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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는 가정

LNCK 2016. 4. 7. 11:18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는 가정        빌3:7~9       15.05.03설교스크랩, 출처 


    

 

가정의 위기의 근원은?

 

요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실제로 많은 영역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위기'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으니까, 위기에 대한 불감증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우리가 많은 종류의 위기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위기, 진짜 위기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현실적으로,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 근본 원인을 잘 파악해야 됩니다.

드러난 어떤 현상을 가지고 아무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 숨어있는 근원적인 원인들을 찾아내야 되는거죠.

 

자 오늘날 우리 가정의 위기는,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요?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서 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가정의 기원은 창세기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죠.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상태의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아담에게 유혹했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한 것입니다.

 

최상의 상태, 너무도 좋은 환경,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어요.

그런데도 마귀는, 뭔가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속삭인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에, 시선이 꽂히게 만들어, 결국 그걸 따먹게 합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 안에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부의 관계 속에 책임전가, 또 서로를 판단하는 마음, 그리고 두려움, 수치감,

이런 것들이 계속 되면서, 그의 아들 대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형제간의 살인극까지 벌어집니다.

 

창세기를 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일의 재현입니다.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문명이 발달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 같지만,

인간은 변함이 없이 똑같습니다. 창세기나 지금이나!

왜요? 원뿌리가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우리가 집중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4주 동안에 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의 부부의 관계를 맺어가기 위한 방법론적인 얘기들을 많이 하는 것은

시중에 많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적인 문제, 아무리 표면적인 것을 가꾸려고 해도,

그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근원적인/성경적인 답변을 우리가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 가정사의 비극의 출발은, 한 가운데로 계속 들어가면 결국 죄문제입니다.

어떤 가정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웬수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돈은 죄가 없습니다.

돈을 만지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죠.

외적 요소, 조건 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게 절대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은, '이런 일들 때문에, 이런 조건들 때문에, 이런 환경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원인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런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이 있지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죄입니다.


자 그러면, 그 죄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가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내면, 그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실낙원(낙원을 잃어버림)을 한 인간의 마음은

공허해 졌습니다. 이 공허한 인간은 늘 불만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접하는 메시지는, '네가 가진 것으로는 부족해!' 라는 메시지가

계속 우리를 감싸고 설득합니다.

'네가 지금 있는 상태로는, 네가 가진 것으로는, 너의 그 남편/아내로는,

너의 그 자녀로는 너는 뭔가 부족해. 만족할 수 없어!' 이렇게 유혹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불구하고

마귀는 '너는 아직도 부족해, 뭔가 하나가 더 필요해' 그러면서 선악과에 집중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만큼은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죠.

한 번 꽂히면 갈 데까지 가는 거죠.

이것은 우리 안에 공허함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문제들의 근원이 바로 이런 것들이죠.

분명히 결혼했고,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는데

거기서 만족을 못 느낍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성적에 만족을 못합니다. 그 정도면 되는데,

당신이 학교 다닐 때보다 아이가 더 공부를 잘 하는데, 2등이나 하는데,

부모는 그 아이 앞에 1등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그렇습니다. 부모들은 옆집 애들은 다 모범생들처럼 보입니다.

공부도 잘 하고요,

'옆집 애 봐라. 몇 동 몇 호 애 봐라

비교당하고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은 몹시 고통스러워 합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주변에 청소년 자살이 만만치 않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닦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를 소유하려고 하는거죠.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데,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죠.


   어떤 사람은 자기 코가 조금만 더 높았으면 자기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코를 높여 보세요. 언발란스가 되어서 다른 데를 또 고쳐야 됩니다.


우리는 뭐든지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가지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채워도 만족은 끝이 없습니다.


더 채우고 싶은 욕망만 커지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만족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 원할수록 더 매이고 더 속박당하고, 기대는 늘 실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은데, 행복이 안 됩니다. 오히려 행복을 잡는 순간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말했던 것처럼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잡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맙니다. 바람처럼요!


인간이 추구하는 도착지에는, 어디에나 실망과 한숨소리로 가득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이 안 됩니다.

추구할수록 공허해지고, 목은 더 마르고, 갈증과 절망은 더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자 언제부터 인간이 이렇게 되었다고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이후부터입니다.

무엇으로도 안 채워지는 것입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탐심을 일으킵니다. 그 탐심은 끝이 없어요.

인간의 마음에 탐심이 찾아오면 멈추고 싶어도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탐욕은 끊임없습니다. 탐심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요즘 우리 식당에 가면 맛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먹을 만큼 먹고 배가 불렀어요.

그런데 디저트가 또 나옵니다. 그런데 이 디저트가 요즘 만만치 않습니다.

