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하신 성령 행1:1-5 16.05.22.설교스크랩, 출처
◑역사가 누가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초대교회가 어떻게 활동했고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외에도 누가복음을 썼습니다.
1절의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합하면 신약성경의 4분의 1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 다음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누가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쓴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무려 80여 명에 이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뚜렷이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다만 바울의 2차선교 여행 때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는데
거기에 ‘우리’라는 1인칭 복수 화법이 등장할 뿐입니다.
그때에 누가가 바울과 동행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역사를 담담히 드러낼 뿐입니다.
교회사에서는 바울의 동역자이며(몬1:24)
바울의 사랑을 받았던 의사 누가(골4:14)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그가 의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라기보다는 탁월한 역사가 같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누가복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나이가 30세쯤 되었다는 사실도(눅3:23),
예수님이 아우구스투스 황제 제위 시에 태어나셨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서신들을 썼지만 실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나 초대교회의 선교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의 줄기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에는 수많은 총독과 관원들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 역사와 교회사가 이어집니다.
또 당시 지중해 세계 곳곳의 지명이 언급됨으로써 선교 역사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누가가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의 자세는 누가복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행1: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 차례대로 써 보낸다.’
이것이 역사가 아니고 또 무엇입니까? 말보다는 펜이 강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흐린 잉크보다 못합니다.
바울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감옥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서 또는 여러 사정으로 묶여 있을 때
그는 부득이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가장 큰 일이었고, 그 편지가 이후 2천년의 세상의 바꾸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단순하게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가 이방인의 심장부 로마까지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그 정당성을 찾아갑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입니다.
유대인들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기독교는, 바울의 사역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바울이 처음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였을 때 그는 소수였고 변경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류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행적을 찾아가며 잊혀져가는 바울을 살리고
그를 역사의 중심에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힘입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역사를 정의하기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는 현재에게 말을 겁니다.
과거는 현재의 눈으로 재조명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재해석 된 것이 역사입니다.
History는 His story입니다.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역사 실제 현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의 의미는 좀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그 의미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역사책을 쓰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 역사서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하고는 우리가 왜 망했는지 반성하며 쓴 책이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에 이르는 소위 신명기 계열 역사서입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와서는 성전을 재건하고 말씀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다시 역사를 뒤돌아보며 쓴 책이 역대기 상하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다른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과거는 점점 더 필연처럼 보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마땅히 그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는 그때는 내 생각에 취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보지 못했다고 반성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더 확실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과 우주와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음을 압니다.
◑문필가 누가
누가는 또한 대단한 문필가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때의 마리아나 사가랴의 찬양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목자들과 천사들의 경배와 찬양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성탄절은 매우 삭막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등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수많은 아름다운 비유들을 누가는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수많은 설교와 연설들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설교, 특히 아레오바고 설교는 설득력 있고 아름답습니다.
수많은 기적들과 환상이 등장하고 투옥과 재판과 석방으로 흥미진지하게 이어집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로 이송되는 장면은
엿듣기와 매복과 한밤중의 대대적인 호송 등으로 이어지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항해와 난파 장면들은 당시 고대 문학을 방불케 합니다.
그래서 요즘 학자들 중에는 사도행전을 서사시나 고대 소설 장르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다른 성경들엔 없고 누가의 글에만 나오는 것이 바로 서문입니다.
앞에서 읽어드린 누가복음의 서문이 그렇고
오늘 읽은 행1장 1-2절도 서문에 해당합니다.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이라는 두 번째 책을 쓰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당시 역사가나 문필가들이 바로 이런 관습을 보여줬습니다.
마태는 세리였다지만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은 오히려 율법학자나 랍비를 뺨칠 정도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배움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을 보아도 그들이 당시 정세를 바라보는 눈이나
문필의 재능이 대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나이브하지 않습니다. 탁월한 문장력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후진 것은 아닙니다. 후지면 영원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의 수신인도 독특합니다. 사도행전은 데오빌로에게 쓰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부릅니다. 각하는 어떤 공직 명칭이 아닙니다.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데오빌로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쓴 것이 누가복음이요 사도행전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책을 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을 쓰면서 이 책 22부를 필사에서 보급해주기로 약속한 사제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데오빌로는 그런 후원자일 수도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아마 이방인 귀족으로서 최근에 신앙을 갖게 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는 그 한 사람을 향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누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가 이 글을 읽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바로 우리들을 향한 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록 목적은 이미 누가복음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눅1:4)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확실히 다지려는 목적에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육신적인 고난도 있었습니다.
사상적인 혼란도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불투명했습니다.
이를 더 확실히 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현대 사회에서도 복음은 다양한 도전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신앙의 뿌리와 근거를,
그 능력과 섭리를, 사명과 비전을 확실히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약속하신 성령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부탁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은 성령 행전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선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사도행전의 본격적인 시작은 2장의 성령강림 사건에서부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교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중요하기에 성부 하나님은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눅24:49)
예수님은 그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지난주가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인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 계시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유명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15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위대한 성상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작품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극진한 환대를 했습니다.
작품에서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형상을 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분이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식탁의 가운데에는 떡 그릇이 놓여 있고, 세 분의 하나님은 살짝 몸을 기울인 체
서로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매우 친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핵심적인 교리 중 하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입니다.
‘상호내주’라는 뜻인데 어원 그대로 ‘페리’ 곧 ‘원을 그린다’, ‘코레시스’,
곧 ‘조화롭게 노래하며 춤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합창의 코러스가 같은 어원입니다. 상호 내주하면서 친밀하고 조화로운 일치된 모습입니다.
이 작품에서 친밀함과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데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란 책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도 세 거룩한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그리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자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여지고 든든해진다.”
인간의 생각과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매우 인상적인 것은 성령 하나님이 사람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성령은 비둘기나 불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성령의 인격성을 볼 수 있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렇지만 성령 하나님은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불이나 기운이나 비둘기처럼 자기 형상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려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철저히 성자 예수님께 제한된 영입니다.
교회사적으로 필리오케 논쟁이 있습니다. 성령의 근원에 관한 논쟁입니다.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왔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로부터
(필리오케, 라틴어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 나왔는가의 논쟁입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부와 성자로부터’라 고백하며,
동방 정교회는 ‘성부로부터’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 서방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성자로부터’라는 부분을 이탤릭체로 써서 논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근원에 대한 논쟁은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기원에 ‘성자로부터’가 들어감으로써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논쟁이야 어떻든 사도행전에서 전하고 있는 성령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성령이 임할 때 능력이 생깁니다.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3년 동안 모든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목격했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한데 주님은 만류하십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불입니다.
장작만 쌓아둔다고 해서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불이 붙어야 활활 탑니다.
그렇지만 장작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쌓아놓은 장작이 없으면 그 불은 쉬 사그라지고 맙니다.
누가가 성령만 받아서 위대한 두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가 부지런히 역사 훈련과 문필 공부를 하였고
여기에 성령이 임했기에 이런 위대한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성령 세례는 요한의 물 세례와 비유됩니다.
세례라는 것은 물속에 푹 잠겼다 꺼내는 행위입니다. 물 대신 이제는 성령입니다.
물에 빠지듯 성령에 푹 잠기라는 말씀입니다.
물로 거듭나듯 이제는 옛 과거는 버리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령 충만함이, 성령 세례가 필요합니다.
이는 구원이 확신에 이르는 체험입니다.
이는 거듭남이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옛 과거가 죽은 자가 얼마나 능력 있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제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아직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 약속이 철회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이전의 사도들처럼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 성령이 임해야 내 삶이 변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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