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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6

666 짐승의 표 P1

LNCK 2016. 7. 5. 07:25

666 짐승의 표 P1                   13:11-18          스크랩, 출처

 



 

666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실제다!

아니다, 상징이다!

 

666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가지고 서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지혜는 부분적인 것이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이야기는 항상 현재성을 띠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신약의 2천년 전 시대에, 모든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 짐승표 이야기도 어느 한 시대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이고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지금도 영적으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시고

홍해바다를 건너 출애굽 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출애굽 사건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잇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종말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으로서

실제적인 출애굽의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이, 구약에서는 성도의 구원이야기가 예표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예수님의 초림 때에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영적인 것으로 나타났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출애굽이 담고 있는 구원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예표적 사건이 초림에는 영적으로 나타나고

종말에는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과 실제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이러한 의미로 접근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어느 시대이고, 우리의 신앙에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구약 시대처럼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홍해를 건너서 나오는

그런 출애굽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식으로

출애굽 하는 사건은 계속하여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666표도 출애굽 사건과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구약에서는 실제였고,

신약에서는 영적으로 나타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실제 사건화 되어서 완성된 것으로 나타나게 되듯이

666표도 동일한 해석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 666이 실제냐? 상징이냐? 라는 것으로 싸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둘 다 맞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느 때 이야기 이냐 입니다.

 

초림 때로.. 해석을 할 때는 실제 이야기이고,

교회사 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영적인 것이고,

종말 때에.. 해석 할 때는 상징이면서도 실제적인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666은 실제일 때가 있고 영적일 때가 있고

상징이면서 실제일 때가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처럼, 실제일 때는 실제로 해석하여야 하고,

영적일 때는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나타난 시대에, 영적인 것으로 말하면 안 되고,

반대로 영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에, 실제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를 터이니 말씀을 잘 이해하시고

666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시고 정리하셔서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증거하는 말씀은 어디까지나 제 견해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 견해와 달리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제 견해가 틀리고 성경적으로 보다 더 맞는 해석이 있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제 주장을 수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장차 될 일에 관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모든 세대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실제 이야기이지만

초대교회 때에는.. 사실을 상징으로 이야기 하였고,

교회사 시절에는.. 상징을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하고,

종말에는.. 실제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장차 될 일이라고 하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될 일이란.. 실제로 사건화 되어서 일어날 일이란 뜻입니다.

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요한계시록에 담겨져 있는 666 이야기도

예수님이 재림하는 종말에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종말의 해석종말론적 해석은 다릅니다.

종말의 해석은 실제적이지만, 종말론적 해석은 영적인 것입니다.

 

종말이란.. 글자 그대로 끝에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은.. 예수님의 승천부터 재림까지 신약의 전 기간을 말합니다.

신약의 교회사 전체가 종말론 적에 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을 하시면서, 내가 다시 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은 끝장이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몇 년도 몇 월 몇 일에 오신다고 알려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루 하루를 종말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재림의 날짜를 밝히지 않은 것은 성도는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종말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가야할 천국을 오늘날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항상 주님 앞에 서는 자세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말론적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예수님이 오실지는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종말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666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끝 종말에 일어나는 일과, 교회사 속에서 종말론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다릅니다.

이 부분이 올바르게 정리 되지 않으니까 666을 실제다, 아니다 상징이다,

라는 것으로 서로 정죄하고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666은 요한계시록이 써질 당시에는 실제였습니다.

요한은 그 당시 상황을 다만 상징화 하여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들을 핍박한 로마 황제를 짐승으로 말하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여서

마음대로 매매하지 못하고 굶주림 당한 것을

666 표를 받지 않아서 매매하지 못한 것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 시대에는 길드라는 상인 조합이 있었습니다.

길드에서 모든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이들에게 상권을 독점적으로 주는 대신 많은 리베이트를 받았습니다.

 

이 때 길드에는 아무나 가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심사하여서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는 우리의 주이십니라라는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만 가입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자들에게만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또한 일반인들에게도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매매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건 온 나라를 황제 숭배 사상으로 하나로 묶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황제 숭배사상이 판을 칠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가이사는 주이십니다라는 인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거래가 형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 당시 사회 분위기가 황제 숭배 사상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주로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가이사를 주라고 시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매매하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협 할 수가 없는 신앙과 결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이사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하게 매매를 할 수가 없어서, 극심한 궁핍과 환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용하여서 자기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대 상인들이었습니다.

