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P1 롬1:17 16.03.23.장신대 사경회, 출처 P2 P3
◑도입
이 시간 기독교의 복음을 재정의하는 상당히 조심스런 주제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제 나름대로 지금까지 연구하고 고민해 오던 것들을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주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더 자세히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 강의의 목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복음의 정의를
성서학적으로 좀 더 심화시켜 보려고 합니다.
오늘 강의의 초점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 또는 ‘이신칭의의 복음’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강의할 내용은, 아마 여러분들이 동의하기 힘들 내용도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과 또한 내 나름대로 고민하던 내용들을
솔직하게 꺼내놓고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십자가 속죄의 복음’
그래서 오늘 다루려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십자가 속죄의 복음’ 또는 ‘이신칭의의 복음’과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음, 하면 어떻게 이해합니까?
‘십자가 속죄의 복음’ 또는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이해합니다. *둘은 같은 것
그런데 이번 장신대 사경회의 주제를 비롯해서
요즘 많은 분들이 설교 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상당히 표면적으로는 다릅니다.
1)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다.. 하는 복음인데,
2)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다스리신다..는 내용입니다.
둘은 상당히 다르죠.
그럼 성경 안에, 이런 두 개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까?
혹은 여러 개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이 대두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복음들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요?
▲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너무 개인적이고, 내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두 복음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십자가 속죄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 즉 the gospel, the good new를 말하 때면, 위에서 1)번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이란, ‘십자가 속죄의/대속의 복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야기 할 때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이란 수식어가 ‘복음’앞에 붙습니다. *2)를 1)과 구분하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중심이고,
이것은 개신교의 처음부터 즉 5백년 동안 그래왔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십자가의 속죄 그리고 이신칭의를, 바울신학을 중심으로 이론을 세웠고
칼빈도 그것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이제 정통주의 신학으로 이어지면서
성서의 중심사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성서해석자들의 임무는,
성경의 모든 본문에서 이신칭의의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읽는 것이 성경을 잘 읽는 것이냐,
성경의 모든 본문에서, 이신칭의의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성경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경을 신학으로 재단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런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람이 불트만입니다.
불트만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더 중심을 두고, 복음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루터가 바울서신 중심이라면, 불트만은 사복음서 중심적인 복음이해 인가요?
그래서 불트만은, 바울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왜곡시킨, 또는 변질시킨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즉 예수님의 복음은 대체로 현실적인 복음인데,
바울이 그 복음을 영성화 또는 내면화 또는 신화화 시켜버렸다..
이렇게 바울을 비판/평가/해석하게 됩니다. *이신칭의 신학에 그런 특징이 있지요.
그렇지만 불트만은,
바울의 복음은 곧 ‘이신칭의의 복음’이고,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그런 어떤 기본적인 이해의 구획설정에서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불트만은,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을 왜곡시킨 것이다.
또는 그것과 다른 새로운 복음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렇게 평가했지만,
세간의 이해의 틀(구획정리)은, 그대로 인정한 셈이죠.
그런 점에서 불트만도 정통주의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불트만 자신이 신정통주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늘 새롭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로는,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곧 바울의 복음이고,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데,
‘바울의 복음이 그렇지 않다. 바울의 복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는 주제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1)번과 2)번이 하나라는 것이죠.
그럼 이 두 복음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요?
이 두 개의 복음이, 전혀 별개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두 개의 복음은,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있다..는 말씀을 지금부터 드리려고 합니다.
▲자 그럼 먼저 ‘십자가 속죄의 복음’,
전통적으로 ‘바울의 복음’으로 간주되어온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게 되겠습니다.
왜냐면 ‘십자가 속죄의 복음’으로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죠.
