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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새긴 마라

LNCK 2016. 4. 8. 10:29

마음에 새긴 마라          눅2:19, 19:27, 요2:1~4             16.03.24설교녹취, 출처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 내 아들 예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고 내어드릴 때

그는 "진정한 영적인 어머니"가 되었다는 주제의 설교.

    

 

지난 설교 click 복습

 

아프간 전쟁이 한창일 때, 미 육군에 군목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제가 듣기로는, 4천명의 군목이 당장 필요하다고,

그래서 미주 한인교회들에서, 교단적으로 군목을 파송했습니다.

 

그 중에는 영어를 잘 못하는 교포목사님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한인 목사님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군목으로 피택되었는데, 그 분은 훈련장에 가서

영어는 못하지만 너무 전도를 잘 하시는 겁니다.

 

군대 갔다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도 미군 군목훈련을 받았습니다.

한 때 장교로 있었는데,

정말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나면, 마음이 아주 여려지고

그래서 집 생각이 나고,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돕니다.

 

이 목사님은 영어는 못해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훈련이 마치는 그 시간에 심신이 지친 신병들을 찾아가서

영어가 아니라 한국말로 기도를 해 주는 겁니다.

 

먼저 다가가서 단순한 영어로 '솔저, 아이 캔트 스픽 잉클리시. 캔 아이 프레이 인 코리언?'

'한국말로 기도해도 돼?' 그러면 군인이 'Yes, Sir' 합니다.

 

그러면 그 군인을 딱 붙잡고 "주여~~~"를 크고 길게 외쳐 부르고는

자기 가슴에 품고 울면서, 그렇게 한국말로 간절히 기도를 해 주었답니다.

 

한국말로 기도하는데, 그냥 그 미군 신병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나중에 그 군인들이 휴가를 받아 자기 시골 동네에 가서

자기 목사님께 얘기해서, 이 한국 군목 목사님을 부흥사로 초청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은 전국을 다니시면서, 한국말로 설교하셨는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여러분, 유창한 영어보다 더 확실한 소통은 "공감"입니다.

 

저도 군목 때 한국으로 배치되어 미8군 특전사에서 근무했는데,

처음에는 제가 좀 힘들었습니다.

특공대들이니까 키들이 아주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겼고요.

 

그런데 제가 그들의 외모를 보니까 좀 겁이 나더라고요. 제가 동양인이고..

덩치가 큰 군인이, 군목인 제게 상담하러 오더니

제 사무실에 와서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제가 그의 손을 잡고 '마음이 아파? Are you in pain?' 했더니

그때부터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채플린(군목님). 제가 여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유창한 영어보다 더 확실한 소통은 "공감"입니다.

 

어제 소개했던 제 누나는 27년 동안의 암투병을 잘 마감하고,

지금은 천국에 계십니다.

생전에 견디기 힘든 그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도, 정말 이웃의 아픔을 항상 공감했고요,

 

또 죽기 전에는 자기 신체 장기들을 다 기증해서,

지금 누군가는 우리 누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누나의 폐로 숨을 쉬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 남미 브라질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사실 꿈도 옛날에는 포르투갈어로 꾸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남미 브라질에서 자라났는데요

우리누나를 치료하기 위해서, 사실 미국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누나가 혼수상태에 있을 때, 제가 하나님께 막 서원을 했어요. 급하니까요.

'누나를 살려주시면, 제가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때 서원한 결과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목사로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공감의 고난"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구속을 입은 저와 여러분들의 고난도

"공감의 고난"으로 성화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그냥 아파만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절망이 되고

또 고난이 있어서 정답만 찾으려고 하면, 그것이 (종교)폭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비로 조명하면,

그때 우리의 고난이 "공감"으로 승화됩니다.

 

 

본론/ 마리아의 고난

 

이러한 공감의 고난에 이어서

오늘은 마리아의 고난을 통해서

공감의 고난에서 내려놓음의 고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여인 중에, '마리아' 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일곱 귀신에 들렸던 사람이죠.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공관복음을 잘 읽어보면, 이름만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겼어요.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그 아래까지 간 용감한 여인들이 마리아들입니다.

