있는 것 모든 것 다 바쳐야 되겠습니다.
우리 신자는 다 순교할 의무가 당연히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우리가 죽도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이런 편지를 안재선이 신학교에서, 손목사님께 보냈습니다.
안재선의 아들이, 지금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 목사를, 제가 몇 해 전에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사랑과 화해!
이건 설교가 아니고, 눈물의 사랑, 눈물의 화해가 이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분 여섯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한 분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3.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1902~2000)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 용서, 자비, 사랑과, 특별히 봉사의 목회자이셨습니다.
그 분은 그저 빈자와, 고아와, 노인과, 군인들을 위해서 봉사하셨습니다.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의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소외계층을 찾아서 봉사로 사신 분이십니다.
화해와 평화, 통일!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모두를 불쌍히 여기고,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와 화해한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사님이십니다.
그래서 남북의 평화를 비롯해서
모두와의 평화와 화해를 도모하셨습니다.
은퇴 후에 마지막 노후를 남한산성의 민가에서 20여년 동안 사시면서
매일 새벽마다, 자기를 박해하던 일본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것을, 저는 너무너무 잘 압니다.
제가 한목사님 생전에, 매년 몇 번씩 남한산성에 찾아가곤 했죠.
그때 한목사님을 보좌하던 백운길 장로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남한산성 어느 곳에, 한목사님이 기도하시던 바위가 있어요.'
저는 그 바위에 자주 찾아가 보았어요.
나중에 손님들이 오면, 제가 꼭 거기로 안내하곤 했습니다.
수많은 방문객들, 독일 사람들, 외국인들까지 다 감동을 받습니다.
남한산성의 뭐 한 열다섯 평 되는 조그만 집에서
침대 하나 밖에 없는 침실에서
다섯 명이 앉을 수도 없는 거실에서
그런 집에서 26년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분도 가난의 영성, 삼무, 四無, 오무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목사님은 긍휼, 용서, 자비, 사랑 그리고 봉사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목사님은 <신의주 제2교회> 때부터 고아원과 양로원을 만드셨습니다.
제 김명혁 목사의 부친 김관주 목사는, 한목사님이 불러주셔서
신의주 제2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한 목사님의 사역을 잘 압니다. 제가 당시 한 살때부터 였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교회에서 쫓겨나니까
양로원 원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고아원의 고아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서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 두 사람이 배출됩니다.
나중에 그분들이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는 한목사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남하하셔서, 영락교회를 개척하셨는데
이 교회는 개척초기부터 봉사를 첫째로 하셨습니다.
(물론 교회 설교와 교육도 하셨지만요.)
그래서 피난민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다음에 625가 나서, 대전, 대구, 부산에 가셔서
피난민들을 돕고, 인민군까지 도우셨습니다.
밥 피어스 목사님이 와서 함께 이들을 좀 돕자
기도회를 하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고
미국에 가서 월드비전(구호단체)을 만들게 하십니다.
한승훈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자선기관, 구제기관치고
한경직 목사님이 만들지 않은 기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영락교회 이창로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가슴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영락 보림원,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등
마지막에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평생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분은 없습니다.
한목사님의 사랑을 받고 산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들을 합니다.
‘그때 한목사님이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거지들도 고백합니다.
손자들에게는 백원, 이백원을 주셨지만
거지들에게는 큰 돈을 주셨습니다. 십만원 수표도 주신 일이 있습니다.
신의주 때부터 그러셨습니다.
장기려박사님도 그러셨죠.
거지에게 당시 10만원짜리 수표를 주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거지가 훔친 줄 알고, 거지를 잡아왔습니다.
사실은 장로님이 주신 줄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한목사님은 사례비를 받으면, 전부 뚝방 길에 가셔서
거지들에게 나눠주셨기 때문에, 신의주제2교회 장로들은
‘이제 사례비를 목사님께 드리지 말고, 사모님께 드려야 되겠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목사님은 모든 사람과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셨습니다.
최창근 장로가 은퇴 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목사님이 교회를 목회하실 때, 제일 주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화해였습니다.’
한목사님은 통일을 그렇게 염원하셨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일본에 대해서, 증오나 분노가 없으셨습니다.
한 15년전 쯤에, 한국교회에서
‘우리는 분노, 증오를 행동화해야 된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한경직, 손양원 목사님은 분노, 증오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분들을 품으셨습니다.
▲마치는 말
이렇게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산 사람들로
성 프랜시스,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의
삶과 사역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분들은 너무 선하신 분들이었고, 너무 착하신 분들이었고
너무 따뜻하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분들은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몸에 지니고, 맨날 울면서
모두와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과 통일을 위해서 살며 기도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우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분들의 마음과 얼굴에는 분노가, 증오가 없으셨습니다.
증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닮은 온유와 겸손, 긍휼과 사랑, 화해와 평화의 모습만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런 분들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합니다.
이런 분들이 한 여섯 명만 다시 태어나서,
우리들을 좀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을 보시면, 우리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죠.
그런분들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의 통일도 주시고,
아시아의 평화도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한국교회로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우리 몸에 부어주셔서
다 산제물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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