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P3 롬10:9~10 출처 P1 P2
아래 동영상의 50분~ 끝까지 정리, 편집.
먼저 동영상을 들으시고 나서, 녹취록을 읽으시면 좋습니다.
◑계속해서 그것을 확인해 주는 구절이 로마서 10:9~10절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위 구절에서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2가지인데요.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믿는 것
(P2에서)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선언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 3, 4, 5장에 계속 나타나고, 물론 그 뒤로도 나오지만
그 베드로의 설교의 일관된 주제가 뭐냐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입니다.
그게 부활의 증언의 내용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부활을 증언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 복음이 바로 바울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머리 아프신 분들은 이 결론만 암기하십시오.
복음에는 3가지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의 주되심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세 가지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강의 서두에, 우리가 믿는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일부분이거나 혹시 불완전한 것이 아니냐.. 라는
화두를 던졌는데,
우리가 믿는 복음에 십자가는 들어 있지만,
부활과 특히 예수의 주되심(=우리의 순종)이 빠져있어서, 불완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성경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물론 아니고,
우리의 ‘이해가 부분적이었거나, 불완전했다’는 뜻이죠.
▲그런데 바울의 복음은,
종종 위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십자가와 부활만을 언급하거나
아니면 아예 십자가만 언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일일이 언급 안 해도, 거기에 다 따라오는 것으로 본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종종 복음을 ‘십자가’ 하나로 요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대속적 죽음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는 것,
그 케리그마(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가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은 십자가와 부활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 믿음의 결과인 것처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15:1~4절에 나오는 복음도, 십자가와 부활 위주로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되심 Lordship은 거기에 자동 뒤따라온다고 보는 거죠.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는 것이고
이걸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강의 서두에 두 복음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의 중간에 두 복음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하나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두 복음을 연관 짓는 설명을 할 때,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우위에 두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기에 연결하는 방식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우위에 두고,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거기에 연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다시 말하면 ‘주되심 Lordship에 순종하기’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은,
십자가 복음을 우위에 두고, 거기에 Lordship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런데 P2에서 살펴보았지만, 바울은 롬1:1~5절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우위에 두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이 혹시 ‘주되심, Lordship’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만 주로 설명하는 구절이, 바울서신에 있다 하더라도,
바울이 묘사하는 복음의 전체 그림은, 십자가+부활+주되심 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한다’.. 뭘 시인하는 겁니까?
우리는 종종 ‘십자가 대속적 죽음’을 입으로 시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되심 Lordship’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9절에 나와 있습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이 강의의 전체 결론은,
즉, 예수님의 복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바울의 복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 내용은, 십자가+부활+주되심 입니다.
혹시 어느 한 구절에서 십자가만 강조되거나, 부활만 강조되거나,
아니면 주되심만 강조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그 근본 바탕에는, 항상 위 3가지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과거에 한국교회의 복음이
‘십자가’만 강조하고, ‘부활’은 무시되기 일쑤이고 *삶의 부활, 현재부활
‘주되심’은 아예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 한 때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 이런 오해들이 점점 교정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왜 한국교회 신자의 믿음들은, 삶을 낳지 못했던 것일까요?
한국교회가 믿음에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내놓을만큼 정말 뜨겁게 믿는데
왜 거기에 삶이 따라오지 못했을까요?
제가 보기에, ‘복음’에 대한 오해, ‘믿음’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포함하는 것인데, 즉 로드십을 포함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십자가 대속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와 바울서신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이고, 복음도 하나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고,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것까지가,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믿음’과 ‘주되심’을 둘 다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믿음은 마음과 입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이 마음과, 입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럼, 마음과 입으로만 믿고 시인하면, 그게 끝입니까?
복음에서,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만약 전부라면,
어쩌면 그것은 ‘마음의 믿음, 지적 동의’로 끝날 수 있습니다.
마음과 입으로 믿고 고백하는 거지, 우리가 더 이상 뭘 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주되심, 로드십’을 고백하는 것은,
절대 마음이나, 입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것은,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상대방을 ‘나는 당신을 나의 신부/신랑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고백과 같은 고백입니다.
그 고백의 결과,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책임져야 되는 거죠.
법정에서 당신 사람 죽였지? 네 제가 죽였습니다.
그렇게 ‘시인’한다면, 거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고백은 마음과 입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지금 드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 시인과 고백은, 결코 입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평생에 ‘주님의 로드십에 복종해서 살겠다’는 고백이 들어있는 거죠.
◑복음을, ‘십자가 속죄의 복음’으로만 정의할 때의 딜레마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12년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5:34
이 말씀을 ‘십자가 속죄의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여기서 여인의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건데,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도 않은 시점인데,
여인이 그런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믿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이란,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인데, 여인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일부 주석가들은
믿음이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같은 것이고
구원이란 ‘치유를 가리키는 뜻이다’ ..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십자가 대속의 복음’으로만 정의할 경우,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의 주되심’으로 정의할 경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에서
그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녀를
질병의 지배로부터, 귀신의 지배로부터 해방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바울의 이신칭의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이
같은 내용이 됩니다.
신약성경의 복음과 구약성경의 복음까지
다 같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아주 단순해집니다.
◑적용
이렇게 우리가 복음과 믿음을 정의하고 나면,
믿음과 삶은, 더 이상 단절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니까요.