이 마리아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아주 신실한 여인들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병고침을 받고,

또 예수님한테 먹을 것을 얻어 먹고, 기적을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과

또 목숨을 걸고 따르겠다던 제자들,

또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했던 그들은

오히려 고난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 아래까지, 무덤까지,

그리고 훗날 갖은 박해속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사역을 감당했던 여인들,

그분들이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들입니다.

 

특별히 4명의 마리아들 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이 설교의 주인공)

모든 마리아들의 공통되는 신앙을 아주 전형적으로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분이실까요?

 

여러분 신약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마리아'는 원래 히브리 이름입니다.

구약에는 히브리어로 '미리암'으로 나오는데, 그걸 헬라어로 발음하면 '마리아'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신약의 모친 마리아,

이 두 분이 공통점이 있는데요. 두 분다 찬양이 유명합니다.

'미리암의 찬양''마리아의 찬양'입니다.

 

미리암은 홍해를 건넌 후,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이 출15장에 나옵니다. 그 주제는 '구속의 찬양'입니다. *15:18~22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1장에 보면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합니다.'

이렇게 찬양이 시작되죠. *1:46~55

 

이 찬양은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8대 찬송 중의 하나입니다.

라틴어로 '마그니피캇' 이라 부르는데,  *영어로 magnify 이 말을 한글로 '찬양하며'로 번역. 눅1:46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그들의 구속과 또 기쁨이 충만한 그 찬양 뒤에는

그들이 많은 것을 내려놓고, 포기해야하는

그들의 헌신과 고난과 아픔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 뒤에 숨어있는 많은 '내려놓음의 아픔'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교회사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라는 이름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마리아 라는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 중에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마리아에게 별명을 하나 지어줬는데,

'sea of bitterness 쓴 바다, 괴로움의 바다'입니다.

 

그런 별명으로 마리아의 고통이 얼마만큼 큰 고통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바다'란 고통이 그만큼 아주 깊고 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별명을 가진 것은,

마리아의 히브리식 이름인 미리암은

히브리어 '마라'에서 나왔는데, 마라의 뜻이 bitterness.

그래서 마리아의 별명이 'sea of bitterness'가 된 것입니다.

 

'마리아' 라는 이름에는, 바다만큼 깊고 큰 쓰고 아픈 연민, 고난이

그 이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그니피캇(마리아의 노래)'찬양합니다. magnify' 라는 긍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실제로 마리아의 삶은 '쓴 바다'와 같습니다.

'영광스런 구속의 찬양(마그니피캇)' 이면에, 그런 아픔과 고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마1장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이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천사를 통해 알게 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여러분,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메시야의 그 구속의 기쁜 소식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마리아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마리아 개인에게는, 마냥 좋아할 소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혼란스럽고, 그리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어린 소녀에게는요.

 

처녀로, 혼인 전에 임신한다는 것은, 율법에는 돌에 맞아 죽는 죄에 해당되었습니다.

또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것은, 신비스럽기 보다는,

본인 입장에서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런 비운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문화적 세계관과 어긋나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절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키 어려운 그런 혼란과 고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적으로 끝내 마리아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시고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논쟁적이고, 갈등적이고, 역설적인

인류 역사를 BCAD로 갈라놓은

비합리적이며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 아기 예수를

 

이 어린 소녀가

잉태하고 분만해서 말구유에 누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었어요.

 

오늘 우리가 눅2장을 읽었는데, 본문 눅2장에는

그 아기를 말구유에 뉘었는데, 그때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그 구유에 누인 아기예수를 찾아와서, 마리아에게 한밤 중에

목자들은 들에서 천사로부터 들은 그 천상의 노래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 천사들이 하늘에 나타나서, 이러이러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눅2:18절에 "이를 (목자들이 말한 것을) 듣는 자가 놀랍게 여기되"


그런데 19절에는 "그러나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은 놀랬지만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리아는 자신의 마음에 간직했다."   *개역 :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간직했다' . 숨발로, '깊이 새기고 고민했다. preserve, meditate, engrave,'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냥 기뻐하고 놀란 것이 아니라, 물론 같이 기뻐했겠지요.

