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자유 고전16:12, 요6:60~68 출처, 대강번역
Being a Lover of the Truth by Zac Poonen *관련글 응답과 결단의 힘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어떤 집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서
자신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계속 웃고 또 웃었다’고 했습니다.
제 푸닌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그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마귀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또한 절제하게 하거든요.’
또한 성령의 열매 중에 한 가지가 ‘절제 self-control’입니다. 갈5:23절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어떤 일을 절제할 수 없다면,
그건 성령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이 손을 대면,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는데요.
저 푸닌은, 그런 현상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면 인도에는, 힌두교 사제들이, 그런 일을 많이 행하거든요.
저는, 그게 초자연적인 힘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supernatural power
그러나 모든 초자연적인 힘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서 사람을 쓰러뜨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 푸닌은, 예수님이 행하지 않으신 일을,
오늘날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조심하고, 경계합니다.
*조심한다는 뜻은, 99%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러므로 저 푸닌은, 제 나름대로 어떤 분별 기준을 정해 보았습니다.
1. 예수님이 결코 행하지 않으신 일을 행하는 것
2. 예수님이 결코 가르치지 않으신 내용을 가르치는 것
3. 사도들이 결코 행하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
4. 사도들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일을 가르치는 것.
여러분도, 어떤 성령의 외적 현상이 나타날 때,
그걸 무조건 다 받아들이지는 마시고, 한 번 이런 기준으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과거 수 년 동안, 위의 기준으로 분별해 오고 있는데,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은 일이라면,
여러분도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경을 보니까, 사도들이 자기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더라고요.
즉 성도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를 한 구절 들겠습니다.
저는 우리 부교역자들에게, 이 구절을 가르치고 적용합니다.
고전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나,
(아볼로가)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아볼로는 바울보다 많이 어린,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사도요, 선지자요, 인정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은, 젊은 아볼로에게 ‘고린도에 가서, 말씀을 전해라’고 권했습니다.
그때 아볼로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바울 형제님, 그런데 저는 지금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안 가겠다는 뜻은 아니고, 지금 당장은 가지 않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아볼로가)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자기가 편한 시간에 가리라.’
지금 아볼로의 자세를 논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아볼로도, 당장은 못 떠나는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지금 우리가 살피는 것은, 바울의 자세입니다.
위대하고 존경받는 하나님의 종이요, 리더 중의 리더이지만,
바울은, 젊은 아볼로에게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자기 뜻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왜 그랬을까요?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지극히 높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강요가 아니라요)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 푸닌이 위 구절을 읽을 때, 주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푸닌아, 너도 젊은 사역자들을 대할 때, 그들을 어리다고 억압하지 말고,
사도바울처럼,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방식으로 대하거라’
▲그래서 저는 지난 40년간 사역해 오면서, 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억압하고 통제 하지만, 성령은 언제나 자유를 주신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심지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옥에 가는 자유도 주셨다’는 사실을요!
하루에도 매일 30~50만 명이 죽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 대다수가 지옥에 갈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강제로 지옥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지옥을 선택하는 것을 막지도 않으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 인격을 존중하시고,
우리의 선택을 귀하게 여기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 자유로운 선택으로,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섬기라.
나는 너희 자원하는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세대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고 경배하길 원하셨습니다.
그거 하라고, 그 위험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 위험하지만 소중한 자유를 오용, 남용해서,
종종 불순종하며, 곁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모가지를 비틀어서, 그들이 가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솔로몬이 700명의 여인과 결혼할 때, 플러스 300명의 첩을 둘 때도
하나님이 중간에 좀 막으시고, 제어하셨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그 죄의 결과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받고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은 솔로몬의 자유와 그 선택을 .. 그대로 놔 두신 것입니다.
지금 아담 때부터, 역사 내내
하나님이 행하시는 패턴을 설명 드리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내 자유, 내 선택’의
막중한 무거움과 그 책임감을 통감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나서는 ‘모든 게 주님의 뜻이었다’라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오늘날 내게도, 하나님은
-죄를 지을 자유와
-거룩한 삶을 사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만약에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이 세상에 ‘거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거룩은..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로봇처럼 모든 게 결정된 상황에서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똑같이 피도 있고, 심장도 있고, 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양심’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개 같은 동물을 보면, 사람과 정말 비슷하게 정이 있습니다.
충성심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에게도, 자기가 하고/안 하고를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는, 죄를 짓지는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면, 사람들은 개를 훈련시킵니다.
그래서 주인의 말을 잘 듣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호랑이나 사자도 길들이고,
심지어 고래도 길들이기도 합니다.
이들 짐승들을 길들이는 원리는, 어떤 보상을 적절히 줌을 통해서
사실은 그 짐승을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도, 사람을 컨트롤 합니다.
그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면서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사람을 컨트롤 할 수도 있는데요.
어떤 교회는, 사람들에게 직분을 제시합니다.
직분이란 보상을 주어서 사람을 컨트롤하려 합니다.
먹을 것을 주어서, 호랑이를 컨트롤하듯이
어떤 다른 보상을 제시해서, 만약 교회에서 사람들을 컨트롤하려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도바울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컨트롤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되,
자기 “양심”을 따르는 방식으로, 그들이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지도자들도,
자기 회중이, 자기 양심을 따르는 방식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독재국가의 독재자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재자처럼, 자신만을 따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각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도록 가이드 해야 합니다.
바울이 아볼로에게, 자기 양심을 따를 자유를 주었듯이,
우리도 그 누구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주신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를 분명히 사랑하셨습니다.
