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해방 골3: 12~17 2015.08.16설교스크랩
어제가 8 1 5잖아요. 다들 경축 행사를 보셨는데, 8 1 5가 되면 참 기쁘죠.
해방 받은 기쁨. 자유를 느끼고 독립을 쟁취한 기쁨을 우리들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동시에 광복절 하면 또 속상한 나라가 있어요. 일본이죠.
일본만 생각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축구를 해도 일본은 꼭 이겨야 합니다.
어제도 보니까 일본하고 축구 시합을 해서, 이긴 게임만 보여주더라고요.
또 지난번 북경 올림픽 때 야구 이긴 것도 보여주더라고요.
또 마사다와 피겨스케이팅해서 김연아가 이긴 거. 그것만 딱 보여주더라고요.
우리 속에 정말 그 피해의식이 있고 속상한 마음이 있고 분노가 있고, 그래요. 일본만 생각하면...
그래서 우리가 해방을 받았는데 아직도 해방을 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설교 제목이 ‘제2의 해방’입니다. 이게 필요하다는 뜻이죠.
정치적으로는 해방을 받았는데, 감정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해방 받지 못했어요.
우리에게 너무 상처가 많죠.
저 이순신 장군 때부터 시작해서,
그때 그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쳐들어와서 한국을 초토화했잖아요.
옛날 역사를 읽다 보니까, 왜군들이 서울까지 올라왔을 때
서울 동대문에 성벽이 있었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시체가 그 벽보다도 높았다..
그런 글을 읽고서 ‘그렇게까지 많이 죽었나..’ 참 많이 속상하더라고요.
게다가 그 다음 말이, 그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서
참 어려운 시대에 가난하고 배고프고 침략 받고 약탈당하고, 서울 이야기입니다,
참 과거를 생각하면 참 속상해요. 아주 묘해요.
또 개인적으로 저는 어려서 평양에서 태어났거든요.
평양에서 태어나서, 중학생 때까지 있다가 6 2 5때 내려왔는데.
저희 담임 목사님이 순교 당하셨어요. 일본 사람들 손에 순교 당했습니다.
또 장로님들, 다른 목사님들이 감옥에 다들 같이 갔거든요.
그리고 교회가 폐쇄를 당하고.. 혹시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정현 교회는 주기철 목사님이 담임 목사였습니다.
그 분이 40살에 감옥에서 돌아가셨잖아요.
완전히 그 몸이 만신창이로 깨져서 7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감옥에 가고 그랬어요. 반계승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 분은 후에 주기철 목사님 후에 산정현 교회 목사님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설교할 때 손을 들면요, 손가락이 하나가 없어요.
왜 그렇게 됐냐..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가서,
참배 안 한다고 불려나가서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자른 거예요.
‘너 신사참배 할래 안 할래?’ 하나 잘랐어요.
다시 보내고. 신사참배를 하겠다 그러면 집에 돌려보내줄 거고.
계속 못 하겠다 그러면 또 하나 자르는 겁니다. 그래서 세 토막을 잘렸어요.
그래서 이 검지가 없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우리 머릿속에 있어서
우리 국민들에게는 참 좋지 않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있어요.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님과 장로님들 다른 목회자님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또 동시에, 공산주의가 들어온 다음에 1945년부터 50년,
또 6.25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회에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이,
또 전도사님들 사모님들 합해서 열 명이 또 순교했습니다.
한 교회에서. 어떻게 한 교회에서, 한 명의 순교자가 나기도 어려운데
일제 강점기와 공산주의 합해서 열한 명의 순교자가 나왔어요.
제가 다 아는 분들이죠. 이런 아픈 경험들이 있어요.
▲제(김상복 목사)가 어릴 때, 일본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 하라고 강요를 해서 신사참배를 학생들이 다 했는데
당연하게도 저는 안 했어요.
전부 동쪽을 향해서 운동장에서 일본을 향해서 ‘사이케레’하면
전부 이렇게 90도로 절을 했거든요.