그러나 이 아기를 안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놀랐어요.

그러나 자신이 처녀의 몸으로, 지금 아기를 잉태하고 분만하게 되었다는 이 믿지 못할 현실 앞에서,

또한 그 아기가, 내 아들이 아니고, 분명히 내가 낳았는데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혼란스러움이

그 마음에 쓴 고통(마라)으로 새겨진 것입니다.

 

내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니!

 

, 이 사건에 이어서 눅2장은 곧바로 예수님의 소년시절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때 일어난 하나의 아주 중요한 에피소드를 누가복음은 이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셨어요.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러 가셨죠.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그냥 성전에 홀로 남은 것을 모르고,

그저 그가 친척를 사이에 동행하는 줄 알고, 하룻길을 갔습니다.

 

하룻길이면 아마 고대 근동에서 약 30킬로 정도입니다.

가다 보니까 예수님이 없어진 것입니다.

 

당황한 마리아가 다시 예수를 찾아서 30킬로를 돌아옵니다.

급히 '내 아들 예수, 내 아들 예수' 이렇게 당황해서 예루살렘으로 가 보았습니다.

보니까 아들 소년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과

수준 높은 놀랄만한 신학적 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살에 신학박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마리아는 예수가 자신의 아들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떤 해결할 수 없는, 해결 안 되는 쓴 숙제를

마음에 새기고 고민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어린 소년이 신학박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모습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마리아에게 여쭈어 볼 것입니다.

제 생각에 분명히 마리아가 고민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 본문의 상황을 보면,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예수는 아직 '자신의 아들'입니다.

2:48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토라를 논의하고 계신데,

마리아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화를 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모친이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것은 막 화가 난 말투입니다.

 

마리아는 이틀 동안 마음을 졸였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먼 길을 다시 걸어오도록 했느냐?'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전혀 엉뚱한 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9

 

기가 막힐 상황입니다.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2:50

 

이 구절을 보면 '내 아들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50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그 부모들이 '예수는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내 품의 아들 예수'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너는 내 품의 아들이야'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자녀를 보내신 것은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 가정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그 자녀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철저하게 '내 품의 자녀'라고만 주장합니다. 그래서 무리수가 자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리아는 뭔가 마음에 아픔이 있습니다.

바티칸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리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유명한 대리석 조각상

 

너무나 생생한 조각이고, 조각작품 중에 세계에서 가장 걸작으로 꼽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무릎에 품고, 그 연민에 빠진 얼굴로 쳐다보는 조각입니다.

이태리어 '피에타'가 영어로 pity(긍휼, 연민)라는 말이죠.

 

마리아는 항상 뭔가 해결안 되는 게 있어요. 그가 '내 아들'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세월이 흘러서 요2장에 보면, 이제 30세 장년이 되신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나 혼인잔치에 가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는 참 이해할 수 없는 마리아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하게 됩니다.

잘 보면 청빙을 받아간 그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그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의 아들 예수님께, 그 사건을 알립니다.

마리아가 왜 그랬을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많이 상상을 해 봤어요. 제가 틀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예수님과 같이 갔는데, 그 아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왜 얘기하셨을까요?

 

그동안 지난 30년 동안,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은 많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마리아는 보았습니다. 그 마음에 새기고 생각해오던,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쓰라림이 있었어요.

 

그것은 천사가 전해준 바, 예수가 자신의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아니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가나 혼인잔치 상황을

그녀의 마음에 새긴 쓰라린 마라의 딜레마를 푸는 그런 계기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예수가 어떻게 하나 한 번 보자'

"예수여, 포도주가 다 떨어졌데."

 

이에 예수님의 반응은 또 이상하죠.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2:4

 

'어머니' 대신에 여성에 대한 존칭인 '귀나이'(헬), 부인이여,

이런 호칭을 사용하시면서, '그 포도주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죠?

왜 포도주에 대해서 나한테 얘기하십니까? 왜 그것을 제게 물으시는 것이죠?'

 

이는 마리아의 질문의 의도를 예수님이 아신 것입니다.