요즘 설교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운운하는 것은
‘십자가 속죄의 복음’만으로는, 성경에 담겨있는 모든 메시지를
다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 이외의 더 많은 내용들이 복음에 담겨있는데
‘이신칭의의 복음’만으로는 그걸 다 설명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다른 복음(‘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문제점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것들입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기본적으로 법정적인 관점에 서 있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맥락은, 종말 심판의 법정입니다. *law, court,
우리 모두는, 죽은 후에,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종말 심판의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모든 사람들은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사형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종말 심판의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속죄의 복음’ 또는 ‘이신칭의의 복음’은
간단히 말하면 ‘천국 가는 목적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구원이란, 곧 칭의와 같은 말이기도 한데,
이것은 곧 죄사함이란 뜻이 되고, 죽은 후에 천국에 가게 된다는 식의 이해인 거죠.
▲그런데 이 복음에 어떤 한계가 있지 않느냐?
결국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믿음과 삶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맥락이 종말심판의 법정입니다. 그 종말심판의 법정에서
천국갈 것인가, 지옥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이 복음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기 전에,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또는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 땅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이신칭의 복음의 관심사가 아니니까요.
예를 들면, 인간의 삶의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어요.
-죽느냐/사느냐의 문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
이신칭의 복음은, ‘죽느냐/사느냐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이지 *영생 or 지옥
‘어떻게 사느냐’는, 이신칭의 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윤리적, 계명적
그러므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질문을
‘이신칭의 복음’에 던지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냐?
성경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가요?
천만에요. 성경에 있는 내용 가운데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문제,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에 대한 내용은 많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에 대한 내용이 더 많습니까?
후자가 더 많지요. 현세에 대한 이슈가 압도적으로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현세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게 이신칭의 복음의 관심사가 만약 아니라면,
그러면 이신칭의 복음(=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성경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심하게 말하면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신칭의 복음)’에 의하면,
삶은 선택과목이란 말이 됩니다.
구원과 관련해서만 복음이 되는 거죠.
구원에 관련되는 것, 즉 믿음이나 회개만 필수과목이고,
‘삶’은.. 이신칭의가 별로 관계가 없으니, 선택과목인 셈이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선택과목’이라면,
보통 쉽게 느껴지는데,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의 삶’으로서의 선택과목은 아주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학교로 치면 학점이 아주 안 나옵니다. *우리가 못 살아낸다는 뜻
신학교에서는 그런 ‘학점이 짠 선택과목’은 학생들이 안 듣습니다.
왜냐면 그거 안 들어도, 졸업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이, 그런 선택과목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거 마음대로 살아도, 그거 학점 안 나와도,
천국 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또한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관계 없어!’ 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잘 살든 못 살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이신칭의 복음’이, 그 문제에 대해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까?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여기 이 지점에서 “성령의 인도”가 주장됩니다.
이신칭의로 구원 받은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게 되시면서,
성령의 인도로, 율법(계명)을 지킬 내적인/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숙하고 장성하고 온전한 단계로 성화되어 갑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도 결국은 계명(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가게 되는 거네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해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 한다 말입니다.
전통적인 복음의 문제, ‘구원이 믿음과 삶이 분리된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삶을 강조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상당히 율법주의적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이신칭의 복음 자체의 한계가 아니냐?’ 하는 거죠.
이 이신칭의 복음 자체가
우리를 율법으로 회귀 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이 복음에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이냐면
십자가 대속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이는 것,
십자가 대속의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개인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관심과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 죽은 다음에 천국가는 문제니까
기독교 신앙이 내세적/영성화/내면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태생적으로 교회와 세상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적 이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게 됩니다.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이슈이니까요.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모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그 위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살펴볼 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교인 수의 감소
-교회 수가 감소하고 있다.. 등등으로 말합니다.
이건 표면적인 것이고, 그 안에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인데, 세상에 나가면 그리스도인이 아니게 산다.
신앙 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그 사람의 사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냥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계의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모든 위기가 사실은, 근본적으로 이 이신칭의 복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신칭의 복음이, 그 근본 성격상, 개인적/내세적/지적 동의 요소를 갖고 있으니까,
거기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출발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질문입니다.
※위 동영상의 처음부터~20분까지 정리했습니다.
(이어질 내용)
그리고 또 이 이신칭의 복음은, 십자가 중심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부활이 우리의 신앙의 왜 중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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