다 구부렸을 때 저는 서 있었어요. 저쪽을 보니까 또 한 명이 있더라고요.
가만 보니까 제 누이에요. 그런데 다행히도 한 번도 안 들켰어요.
다들 구부리고 있으니까. 저를 못 본 거죠. 참 아픈 감정들이 있어요.
또 전철을 타고 평양 시내로 들어가려고 하면
시내 복판 즈음에 모란봉이 있는데, 모란봉에 신사가 있어요.
그럼 전차가 서서, 타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신사를 향해 절을 해야 합니다.
다 절을 하고 나면 전차가 시내로 들어갔어요.
그때도 우리가 학생들이지만 안 했어요.
왜요? 우리 목사님이 감옥에 가 있잖아요. 우리 목사님이 순교하셨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신사참배를 안 했다고요. 마음 속에 아픔이 있었어요.
지금도 일본 생각하면 속상해요. 분노가 있고 증오가 있어요.
공산주의 그러면 거의 분노했어요. 속상해요.
우리 교회, 우리 리더들이 그렇게 많이 순교 당했거든요.
▲광복절을 맞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 거예요.
우리가 정치적으로는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산업이 발달한 국가가 되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거, 정말 멋있어요.
아주 멋진 나라가 되어가고 있어요. 좀 속상한 구석도 있지만, 얼마나 좋아요.
저 같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를 통과하고
6 2 5를 통과하고 오늘 와서 보면요, 저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거든요.
일제 강점기부터 공산주의를 거쳐서 남쪽에 와가지고
그 가난을 거쳐서 오늘의 대한민국.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사실 지금 우리는 5천년 한국 역사에서 가장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시대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해방을 경험했는데. 정서적으로는 해방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한 번 더 해방을 받았으면 좋겠다. 제 2의 해방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번의 해방은 정치적인 해방이 아니고, 분노와 증오로부터의 해방.
이런 해방을 한 번 더 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이 분노와 증오로부터 해방을 받을 필요가 있어요.
분노와 증오는 일본에게만 있는 게 아니고,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어요.
우리 집안에도 있어요. 예수님 말씀하시죠.
‘네 원수가 집 안에 있다.’ 내 남편 얘기에요. 내 아내 얘기에요.
내 형, 동생, 언니, 누나 얘기에요. 내 원수가 직장에 있어요. 진짜 보기 싫은 그 사람이 있어요.
뭐 그 뿐인가요. 우리의 원수가 우리 교회 안에도 있어요.
저도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했는데
교회에서 서로 섬기다가 상처를 주고받은 일들이 있어서
안수집사가 장로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장로가 권위를 가지고, 안수집사를..
그 안수집사가 대학교 교수거든요.
교회 장로라고, 그 교수 젊은 사람을 윽박질러서
내 앞에서 눈물 흘리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우리 속에는 세상 살면서 아픔이 있어요. 분노도 있고 증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해방을 받아야 되겠다.’
우리 속에 분노와 증오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있어요.
최근에 제가 어느 80세 넘은 할머니와 대화를 했어요.
그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나 이혼할래. 80세, 평생을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도저히 이 사람하고 하루도 더 못 살겠다.
그 동안 고생을 너무너무 시켜서..’
근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해방이 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못 살게 굴고. 도저히 못 살겠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참 우리 속에는 아픔들이 있고 분노와 증오들이 있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요.
여러분도 아마 금방 떠오르는 그 사람이 있을 거예요.
우리가 제 2의 해방이 필요해요.
이번의 해방은 독립을 선언하는 겁니다.
우리는 삼일절 때, 우리 국민이 전부 조직을 해서
일본 사람 모르게 3월 1일에 대한독립을 선언했잖아요.
일방적으로 독립 선언을 해버렸어요.
우리가 치유를 받고 자유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려면 다시금 독립 선언이 필요해요.
용서에 대한 일방적 선언이 필요합니다.
이 선언이 안 이루어지면, 계속 우리가 고통을 당하며 사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참 속상한 사람이면
속상하다고 말을 자주 하면, 회개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가족으로 살면서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렇게 상처주고 어려움을 입히고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며 살아왔다면,
지금쯤은 한 번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내가 이렇게 가족들에게 상처 주며 사는 사람이 되었는가..
