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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portance of Perseverance by Zac Poonen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요한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모든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환란과 참음”에도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 환란과 참음 or 견딤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편안하게 살 동안에는,
이런 측면의 진리에 대해, 활짝 열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밧모 섬에 유배되는 큰 환란을 당하면서,
이 환란의 신비에 대해, 열린 것입니다.
◑큰 환란을 주시는 목적
▲1. 환란은 성도에게 명백한 현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 섬에 유배되는 환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세대 또는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로 인해 큰 환란을 겪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자기가 밧모 섬에서 겪는 큰 환란의 경험을 통해서, 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환란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당하는 그 환란의 경험을 통해,
장차 환란을 당하게 될 여러 신자들을 도우라고,
우리를 먼저, 미리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1:4
‘환란 전 재림설’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유행되었는데,
대환란이 이르기 전에, 교회가 휴거한다는 신학인데,
이 이론은 당시 영국이 아주 태평하고 평화로울 때 생겨났습니다. 소위 대영제국 시절이었죠.
오늘날에도 이 ‘환란 전 재림설’을 따르는 신자들을 보면,
대체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핍박을 받지 않는 나라들에서 지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기도는, 그 근본바탕에
‘주여, 제 인생을 이 세상에서 더 평안하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대환란 전에, 공중으로 휴거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탄은, 수많은 크리스천 군중들을,
‘그릇된 평안감’으로 조용히 잠 재우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 환란’에 대해,
전혀 준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환란’은 성도에게 명백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예수님은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하면서,
환란을 당하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피하리라” 고 하지 않으셨죠.
우리 각자는 살 동안에, 크고 작은 환란을 반드시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현실 가운데 예수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듯이, 너희도 이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죠.
물론 십자가 방식의 승리입니다. 정복자 방식의 승리가 아니라요.
죽임당하는 어린양 방식의 부활 승리입니다. 사자와 같은 용맹한 승리가 아니라요.
예수님은 우리를, 환란에서 피하고 면하게 해 주시는 방식보다는,
우리를, 환란 가운데 뚫고 들어가서 승리하게 하는 방식으로
더 인도하기 원하신다고, 저 잭 푸닌은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뭘 피하고 도망가서 얻는 승리가 아니라,
환란을 맞부딪히고, 뚫고 들어가서.. 결국에 얻는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평안 comfort’보다는,
우리 각자의 ‘성품 character’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환란을 허락하시고,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품이 단련되고, 성숙되고, 온전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환란을 통해서요!
이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과 전토를 버린 자들은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30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과 전토를 버린 자들’.. 얼마나 신실한 신자들입니까.
그들에게 ‘너희 신실함에 대한 보상으로, 환란을 면케 해 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백 배의 보상을 받더라도,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예수님은 ‘신자가 박해를 받는 현실’을 정직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도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즉, 환란을 면하게 하려 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5
▲2. 성도의 환란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2~3세기에, 크리스천들이 극심한 핍박을 당할 당시에,
그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원형극장에서 굶주린 사자들 앞에 던져졌습니다.
또는 로마제국의 여러 곳에서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한 환란으로부터, 그들을 건져주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은, 가끔
다니엘을 사자의 입에서부터 건져주기도 하셨고,
그 세 친구들을 불붙는 용광로 속에서 보호해주시기도 하셨지만
신약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베드로나 바울을, 감옥에서 건져내 주신 적은 있습니다만..
이렇게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자기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중국에서, 북한에서,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자신도 영광을 받으셨듯이,
신약시대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환란을 통과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 그 성도 자신도 영광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열 두 영의 천사 군대를 보내셔서, 그 환란 당하는 신자들을 구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의 신부인 신실한 성도들이
사자들에 물려서 몸이 찢어지고
불에 타서 그 몸이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마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지켜보셨듯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셨듯이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성도가 환란을 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2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 세대에서 그대로 재현해서 보여주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14:4
그 신실한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3. 내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환란을 허락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 곳곳에서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에서 옮겨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하늘로 휴거시켜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대신에 주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큰 환란 가운데서
1) ‘세상을 이기는 자, 환란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내 성품이 주님의 성품을 본받게 하십니다. 그 환란의 참고 견딤을 통해서요.
3) 예수님이 우리를, 환란에서 구해 주시는 것보다 더 관심 가지시는 것은,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Jesus is far more interested in saving us from evil than in saving us from tribulation.
즉, 내 죄를 이기고 성화되는 것이,
큰 환란을 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 죄를 이기는데 있어서, 필요하다면,
나를 극심한 환란 가운데로 인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지고, 믿음의 성숙하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면,
하나님은 환란 가운데로 통과하는 길에, 우리를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환란으로 당하는 괴롬 보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성품의 연단이, 더 값지고 고귀하다는 뜻이지요.
이런 설교는,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게 최고 인줄로 여기는 나라의 신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매 주일 날 설교자가
그저 젖이나 이유식으로, 신자들의 귀를 간질러 주는데 그치니까요.
그러나 지금까지 제 푸닌이 전한 이런 메시지는,
사도들이 초대교회에 전한 메시지입니다.
일례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14:22
▲4. 미래의 큰 환란을 대비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날 작은 환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겪는 작은 환란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건 앞으로 닥칠 큰 환란에 대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렘12:5
앞으로 말과 경주할 일을 대비해서,
하나님은 오늘 내게, 달리기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요단 강물이 넘칠 때를 대비해서,
하나님은 오늘 내게, 작은 환란을 통해서 준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환란을 당할 때,
위 렘12:5절을 암송하면서,
‘앞으로 닥칠 큰 환란에 대한 대비’로, 우리 각자 자신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이 닥칠 큰 환란’ 또는 ‘타인들이 닥칠 큰 환란’에 대비해서
하나님은 미리 나에게, 훈련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서두에 사도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계1:9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이 나오는데요,
‘예수님의 나라’(천국)에 안전히 들어가려면,
오늘날 이 세상에서 환란과 참음을 견뎌야 한다는 뜻입니다.
환란과 참음을 못 이겨내면, 그 나라에도 못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딤 Perseverance’은,
신약성경 내내 계속적으로 강조되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이 너희를 환란에 내어주겠으나..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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