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명의 사도 공동체 행1:15-26 16.06.19.스크랩, 출처
◑왜 꼭 12명 이어야 했나요?
오늘 말씀은 유다가 버린 사도직을 대신 할 한 사람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이라는 수자를 채우는데
이 말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굳이 12라는 수자를 맞춰야 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냥 11명이면 안 됩니까? 실상 12명을 선택했지만
성경에서 그들 모두가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마태나 도마 정도만 언급될 뿐입니다.
나머지 사도들의 활동은 교회사의 전설로만 알려질 뿐입니다.
예컨대 유다를 대신하여 어렵게 그 자리를 채운 맛디아의 활동에 대해서
성경에는 전혀 보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사의 전설로는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선교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
그의 유골은 후에 발견되어 독일의 트리어란 곳에 무덤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지만 모든 사도들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활동만 두드러집니다.
13장 이후 마지막 28장까지는 열두 명에 들지 않았던 바울의 행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은 베드로 이후 주의 형제 야고보가 맡았고
야고보의 활동은 사도행전 15장부터 두드러집니다.
그 또한 열두 사도 중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장에서는 열두 사도의 수를 맞추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구약의 계승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과 구약을 포함한 66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율법의 길을 폐기하고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주류가 넘어갔습니다.
충분히 구약을 버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구약은 유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율법이라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 로마 사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예수 그리스도 신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족적인 종교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2세기 중반에는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이 등장했습니다.
구약의 신은 저열하고 폭력적이라며 배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고 하면서 유대주의적 색채를 뺀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일부만이 진짜 성경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신구약을 포함한 66권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교회의 정경화 작업은
이 이단의 도전 때문에 촉발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구약은 유태인 종교의 경전이라는 식으로 격하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 선봉에 누가가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는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교임을 분명히 합니다.
누가는 기독교의 뿌리가 구약 유대교에 근거해 있음을 역설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나 바울의 설교는 항상 구약 말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매우 긴 설교는
대부분을 구약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과 언약을 계승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 열둘이라는 사도의 수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열두 사도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체하는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된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유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세계 인류 중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9)
열둘이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을 잇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실패한 그 자리를 누군가 채워야 했습니다.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혼 위에 몸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구약은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 분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매우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은 계승과 재해석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계승은 구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계승이라는 측면입니다.
재해석이라는 것은 구약 말씀은 그리스도를 계시한 책으로 목적이 맞추어져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 곧 신약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걸러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읽고 해석할 때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교회의 질서입니다.
열두 명은 교회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들 열두 명을 공식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열두 명의 증언이 참되고, 모든 권위와 질서는 이들로부터 비롯됩니다.
부활의 증인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21절과 22절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부터
승천하신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둘에 해당하는 후보로 요셉과 맛디아가 추천되었고 그 중 맛디아가 임명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사도는 이 열두 명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사도입니까? 아닙니까?
물론 그는 사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을 사도라 부르는 것에 매우 인색합니다.
일단 바울은 사도의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행전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을 사도라고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함께 섞어 ‘두 사도’(14:4, 14)라고 단 두 번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글 성경은 단순히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도’로 바꾸어 번역했기 때문에
여러 번 나오는 것 같은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사도라 언급하는 것은 여기 두 곳뿐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과 동행했던 의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로 넘어가는 2차선교 여행부터 ‘우리’ 문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때 누가가 동행했다면, 누가는 바울의 선교 현장에 직접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바울이 사도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고린도후서의 대부분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과의 싸움임을 몰랐겠습니까?
바울은 이방인 교회를 세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는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누가의 증언에 의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누가는 바울을 사도로 추켜세워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의 질서 때문입니다.