한 번 생각해보시고, 또 상처 받은 사람들은 제 2의 해방을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를 용서할 수 있어요.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보면 분명히 그런 말이 있죠. 골로새서 3: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어요.
이 땅의 음식을 먹고 이 땅을 걸으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특별히 구분해서, 이 땅의 사람 중에서 하나님이 택하고 구별하고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눈을 열어서. 머리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해야 합니다.
용서를 선포해서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을 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조건적으로 이 해방은 일방적인 선언을 통해서 해방을 받아야 해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용서할 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서 그럽니다.
죄성이 있고 그 죄성 때문에 몸과 마음이 파괴되어서
사람을 괴롭히는 저들을 하나님, 용서해주옵소서. 일방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용서해달라고 구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스테반도 마찬가지죠.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이렇게 용서는 일방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선택하셨고,
특별히 구분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구별해주신 우리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하며 제 2의 해방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를 하려면 영성이 있어야 해요.
영성이 없이는 인간적으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용서되질 않아요.
어떤 영성이 있어야 하나. 여길 보면요. 골로새서 3: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용납이 있고 사랑이 있어요. 이런 퀄리티가 우리 속에 있어야만 용서가 돼요.
그런데 제가 쭉 세어보니까 위 구절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이 아홉 가지의 영적 자질 중에, 몇 개나 여러분이 갖고 있어요?
저도 검토하다 보니까 저도 몇 개 가진 게 안 되더라고요.
사람은, 일방적인 용서가 안돼요. 나한테 와서 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내가 벌을 주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용서가 되지
그냥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린 왜 용서할 수 있나?
여러분과 저는 용서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거든요.
‘너희를 주께서 용서해주신 것처럼 너희도 용서하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용서했습니다. 무조건 용서했어요.
우리가 알지 못할 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단번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자유를 가졌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용서해줘서
우리는 영원히 단번에 용서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아본 경험이 있고, 우리는 용서가 무언지 압니다.
그러나 용서하려면 영적인 자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없어요.
그래서 이와 같이 좋은 영성을 옷 입고,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한 때는 제가 낙심했던 적이 있어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성경을 모조리 다 조사해보니까
성령의 열매가 50가지가 있더라고요. 아홉 가지가 아니고.
그 쉰 가지 목록을 제가 쭉 만들어 보고나서 절망했어요.
‘내 나이가 얼만데 이 중에 몇 개나 내가 가지고 있나.. 몇 개나..?’
기가 막히더라고요.
어느 시절에 내가 이 성령의 열매를 내 삶속에 맺겠나. 절망이었어요.
‘이것 참. 이중에 몇 개도 성취 못했으니 어떡하나.’
조금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감사했어요.
왜요? 이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만들어내는 열매가 아니에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열매에요. 성령이 갖고 계신 열매에요.
내가 만약 절제가 필요하면, 내가 어떻게 명상하고 좌선하고 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 안에 내가 원하는 모든 자질이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 분이 갖고 있어요. 나에겐 없는데, 날 원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신 성령님,
그 분 안에 내가 원하는 모든 영적인 자질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구하면 돼요. 구하면!
인내가 필요할 때 정 못 참겠으면 참아야 하거든요.
정 못 참을 때 못 참으면 사고가 나는 거예요.
못 참을 때 참는 게 영성인데, 못 참겠는 때 참는 길은 다른 길이 없어요.
‘주여, 성령님이여, 나에게 인내를 주옵소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나타나십니다.
성령이 그 때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못 참을 때 참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 받는 거잖아요.
보통 사람 같으면 참을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순간을 넘기나,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 속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능력.
성령님의 열매가 내게 나타난 겁니다.
▲성령을 보고 보혜사라 그러죠,
영어 성경에 잘 번역했는데 최근에 번역한 걸 보면 The helper라고 번역했습니다.