메인 요리 이상으로 접시도 크고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이어나오는 커피가 사발 수준입니다. 거기에 생크림이 산더미처럼 얹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업원을 불러서 따집니다. '며칠 전 먹었을 때보다 생크림이 적게 얹혀져 있네요'

이렇게 탐심은 스스로 제동이 안 걸립니다. 계속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에게서 탐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영혼은 시달릴 대로 시달립니다.

탐심을 그대로두면 우리 삶은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매우 피곤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이것이 가정 안에서는 가족들 관계 안에서 파괴를 일으킵니다.


서로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거죠. 왜요? 탐심이 있으니까요.

그 탐심이 우리를 서로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닦달하고,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기 전까지는 서로 완벽한 배우자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 서로에게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함께 있는 게 불편했습니다.


가정 안에 탐심이 작동하면, 가족관계는 깨어집니다.

왜요? 죄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입니다. 서로의 관계가 이용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용되는 것이죠.


엄격하게 들여다보면, 자아중심적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가족이 존재할 때,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에는, 탐심이라는 우상이 우글거립니다.

이 우상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우상은 계속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욕망하게 하는 것이죠.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도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자녀를 몰아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늘 보고 있습니다.


자식이 우상이 되면, 그 가정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죠. 모든 것을 거기에 다 쏟아 붓습니다.

부부가 싸울 때도 보면, 그 아이 때문에 싸웁니다.

아이에게 집착하고, 때로는 남편 혹은 아내에게 집착할수록

그 관계는 더욱더 깨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요, 탐심입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욕망이 자녀를 통하여 드러나는 거죠.

거기에 하나님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전쟁은 치열합니다.


인간은 언제 우상을 만들죠?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할 때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거죠.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자녀를 통해 성취하고자 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 아이들을 닦달합니다. 애들을 잡습니다.

공부를 못하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가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이고, 각자가 욕망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간의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각자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죠.


그 우상숭배의 한 가운데는, 자기 중심성,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가족구성원들이 바라보고 구하고 추구하는게.. 각각 다 다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이 죄입니다.

사사기 표현을 빌리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가족 수 만큼이나 자기의 고집을 부린다면, 결국 그 가정은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가정에 끼어들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수가 없습니다.

각자가 바라보는 것, 각자가 추구하는 것, 각자가 욕망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 가족들이 큰 맘먹고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한 번 하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가족이 뭘 먹으러 갈까.. 의견 통일이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이 안 나서, 결국은 돈 나누어서 각자 따로 먹으러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들도 보면 고집이 대단합니다.

의견대립이 있고, 뭘 하나 하려고 하면, 이게 쉽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통일이 안 되는 이유가, 혹시 가정에서부터 통일이 안 되는 것 때문이 아닐까요?


늘 채우려고 하고, 항상 소유하려고 하는 끝없는 탐심은 언제 끝날까요?

이 탐심, 우상숭배, 자아중심성, 끊임없이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이 모두가

각기 자기가 신이 되어, 자기 의견과 고집을 내세우는 이 가정 안에,

언제 통일이 가능할까요? 언제 하나가 될까요? 화합이 될까요? 언제 샬롬이 이루어질까요?


왜 우리는 끊임없이 채우려고 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탐심.. 이게 멈추어지지 않으니까요...


 

◑삶이 공허하고 만족이 없는 근본적 원인은?


여러분, 탐심은 채워지기까지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뭔가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채우고, 저것을 채워서 소유하고 채워보려고 하지만 더 허전해 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행복하려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는데,

행복은 고사하고 더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를 낳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애물단지가 될 줄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갈망하는 것은 언제나 빗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갈망하는가요? 왜 채워지지 않는 그 갈망을, 끊임없이 인간은 갈망하는가요?

이 갈망 안에는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거죠.

왜요? 죄로 인간이 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을 갈망해야 되는지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탐심이 눈이 어두워지게 만들었습니다.

욕망에 끌려 인생이 가야할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만이 우리에게 대답해 줍니다.


갈망함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목표로 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갈망하게 하는데,

죄로 그 갈망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성경은 그 갈망이 분명하게 화살표를 향하여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

그리고 그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해답도, 가정의 해답도..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만족시켜줄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빌3:8절에 바울의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매우 중요한 표현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얻고'가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얻고' 라는 이 말씀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범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에게 찾아온 헐떡거림,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의 해답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자기가 추구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잃어버릴 수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전에는 헐떡거렸습니다.