'부인,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포도주가 예표하고 있는 곧 나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릴 때는, 아직 아닙니다.

수사학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 동안 마음에 새겨왔던

그 마라의 갈등을 확실하게 해결해 보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하인들을 불러다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내 아들은 특별한 아들이야, 내 아들이 너희들에게 무슨 지시를 하든간에 그대로 하라.‘

 

여러분, 마리아는

예수가 이제 더 이상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렇게 점점 변해가고, 성장해 갔습니다.

 

12살 때 행방불명 사건과, 가나 혼인잔치 사건을 비교해 보면,

마리아의 행동방식이 전혀 달라져 있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예수를, 버려야 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공관복음서를 우리가 면밀하게 총괄적으로 읽어보면,

바로 이 가나혼인잔치 이후부터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를 공식적으로 떠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게 이 가나혼인잔치 사건이 중요한 분깃점(터닝포인트)이 됩니다.

 

이후 마12장에 보니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들려옵니다. 소문에 나를 떠났지만,

그래도 내 아들인 '예수가 미쳤다'는 말이 소문으로 돌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어땠을까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대로 '마라' 마음에서 쓰라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예수가 미쳤다고?' 너무나도 그 아들이 보고 싶어서,

날을 잡아서 마리아는 예수의 동생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가 봅니다.

아마 아침에, 아들 예수에게 줄 점심도시락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일년에 한 번씩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해서 저를 보러 오시는데,

87세 되신 어머니께서 큰 이민가방을 이번에도 4개나 가져오셨어요.

그 안에 여러 가지 먹거리를 잔뜩 가져오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항상 하시는 요리가 있습니다. 만두, 녹두전, 브라질 요리 뽀시니아.

그 요리 재료를 또 가져오셨어요. 지금 우리 집에 쌓여 있습니다.

 

아마 이 마리아도 음식을 잔뜩 싸가지고, 동생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가보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운집해 있는지

마리아의 마음이 좀 안심도 되고, 위로도 되고,

'아 그래도 뭐 내 아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구나'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가까이 와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뛰어가서

47절에 '예수여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지금 집 밖에 서 있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모친'이라는 단어를 눈여겨 보십시오. 그 말을 들은 모친 마리아는,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인간적으로 섭섭했을까요.

 

예수님은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그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이니라'

 

그렇게 가슴을 조이고, 자기를 찾은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죠.

마리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내 살덩어리, 내 아들 예수를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의 뜻 그대로 '마라'의 쓰라린 고통이었습니다.

 

끝내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서 온 몸이 찢기고, 피로 범벅이 된 처참히 죽어가는

'내 아들 예수'를 목격하게 됩니다.

 

내 아들 예수가 지금 십자가에서 죽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손과 발이 못 박혀 갈려지고 있습니다.

 

저도 우리 애가 어릴 적에 한 번 다쳐서 피가 나오니까

저는 의사였으니까 피가 피로 안 보이는 사람인데,

내 자녀이 피를 흘리니까 정말 제가 대신 흘리고 싶더라고요.

 

가시관에 찔려서 그 얼굴은 피범벅으로 알아볼 수 없고요

옆구리는 창 구명에서 피도 모자라 진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로 그 '내 아들 예수'를 온전히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

*오늘날 부모들도 자녀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시간에, 십자가 아래에 와 있는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26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그동안 예수님은 일관되게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셔서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그때부터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효도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효도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효도 이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마리아를 모시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에게는 다른 자녀들도 있었어요.

히브리 전통에서 다른 아들들도 있는데, 마리아를 요한에게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에 까지 와 있는, 그 유일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는, 누구인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아들 예수를 내려놓은 그 마리아에게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그 분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네 어머니다

 

'마리아가 나 예수를 내려놓은 것,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진정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여자여 아들이니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요한에게도 그의 어머니라고 소개합니다. 신앙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내 아들 예수를 버리는 신앙!

 

그 긴 고통의 과정을 인내하는 고난의 신앙, 그것이 곧 마리아의 신앙이요,

참된 어머니의 신앙이요, 그러한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는,

그녀의 '신앙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행적을 기록한 행1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약 120명의 무리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불같은 성령이 임하고,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바로 그 역사적인 자리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1:14

마리아의 신앙과 헌신이 완성된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갖고 있나요? 혹시 '내 아들 예수' 아닙니까?