 

유대 상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접근을 하여서 밀거래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상인들과는 정상적인 거래를 할 수가 없으니까

자연히 유대 상인들과 밀거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 상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가격보다 수십 배를 많이 받고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가장 악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자들이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는 예수쟁이들은 눈에 가시와 같았어요.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예수님은 유대교를 허무는 원수였으니까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미워하고 핍박을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 할 때 빌라도가 예수님을 일컬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이외는 왕이 없다고 하였듯이

그들은 가이사를 임금으로 섬겼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탄핵 할 때 이 사람은 가이사 말고

예수를 임금이라고 한다는 죄목으로 고소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7:7

 

초대교회 성도들이 왜? 핍박을 받았는가 하면

예수님만이 주님이시고 가이사는 주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자신들의 황제 숭배 사상 정책을 따르지 않는 예수쟁이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거나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만 매매를 허락하게 한 것입니다.

 

유대 상인들은 가이사는 주라고 고백을 하였으니까

자연히 길드 회원이 되어서 각 지역마다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놈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밀거래를 하면서 강탈하디시피

수십 배의 폭리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악랄한가 하면 모든 은금 패물들을 다 취하고 나면

그때 예수쟁이들을 로마 정부에 밀고를 해서 포상금까지 챙겨 먹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교회사 적으로 순교 시대를 상징하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유대인들을 일컬어 사단의 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이사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아서

실제로 매매를 하지 못하여 엄청난 궁핍과 배고픔을 당하고 극심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인 요한계시록을 회람하면서

666 짐승 표를 읽을 때는 상징으로 보지 않고 실제적 사건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당시 로마 황제와 그 세력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건으로 다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이 배경을 가지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666 이야기를

사도 요한이 로마 황제 숭배사상과 길드를

실제 사건을 상징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편지 속에 비록 로마 황제라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짐승이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초대 교회 당시 666실제적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로마가 망하고 황제 숭배 시대가 끝이 나고 난 후

교회 시대에 돌입하고서는 요한계시록은 영적인 것으로 감추어져 버린 것입니다.

 

실제가 영적 의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예수님 시대에는 영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과 같아요.

 

교회 시대에는 짐승을 예표하고 666을 예표하는 일들이

영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이단의 교주들이 로마 황제처럼 적그리스도 노릇을 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땅에서 올라온 짐승 노릇을 하였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났어요.

하나님도 많이 나타났고 재림 예수도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재림 예수가 판을 치고 있어요.

이들은 자기를 추종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응징했어요.

 

적그리스도 세력들은 항상 교회를 어지럽혀 왔어요.

성도들을 핍박했어요.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신앙의 싸움들로 점철 되어 온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믿음에 사람들이

거짓 그리스도의 세력들과 싸우면서 죽임 당했어요.

 

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단수적인 의미로는 적그리스도를 말하고,

복수적인 의미로는 적그리스도 세력을 말합니다.

 

교회사 속에서 단수적인 의미로는

이단의 교주들이 짐승인 적그리스도 행세를 하였고,

복수적인 의미에서 적그리스도 세력들은 공산주의처럼 국가의 형태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히틀러의 나치 집단처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도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끝에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통합하여

단일된 것으로 거대한 조직이 되어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처럼

사람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참람된 말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세상의 환경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가 반목과 갈등으로 전쟁을 하고 있어요.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어가고 있어요.

그 전쟁의 바탕에는 종교가 깔려 있습니다.

종교 전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에요.

 

또한 지구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화가 되면서 지구가 각종 공해로 몸살을 앓고 있어요.

지구 온난화로 엘리뇨 현상이 일어나서 곳곳에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지구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어요.

 

이제는 어느 한 나라에서만 환경을 보존한다고 해서 지구 환경을 지켜낼 수가 없어요.

전 세계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어요.

 

그래서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서 환경 포럼을 하고

국가마다 지구 환경을 위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공해 배출을 억제하는 정책들을 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이 지구에서 함께 살자면 단일 국가 형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종교가 달라요.

종교가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국가로 이루고 살자면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정책이 펴져야 하고

이를 조율하는 지도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지도자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으로서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 초림 때

로마라는 국가와 황제 숭배 사상으로 보여주었어요.

 

로마가 온 세상을 지배했고 로마 황제는 온 세상 나라를 통치했어요.

종말에도 이러한 모습으로 국제 정세가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 황제가

온 세상 나라 종교를 통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가톨릭이에요.

 

흔히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 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로마는 국가를 통치하는데 종교를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였어요.

여기에 기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게 로마 가톨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는, 진실로 주님을 믿는 알곡 성도가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종종 형식적 교회가 당시 정권과 결합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짐승같은 역할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에서는

멸망당한 로마가 재생하여서 이 세상을 다스릴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가 되어서 나타나는데

이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시대 정치적인 환경이나 경제적인 환경이나 지구 환경적인 것이나

여러모로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종교가 필요한 시대로 접어들었어요.