세상 것들로 자신의 만족과 성취를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만족을 얻자,

그 이후 바울에게는 결핍 증세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시23:1절의 표현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와 같은

놀라운 경험을 바울이 하게 됨으로,

그가 그동안 그렇게 자랑하고 쌓았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도무지 통제할 수 없었던 탐심이 사라지고, 완전한 만족을 맛보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 해답을 바울은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5장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던 베드로가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 즈음에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그러자 두 배가 만선하게 되는 놀랍고도 풍성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어부가 고기를 두 배에 채우는 그런 엄청난 수확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부의 눈에 고기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합니다.

그 분이 우주의 주인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자 자기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게 됩니다.


그의 생업의 수단이요, 삶의 근거였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던 것은,

그렇게 귀중하던 고기, 그 소중하던 배와 그물을 버려둘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 그 분은 우주의 주인이시오,

이 고기들과 배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삭게오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서 그토록 붙들고 있던 물질을, 상당하게 내어놓습니다.

여러분, 이 삭게오에게 돈은 전부였습니다.

동족들에게 욕을 얻어먹으면서 돈을 벌던 세리장 삭게오에게, 물질에 대한 탐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를 만난 순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죠. 모든 좋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미혼 자매가 능력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보니

   나는 그 남자가 좋아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그 남자와 함께 따라온 게 너무 많아요.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동시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 남자가 누리고 있던 것들을 함께 동시에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남자가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함께 타고 다니고,

   그 남자와 함께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반지 정도가 아니라 그 남자와 함께 많은 것들이 따라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풍성함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그 풍성한 은혜를, 그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얻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충만함, 가득 채워진 마음, 더 이상 헐떡거림이 없는 충분한 만족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전의 욕심들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허기진/뻥 뚫린 인간의 가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하면, 그것은 공허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마주치면,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 풀어질 때,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는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전율하는, 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는 은혜가 밀려오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오고,

그리스도안에서 온갖 보화가 쏟아져 나오고,

마침내 천국이 송두리째 내게로 밀려오는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부터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됩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상대를 이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안에 근원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갈증을 채우려는 다른 노력이 필요 없게 됩니다.



◑부모가 복음 안에서 만족한 삶을 살면, 자기 자녀를 안 괴롭힙니다.


우리가 가정에 대한 접근들을 할 때, '자녀와 대화법', '행복한 부부 십계명' 다 좋지만

그런 것들은 다 방법론입니다.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엔진이 고장 나 있으면, 아무리 액세서리를 고급으로 바꾸어도 다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4주 동안에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계속 초점 맞추고 다루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 복음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려고 합니다.


자기 고집이 죽습니다. 자기의 주장이 난무하고, 갈등과 대립을 하는 가정이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섬기는 여분의 여유와 에너지가 생기게 됩니다.


가족이 함께 식당을 가더라도,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게 아니라,

다른 식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고집이 줄어들고, 내가 무엇을 먹느냐 하는 탐욕이 아니라,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이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왜요? 내 안에 내적인 만족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집착하거나 고집하는 것들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상대를 닦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가 아이대로 자라가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되는 여유가 생깁니다.

 

여러분, 부모가 욕망하는대로 아이를 몰고가면, 아이들은 상처로 얼룩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상대를 통하여 내가 만족을 얻고자 합니까?

아니면 상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내가 희생하려고 합니까? 이건 큰 차이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 관계안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얻으면, 모든 게 얻어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최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상대방/가족 관계안에서 다른 사람을 내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남편이나 아내에게 행복을 기대하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통해 무엇인가 내 욕망을 이루려고 하면,

그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이 커집니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설정을 바꾸어야 됩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한 게 아닙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죠.

배우자나 자녀가 나에게 만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 출발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결혼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하고 나면, 행복할 것이다.. 나에게 행복이 결혼한 순간부터 몰려올 것이다.' 아니잖아요.


결혼하고 나면 훨씬 더 짐들이 많아지고, 부담이 많아지고,

혼자 살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고, 책임이 더 많이 따릅니다.

여자분들에게 그토록 무거운 시월드(시댁)의 여러 존재들이 몰려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결혼했는데, 이 행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사건과 일들과 존재들이 막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결혼하면 행복한데

신혼여행 때까지만 행복하고 그 뒤부터는 재미가 점점, 행복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면 불행해지는 거죠. 내가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이게 뭐냐는 겁니다.


설정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하기만 하면, 무조건 행복이 자동적으로 찾아옵니까? (아니죠)


'내가 이 아이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면, 먹을 것을 안 먹고, 내 하고 싶은 것을 안 하고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면, 이 아이가 내 노후를 보장해 줄 것이다..'

그렇게 믿습니까? 착각이죠.


나중에 보면,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부모일수록, 나중에게 그 자식을 달달 볶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놈아 그럴 수 있느냐' 그러면서

'내 죽는 거 보겠느냐?' 하는데,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배우자 혹은 자녀에게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기대하면 할수록 실망만 돌아옵니다. 인간의 갈망은 채워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우리의 갈망은 실망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너무 자녀들에게 매달리지 마십시오. 자녀에게 자기 모든 운명을 걸지 마십시오.