내 아들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면 '나의 아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습니까?

 

어떤 교수님이 한 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신대 ACTS는 외국인 학생들이 와서 공부합니다.

교회론 시간에, 교수님은 '교회가 무엇입니까?' 라고 종이에 써 보라고 합니다.

 

그때 한국 학생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교제가 있는 곳,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곳, 성도가 성화되는 곳'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다수의 외국인 학생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교회는 고난이 있는 곳' 이렇게 종이에 쓴답니다.

 

    파키스탄에서 온 여학생이 한 번은 그렇게 울어요.

    왜 우느냐고 물어보니 '제가 서울에 와서 보니까,

    십자가가 자유롭게 여기 저기에 있어서 너무 눈물이 나요'

 

   파키스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예배보는 시간에 무슬림이 폭탄을 던져서 교회가 폭발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성도들은 교회에 가는 것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마리아 같이

'내 아들 예수''하나님의 아들 예수'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내가 좋아하는 내 아들 예수를

철저히 버리지 않는 이상, 내려놓지 않는 이상

내 아들 예수 외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가까이 잘 아는 집의 이야기입니다.

그 집에 자녀가 한 명 있는데, 무남독녀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주 사랑으로 키웠어요.

너무 예뻐서 잘 때도 가서 보고, 너무 사랑스러운 겁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을 때, 엄마는 의과대학을 다니고, 아빠는 신대원을 다녔어요.

너무 바쁘니까 애를 할머니께 맡겼어요.

90넘으신 할머니가 집에서 하루종일 사극 연속극을 보면서 딸을 키웠어요.

 

주말에 아빠가 집에 돌아오니까

딸이 '아빠,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래요.

그리고 뭐 놀이라는 것 보면, 보는 대로 따라합니다.

그래서 아빠가 설교하는 것을 따라서 곧잘 흉내 내곤 했습니다.

 

그 집 딸이 좀 커서 유치원에 보냈는데, 집에서 한국말만 하고 자라서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영어를 못했습니다.

거기에 백인아이들만 있으니까, 처음에 쉽게 친구들과 사귀지 못했습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려고 하니

선생님이 '애가 영어를 잘 못하고, 친구도 잘 못 사귄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유치원에 한 해 더 다니게 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초등학교에 가서 보니까, 수학을 잘 못합니다.

아빠 엄마는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딸도 잘 하려니 생각하고 아무 걱정을 안 했는데

아이가 이상하게 수학을 잘 못합니다. 공부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부모는 걱정이 되었어요. 그렇지만 신앙 안에서, 자녀에게 자유함을 주고

스트레스나 부담을 주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서 하루는 자녀을 불러놓고

'학교에서 네가 A B C D 무슨 점수를 받아와도 괜찮다.

우리는 그것을 A B C D 비타민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점수에 기죽지 말고, 비타민 골고루 먹는 것으로 생각해라

 

덧붙여서 '너는 너무 A만 먹으려 하지 마라. 비타민 A만 먹으면 병 생기니까, 골고루 먹어!'

아이는 너무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과제물 점수를 보여주는데, '대디, 바이타민 C!' 하며

과제물을 여유 있게 보여주며 흔들어댔습니다. *C학점 받았다는 뜻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모는 속상하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어요. 수학을 F를 받았어요.

제가 너무 속상해서 '이거 야단을 쳐야하나?

아니 아빠 엄마가 다 수학을 잘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녀가 수학을 F받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다가, 아빠가 어디에 홀렸는지

'나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딸아, 너는 두 가지만 열심히 하면 돼!

첫째, 하나님이 네게 건강 주셨고, 좋은 가정도 주셨어.

좋은 환경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공부해!

둘째, 절대 cheating(컨닝) 하지 말고, 정직해야 돼.