그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으셔서, 그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도록 방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지만,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주제에서 약간 벗어난 얘기지만,
오늘날 만약 이런 젊은 부자 관원이, 교회에 나왔다면, 크게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부자인데다가, 관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정직하게 성경 그대로 말해 줄 것입니다.
저는 수년간, 부자들에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의 재산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우리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세요.’
꼭 우리교회에다 헌금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지요.
본문에 예수님이 부자에게, 예수님 단체에 헌금하라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 자녀들의 재물에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부자의 재물보다는, 그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재물은 외부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당신은 주님을 따르십시오!’
교회에 헌금이 얼마 들어오느냐에 관심을 가지는 목회자는.. 이해는 되지만, 정상은 아닙니다.
목회자가 관심을 가질 분야는, 이번 주일 헌금 총액이 아니라,
양떼들의 영적 건강이요, 그들의 회심과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젊은 관원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네 재물은 외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
영어로 “Come without your money.”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건 정말 자유였습니다. ‘돈 내고 따르라’고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그 관원은, 다른 쪽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선택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만약 나의 제자가 되기를 기꺼이 원치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자유롭게 놓아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를 붙잡기 위해, 어떤 제자의 기준을 낮추지도 않으셨습니다.
진리의 기준을, 타협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절대 사람들을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단의 특징이지요. 참된 기독교는 "자유"를 줍니다.
▲2. 또 다른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눅14:25
만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예외도 있지만) 보통은 이렇게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지 않고, 잘 붙잡기 위해서
사람들 듣기에 나이스한 설교만 주로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25절 이후의 구절을 읽어보면,
그 많은 무리들을 다 내쫓는 방식으로 설교하셨습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마치 많은 무리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 귀찮기라도 하는 듯이 (물론 귀찮은 게 아니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주 높은 수준의 ‘제자의 대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신 게 아니라,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는 실상이 이러하다. 대가가 이러하다. 그래도 너희는 나를 따르겠니?’
예수님은, 교인들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관계 없이 설교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가라지와 쭉정이는 다 자기 갈 길로, 넓은 길로 갔습니다.
▶3, 세 번째 예입니다.
여기서도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는데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어쩌면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그렇게 많이 모인 무리들을, 나이스한 말씀으로 달래지 않으셨습니다.
‘내 말에 실족해서 떠날 사람은 떠나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실제로 군중들 대부분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교회가 쪼그라드는 것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여기서 ‘제자’는 12사도가 아니라,
군중 속에 섞여있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말씀도 가감 없이 전하셨습니다.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이런 어려운 말씀가운데서, ‘진리를 선택’하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 어려운 선택을 하고, 제자의 길을 따를 때.. 그건 정말 가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날 설교자로부터,
얼마나 ‘어려운 선택’의 말씀을 많이 들어보셨나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 너무나 쉬운 선택이었기 때문에,
혹시 그 선택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데 정말 낭패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6:66
군중이 아니라, 제자 중에서도 많이, 예수님을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저 푸닌은,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지만, 설교자의 설교에 실족해서, 즉 거부감을 느껴서
그만 교회를 떠나가 버리는 사람, 교회 나오기를 중단하는 사람.. 말입니다.
▲마치는 말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놀라운 특권이자, 무거운 책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가 가진 ‘선택의 힘, 결단의 능력’을 무겁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결국 나는, 내 모든 선택과 결단에 대한 상/벌의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예정론’에 극단적으로 치우쳐서,
자신의 잘못된 선택까지, 다 주님의 뜻으로 변명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택의 자유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섬기는데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진리를 올바로, 액면 그대로 제시하고,
그들의 신앙의 선택, 양심의 선택, 자유로운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데,
아예 아무런 선택을 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말씀에 물을 타서, 진리를 희석시켜서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를 개척하고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귀에 솔깃할만한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 푸닌이 지교회를 만약 개척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내쫓기를 원하는 마음이 일면 있습니다.
‘진리를 액면 그대로 전하고, 사람들이 와서 들어보고,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가를 치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위에서 살펴 본 세 번의 예처럼, 예수님을 떠나든지.. 말입니다.
누가 이런 식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설교하면,
처음에 모여든 신자들이, 얼마 후에 많이 떠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떠나지 않고, 그럴수록 계속 모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67절에, 5천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님께 열 두 제자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그들에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너희도 떠나려느냐?’ :67
떠나려면 떠나도 좋다는 식이지요.
다행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시몬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은 선택하고, 결단한 것입니다.
저 잭 푸닌도, 복음을 액면가 그대로 전달하고 설교하기 때문에
좀 극단적이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입니다. 그런 세간의 평가는 어떻든지
저는 계속 복음을 액면가 그대로 설교하기 원합니다.
그때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나왔다가, 떠나간 사람들도 참 많았습니다.
저 푸닌은, 그것이 우리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려 하셨던 참된 교회의 한 표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를 개척한 후에도,
신자들이 아무도 떠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남아 있다면,
그게 그들이 다 제자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또한 당신이 타협하는 설교를 계속 전하기에,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희 교회는 ‘복장 예절’도 있습니다.
저희는 교회에, 옷을 자기가 입고 싶은 방식대로 입고 오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다닐 수 있는 교회가 시내에 많이 있으니, 거기로 가세요’하고 친절히 권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교회를 무조건 많이 세워라. 사람을 많이 모으라’고 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24:37
그 말씀에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노아 당시에, 노아의 가족 말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 제자로 살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을, 예수님이 미리 내다보신 것은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이, 이 마지막 시기에 ‘노아의 가족’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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