아이들도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시드니에 있을 때 보니까, 아이들 데리고 공부 때문에 온 엄마들 많거든요.

'너네들 때문에 내가 (엄마가) 이민와서 고생한다' 그러는데


아이들은 '뭐라고요?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우리 때문에 왔다는 걸 이해 못합니다.

'나는 지금 노랑머리 아이들 속에서 까만머리로 차별 받으면서

안 되는 영어로 공부하느라 고전하고 있는데, 우리 때문에 왔다니..' 도리어 열 받아 합니다.


서로 안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떤 것도 우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탐심은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 뿐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여러분, 우리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되죠?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우리가 추구하는, 우리가 탐하는,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거기에 내 시선을 꽂으면 행복이 오지 않습니다.

그게 나를 만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하는 끊임없는 전략은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돌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뭐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나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모든 대상을 내 이기적, 내 행복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합니다.


부모도 자식을 열심히 키우고 투자하는데,

결국 그 안에 자기 내면에 만족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이 있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되죠?

하나님께로!

진정한 만족은 어디에서 온다고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만족을 내가 누릴 때, 비로소 그 안에 충만한 그 존재감을 통하여,

우리의 가정에서 역할을 감당할 때, 다른 사람의 사랑과 다른 사람을 통하여 사랑을

그리고 그 행복을 누리려고 했던 그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그 만족과 충만함으로

우리의 가족들을, 그 연약한 가족들을,

여전히 연약한 가족들을 끊임없이 섬길 수 있는 여분의 여력이, 에너지가

하나님 안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는 가족들을 향하여 인내하며 용서하며 배려하며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사랑과 그 은혜로

그들을 끊임없이 섬길 때,

그 가정에 샬롬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상대를 향하여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거죠.

자녀와 배우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를 통하여 내가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와 에너지로 그 사랑으로 그 능력으로

그 용서의 힘으로, 그 가족들을 바라보며 섬길 때

그 가정 안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대로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시선을 집중하는

하나님에게서 진정한 만족을 우리가 누리는,

그래서 가족들의 각자 시선이 하나님께로 돌려질 때

그 가정 안에 샬롬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때 관계안에 갈등이 사라지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길은 하나입니다. 행복하고 싶습니까? 가정이 회복하기를 원하세요?

요즘 자녀 문제로, 때로는 배우자 문제로 힘드십니까?

우리의 힘으로 풀려고 하면, 더욱 꼬입니다. 풀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만족을 얻는 삶을 위해,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만족을 누리며,

그 채워짐으로 가정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해 낼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관심을 그리스도에게 돌리지 않고,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내가 설정한 그것을 향하여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욕망하는 동안에는,

우리에게는 결코 만족이 없고, 행복은 더 멀리 도망가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녀에게, 목을 매고,

때로는 남편이 내 인생에 행복의 원천인 것처럼, 아내가 내 행복의 모든 것을 보장해 줄 것처럼,

거기에 목을 매달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깨어나십시오!


오직 행복은, 기쁨은, 만족은, 여호와께로서 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습니다.

그 분안에서 얻은 그 충만함, 그 만족감, 그 완전한 행복,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던 그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그 풍성함이,

내 존재를 부요케 하실 때,

여러분 우리는 가족들을 바라볼 때도 잠잠히 좀 바라볼 수 있어요.


우리의 자녀들이 늘 왔다갔다 방황할 수 있어요.

우리 배우자가 늘 왔다갔다, 내 기대와 실망과 또 만족사이를 왔다갔다..

거기에 우리가 목을 매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살겠습니까. 얼마나 우리 행복이 불안전 하겠습니까.


거기에 목을 매지 마시고, 우리 시선을 여호와께로 온전히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는, 그 안에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남을 만한 그 풍성한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가

여러분들의 가족관계 안에 풀어져 나갈 때,


샬롬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우리의 관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해체할 수 있는 힘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욕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수없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부모와 자녀 관계속에서도 그 끝없는 욕망,

나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그 이기심이 해체가 안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시오, 그 분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만족감을 충분히 확보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그 자녀와 우리의 배우자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끊임없이 섬기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줄 수 있는 에너지가

하나님안에서 흘러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얻었던 바울의 그 놀라운 경험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여 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끝없는, 만족할 수 없는 그 욕망들이 해체되고,

   하나님이 주신 그 충만한 은혜로 그 사랑으로, 그 행복감으로

   우리 가정 안에서 자녀와 배우자를 대할 수 있는 그 여력, 에너지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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