누가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세우시고 교회가 인정한 권위는 열두 명의 사도들뿐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로부터 바나바와 바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열두 사도의 권위에 의해서 움직이거나 파송되거나 임명된 선교자들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울은 싸움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회심부터 1차에서 3차에 이르는 선교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선교보고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정식으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권위와 질서라는 것입니다. 전통의 계승입니다.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열두 사도가 나왔고,
이들로부터 나온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초대교회는 중세교회로, 개혁교회로, 장로교로, 기장 교단으로 이어져
우리가 속한 빛과생명교회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또한 당회나 목회자에서 성도에 이르는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서와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이 질서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종교개혁 하면서 만인사제론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개하던 사제의 특권을 폐하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길은 옳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교회의 전통과 질서마저 다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무분별하게 자격도 없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양산하고,
목회자의 도덕성이나 지성이나 신앙이 땅에 떨어진 현실에서
여전히 질서를 강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아무나 은혜 받으면 목회를 하려하고,
정식 교단이 아니라 군소 신학교에서 목사 과정이나 안수를 받는 것을 좋지 않게 봅니다.
목회자와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교회 질서를 문란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든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막중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질서한 곳에서는 우리 영혼도 무질서하게 됩니다.
개신교에 이단이 많이 생기는 이유도 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질서는 대사도 바울일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가는 열두 명의 사도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낱낱이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이 열두 명이라는 숫자를 채우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권위는 이들로부터 나옵니다.
◑셋째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맡기신 직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 직무를 버렸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17)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20)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25)
▶유다는 열두 사도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직무를 버리고 갔습니다.
직무를 버리고 떠난 자의 결말은 좋지 않습니다. 그 결말은 매우 끔찍합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18)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목을 매어 자살하려다 줄이 끊어져 이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사고로 지붕이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매우 비참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외에도 자기 소유물을 판 일부를 감추었다고 하여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비참한 결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자신이 취한 헤롯은 충, 곧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전합니다.
이런 비극적 결말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자기 직무에 충실하지 않거나, 교만하거나, 하나님을 속인 대가에 대한 엄중함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보기처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이것이 특수한 한 사례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이를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경고로 악용합니다.
또는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사고에 이를 적용하려다 무리를 빗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직접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목회자의 욕심이나 어리석은 판단이 작용할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는 심판의 메시지보다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훨씬 더 많고 중하다는 것입니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무나 직분에 대한 소중함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도의 직무 앞에 봉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사도직은 특권이 아니라 봉사입니다.
우리의 직무도 자기 유익을 위해서 쓰면 안 됩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25)고 말씀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욕심이 강했습니다.
“불의의 삯”이라고 하였는데 금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저버렸다고 평가합니다.
봉사의 직무가 자신의 이익과 탐욕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직무, 집사로서의 직무,
부모로서의 직무, 직업과 사업으로서의 직무, 나라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직무.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이 부르심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신이 감당치 않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고 맙니다.
영광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마십시오.
유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던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했던 말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4:14)
내가 해야 할 직무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할 것입니다.
◑제비뽑기
초대교회 공동체는 요셉과 맛디아 중 맛디아를 선택했습니다.
맛디아를 선택한 방법은 그들의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였습니다.
투표는 각자가 선호하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행위이지만
제비뽑기는 주사위를 던지듯 하늘의 뜻에 맡기는 방법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우림과 둠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이야 이것을 마치 운빨처럼 취급하지만, 고대 사회나 성경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비뽑기가 인간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이라 믿었습니다.
권위는 인간적인 결정에서보다는 제비뽑기에서 더 주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적인 탐욕들과 술수들이 난무하는 총회장 자리나
어떤 특권의 자리는 제비뽑기 방법을 사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시대에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의해서 합리적인 이성과 민주주의라는 방식이 주어졌습니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운에 맡기는 것 같은 그 방식이 아닙니다.
리더를 선택하는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출된 리더는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시 그 자리가 채워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생 또한 제비뽑기처럼 주어졌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화 『곡성』의 포스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미끼를 물었다.” 이 영화에 나온 대사입니다.
“낚시꾼은 그냥 미끼를 던졌을 뿐이고, 고기는 우연히 그 미끼를 문 것뿐이다.”
모든 것이 우연히 결정된 일입니까?
우연이라는 형식을 가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제비뽑기라는 우연 속에 하나님의 결정이 담겨 있듯이 말입니다.
신앙은 우연과 무의미 속에서 의미와 필연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때는 모릅니다.
쌓이고 좀 거리가 두어진 후에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달려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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