믿음 자체가 삶이니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주되신 삶을 산다.. 이런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삶 이상의 차원입니다.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나타나겠습니까요?
그전까지는 죄와 그 욕망이 자기를 지배했다면,
즉, 자기가 그 욕망과 죄를 따르며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그 이후부터는 주님과 그 말씀(계명)을 따르는 삶으로 점점 성화됩니다.
그 길에,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억지로가 아니라, 차츰 자원해서 그 거룩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공부를 해도, 그 목적이 달라집니다.
직장을 다녀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는 태도로 달라집니다.
즉, 믿음은 곧 삶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믿음은 곧 순종이다 라고 말씀드렸죠?
믿음은, 공허한 지적 동의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의 영역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가 주되심의 영역입니다.
교회만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의 Lordship의 영역입니다.
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Lordship의 통치영역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의 분리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죠.
▲또 하나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이해할 때 “믿음은 과정이 됩니다.”
믿음은, 믿는 한 번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영리>로 전도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넓은 간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간격을 연결하는데, 윤리도, 도덕도 안 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다’
믿었으므로 구원받고..끝나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접하는 순간은, 믿음의 출발입니다.
물론 뒤에 의자 그림이 나오면서, 로드십을 인정하지만요..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면, 주님이 완전히 되시나요?
그 날은 주님인 것 같았는데, 그 다음날 일어나면 주님이 아니십니다.
뜨겁게 찬양할 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 같은데,
마치고 집에 가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평생 반복되어 가면서,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주되심의 비중이 커진다..
현실적으로 ‘주되심’이 점점 성숙하고, 내 삶속에 차지하는 영역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과정이라는 것이죠.
사영리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다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요.
믿음은, 구원에 이르러 가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자 분명한 것은, 구원은 미래적인 사실입니다. not yet이죠.
우리는 전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 말은, ‘우리가 종말 심판에서 결정되는데, 아직 결정 안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무죄 선고 받을 것이 이미 결정되어서, 앞으로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구원의 확신’의 의미입니다.
아니, 진짜로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으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초라하고, 힘겹게 살고 있겠습니까?
구원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현재적이지만, 미래적인 사실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시작되어서
확장되어 가고 있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되어서
‘이미 와 아직 아니 already, not yet’ 사이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즉 우리 구원도 ‘이미 와 아직 아니 already, not yet’ 사이에 있다고 생각해야지,
‘구원의 확신’은 ‘이미 끝났다 done’라고 하며
신자들에게 그릇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한 번 믿고 영접하고, 오늘날은 신앙생활 거의 안 하면서도
자기는 ‘이미 구원 받았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천국에 가서 개털모자는 쓸지언정, 적어도 지옥에는 안 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릇된 ‘구원의 확신’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주되심을 통해, 내가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not yet입니다.
구원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빌2:12
이미 끝나고 완성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이지요.
복음을 ‘십자가 속죄의 복음’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오류가 섞인 복음을, 복음으로 제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복음에는, 십자가+부활+주되심 이 다함께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 가는가요?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인데, 한 마리로 말하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의 주님이 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믿어가는 과정이고, 그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란, 내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기 이전에, 나를 변화시켜가는 것입니다.
내 속에 주님이 주되심 Lordship을 이루어가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기도의 목적입니다. 뭘 구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요.
이것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평생의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받고서, 끝내지 마시고요.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복음..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나요?
먼저 결론은, 하나님 나라 복음은, 언약의 틀 속에 있습니다.
둘은 하나 라는 것이죠.
구약의 복음(가장 핵심)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시내산에서 확정되죠.
그 내용을 비유하면, 결혼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에 성실하면.. 보호와 구원이 따르고
그 언약을 어기면.. 보호와 구원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충실하십니다.
문제는 인간 편이죠.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언약을 불충실하고, 또는 파기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깨져서, 결국은 보호가 걷히면서, 바벨론 포로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선포하시고, 좋은 소식(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제시’하십니다.
말하자면 이혼했던 부부가, 다시 재혼하는 식이지요.
그것이 바로 신약의 복음인 것입니다.
신약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다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다시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다시 언약적 관계로 들어가게 해 주십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즉 신약의 십자가란,
구약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하나님이 다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파혼에서, 재혼/재결합을 다시 시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구원 받아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다시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 의도는, 이렇게 볼 때,
‘십자가 속죄의 복음’도 성경 전체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틀 속에 들어가는 것이요,
구약의 ‘언약 관계’의 회복이자, 연장선상에 있고,
성경은 전부 하나의 맥락이라는 것이지요.
이상, 보통 ‘십자가’를 신약에서 따로 떼서 생각하는데,
구약의 흐름인 ‘언약’과 연결지어 해석해 보았습니다.
구약의 ‘언약’의 연장선상에,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 십자가는 모든 구원 사역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만약 거기에 ‘주되심 Lordship’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일부입니다.
구약의 ‘언약’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언약 백성은, 그 언약의 내용(대표로 십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는 믿음이었죠.
만약 주되심을 자기 마음으로만 믿고, 그걸 안 지키면.. 언약이 파기 되는 거죠.
신약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한 가지 일관적인 맥락입니다.
※참고로, 복음이 율법을 파기했다.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얘기는
갈
의식법, 제사법, 할례, 절기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뜻이지,
도덕법(율법, 십계명)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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