네가 이 두 가지만 잘 지키면, A B C D는 다 비타민이야, 골고루 먹어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자녀가 낮은 점수, 그것도 수학에 F를 받아오니까, 부모는 속이 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뭐에 홀렸는지 '딸아, I'm so proud of you. 너 정말 컨닝 안 했구나!'

컨닝을 안 했으니 F를 받은 것이지요.

친구들은 F를 받은 학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부는 컨닝을 했다는 뜻도 됩니다.)

 

아빠는 자녀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거나, 상장을 타 오면

마냥 마음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컨닝하는 것은 아니겠지?'


딸은 아주 솔직하고 밝고 뭐든지 엄마 아빠에게 숨기지 않고 얘기하는 그런 자녀로 잘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기가 어느 명문대학에 지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입학하려면 수학을 잘 해야 됩니다.

 

그러니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시간에 우열반을 나누어 공부하는데,

우수반으로 들어가서 공부 했습니다.

 

그런데 성적표에 자녀의 수학 점수가 나왔는데, F였습니다.

이제 곧 대학에 진학해야 되는데, 내신 성적 때문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정말 부모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주일날 교회가서 예배를 드리는데도, 부모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습니다.

엄마는 흑흑 거리며 울기도 했습니다.

1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아내에게 물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왜 그렇게 울었어?"

아내는 "우리가 딸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아빠 "우리가 무슨 거짓말을?"

아내 "우리가 항상 딸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우리는 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너는 우리 딸이야. 너는 공부를 잘 해야 돼.

너는 우리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야 해!' 하고 있었거든요!"

 

겉으로는 "너는 A B C D 비타민을 골고루 먹어라" 하고도

속으로는 "너는 A 받아야 돼" 한 것입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집착이 없을 수 없었던 거죠.

 

예배를 마치고, 부부는 그날 많이 회개했습니다.

집으로 갔더니 자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낙심해 있었습니다.

낮은 내신 점수로 인하여, 명문대에 진학할 가능성이 거의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온 가족이 외식을 갔습니다.

거기서 아빠는 이렇게 말했지요.

"OO, 우리가 네게 부담을 주었구나. 말로는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해 놓고는

속으로는 '그래도 너는 우리 자녀야' 하고 살았어.

네가 이번에 수학 F를 안 받았으면, 나는 이런 내 본 모습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야.

 

이제 앞으로는 아빠도 고칠 게.

정말 너를 '하나님의 자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줄 게

 

그런데 아이의 사연을 자세히 들어보니

그 수학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학생들이 정답을 컨닝해서

그 정답 답안지를 서로 서로 돌렸답니다.

 

그 자녀에게도 그 컨닝 정답지가 왔지만, 그 자녀는 평소 부모의 가르침대로

시험에서 F를 받을지언정, 대다수의 다른 학생처럼 컨닝cheating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 후에 대학 진학 시즌이 되었는데,

그 자녀는, 명문대학에 자기 에세이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자기가 학교에서 수학시간에 F를 받게 된 사연을 다 쓰고,

부모가 자기를 그래도 격려해 준 내용을 상세히 썼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 때는 Fail (F)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 정직하게 살지만 Fail 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수학 내신 점수는 좀 모자랐지만,

에세이를 잘 써서, 그 명문대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학을 졸업할 때 그는, 10명 정도만 뽑히는 '명예의 학생'으로 졸업했습니다.

 

마치는 말

정말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물질, 여러분의 재능과 여러분의 생명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나의 고난을 좀 어떻게 해결해 주십시오'

이런 것도 중요하겠지만, 기도해야 하지만,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내 아들 예수'를 내려놓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진정 만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여러분들께서 내 아들 예수, 내 자식,

내 것을 과감히 십자가에 못 박고, 내려 놓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만나는,

그런 복된 고난주간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 / 하나님, 내 안에 '내 아들 예수'가 있습니다.

주여, 이것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는

하늘의 축복을 저희들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갈등하는 우리 마음에 새긴 이 쓴뿌리들을 주님께서 뽑아주시고

정말 저희들이 고난을 아파하며, 정답을 찾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고난에 공감으로 성화시키고, 그 고난 속에서 또한 내려놓음의 고난을 경험하는

그러한 저희들의 삶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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