 

그래서 종말을 맞이한 지금 이 시대 세상의 모습이 예수님 초림 때처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되는 시스템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바벨탑을 쌓을 때의 모습을 구음이 하나이요 라고 합니다.

 

구음이 하나란 말은 하나의 사상을 말합니다.

정치나 종교가 하나된 것을 말해요.

하나님은 바벨탑을 헐고 하나 된 구음을 흩어 버렸습니다.

 

인간들은 구음이 하나가 되니까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을 하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탑과 함께 하나 된 구음을 흩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 끝에 다시 구음이 하나 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국가에요.

땅에 평화로 온 세상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구음이 하나가 되면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 자체가 이 땅이 자기의 근거지이므로

이 땅에 천국을 만들고자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땅에 거하는 자들의 두목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를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따르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데 어찌 안 따르겠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땅에 속한 자들은 다 짐승을 경배하고 따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늘에 속한 성도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들은, 땅에 속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원수들이에요.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자칭 하나님이 되어서 참람 된 말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적그리스도는 이 땅에 인간들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때에 다니엘의 예언처럼 공중에 뜨인 돌이 나타나서

세상 나라를 박살을 내어서 먼지처럼 흩어 버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나타났고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끝장내고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시나리오에요.

 

이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666 짐승의 표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 끝 역사 속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세계를 단일화하고 종교를 통합하여서 통치하는 수단으로

어떤 제도를 666 짐승의 표처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성도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신앙과 결부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면 666이라는 상징이 실제가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666을 짐승의 이름이고 그 수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리칩은 그 예표적인 것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예표적인 것을 사실이라고 하면 그 또한 미혹이 되는 것이므로

베리칩을 666이다라고 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앞으로 지켜 볼 일이지, ‘지금 이것이다하고 속단 하면 안 되어요.

 

아직까지는 단수적인 적그리스도도 나타나지 않았고,

온 세상이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따르는 단일 국가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성경을 상고하면서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은 과거적 해석현재적 해석미래적 해석모두 하여야 합니다.

또한 육적으로도 보아야 하고 영적으로도 보아야 해요.

영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어요.

 

역사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동시에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영적인 일들을 펼쳐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시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은 육적인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대하는 자세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는 달라요.

육에 속한 자는 육적인 사건 자체만 보지만

영에 속한 자는 그 사건 속에서 영적 의미를 찾아내게 됩니다.

 

영에 속한 자들은 만물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즉 육적 사건을 통해서 영적 메시지를 읽어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천기는 분별 할 줄 알면서도

어찌하여 시대의 징조를 모르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때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를,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는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풀어가는 식으로 진행이 되어갑니다.

 

성경이 성도의 구원을, 시작과 끝이 있는 삼 시제로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을 받았고,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으며,

장차 구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 역사 속에서 시간을 두고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미완료이고, 미완성이고 온전치 못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구원은 완료이고, 완성이고,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요.

이미 끝이 났어요.

이미 구원을 받은 자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세상의 시간관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라는

삼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역사의 흐름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말하지만

이 구원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이 끝까지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완료이고, 완성이고, 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묵시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완성된 것이에요.

하지만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점진적으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끝이 난 완성된 것이지만,

상태론적으로는 이루어가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으로 이해해 보세요.

구약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출애굽은 단번에 이루어진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이건 광야에서 보면 과거에 이미 끝이 난 구원입니다.

이러힌 상태를 구원을 받았다라고 과거 시제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의 여정을 보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입니다.

출애굽을 한 것은 가나안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 속에 광야를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년 동안을 이미 얻은 출애굽의 구원을

그 목적에 맞도록 완성 된 자리로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목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 하기를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창조 하였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 고 했습니다.  사43:21

 

하나님은 출애굽 한 백성들을 광야 사십년 동안 인도하면서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상징하는 예표적인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광야로 빼내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성도를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살아갈 사람으로 양육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를 찬송하는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현재 구원을 이루어 간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던 애굽에 사람이 죽고,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 사십 년 동안 애굽에서 나온 1 세대들은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2 세대들이 자라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율법으로 양육 받은 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그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래 시제로 구원을 이룰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이

구속사적 입장에서 성도의 구원의 전 과정이 담겨져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다스려 가셨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 이스라엘의 구원이 곧 성도의 구원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통해서, 신약에 성도들의 구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은, 곧 신약의 전 교회 시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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