파라크레토스 인데, 도우미, 돕는 자이십니다.
성령님. 왜 돕는 자를 나에게 보내주셨나요?
여러분에게 왜 성령님을 보내주셨나요?
왜냐면 여러분 마음속에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에, 혼자서는 도저히 인생을 감당할 수 없고
내 분노와 증오를 감당할 수 없고, 용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님을 여러분 마음속에 보내주신 겁니다.
그 분에게 기도할 때, 주여,
‘나에게 겸손을 주시고 인내를 주시고 절제력을 주십시오.’
그렇게 그 필요한 순간에 도저히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시간에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께 은혜를 주십니다.
그때 우리가 놀라는 거예요.
▲어느 목사님이 15년을 참았대요.
제직회 때마다 최 집사가 못 살게 구는 거예요. 15년을 참았어요.
근데 어느 날 15년이 된 어느 날 또 제직회 하는데
그 최 집사가 또 일어나서 속 썩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최 집사 밖으로 나와!’ 그랬어요.
이 목사님이 대학생 때 유도가 2단이었거든요.
엎어치기 하려고 딱 멱살을 쥐는데 집사님들이 달려들어서 떼었어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목회를 사임하고 택시 운전수가 되었어요.
그 때 ‘주여,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나를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기도했으면 가능했을 텐데
자기가 해보려다가 택시 운전을 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그 분을 알아요. 15년 참았는데. 한 번 못 참아서..
여러분, 여러분이 용서할 수 없을 때, 여러분 스스로 감당 안 될 때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할 수 있어요.
▲골로새서 3:장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령의 충만함, 늘 성령님을 의지하고 사는 그 삶과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이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충만하면
어떤 사건이나 어떤 경우를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탁 튀어나와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말씀으로 이기게 해주세요.
제가 전도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30대 말쯤 되는 젊은이였습니다.
이 친구가 예수 믿고 나서 제가 영적으로 키워주려고
직장에 한 시간씩 차 운전을 해서 통근하는데, 성경 구절 암송 패키지를 하나 줬어요.
‘그냥 운전만 하지 말고 이거 외우면서 왔다 갔다 해라.’
그래서 이 친구가 감사하게도 잘 암송하면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저를 찾아왔어요.
‘목사님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쁜 놈이냐?’ 그랬더니
‘제가 결혼한 지 10년 됐는데 10년 동안 아내를 때렸습니다.’
‘나쁜 놈이구나. 남자가 여자를 때리다니 너 정말 나쁜 놈이구나!’ 그랬어요.
그런데 목사님, 얼마 전에 또 때리려고 하는데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딱 그 말씀이 떠오르더래요.
그래서 손을 들었다가 ‘주여, 이 따위 여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대요.
정말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 날 안 때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안 때린 것이 결국 자기를 해방시켰대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아내를 손찌검 안 하고 지금까지 잘 하고 있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이 탁 튀어나와서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으로 한 번 이기고 나니까
그 때부터 전혀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 아내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또 그 아내를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딱 만나보니까
이 친구가 정말 나쁜 놈이야.. 아내가 얼마나 곱고 차분하고 얼마나 좋은 여자인데
이렇게 좋은 여자를 십 년을 때렸다니 정말 나쁜 놈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용서할 수 없는 그 순간에도 말씀이 나타나서
‘너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너희도 서로서로 용서하라.’
용서를 해야 자유가 있습니다. 해방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용서를 받아본 여러분과
제가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의 도움으로 용서할 수 있는 그 축복!
▲이 용서는 일방적인 용서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죠. 베드로가 몇 번 용서할까요? 삼세 번이요? 일곱 번이요?
그랬더니 예수가 그러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용서는 쉽게 하라.
그냥 용서하고 그냥 잊어버리고 그냥 덮어버리고
그냥 용납하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그걸 일일이 따져서 용서하려면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용서해주려고 갔다가 또 싸우고 오잖아요.
그게 인간이에요. 안돼요. 안됩니다. 용서는 일방적으로 하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골로새서 3:장 17절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 사람은 내 말을 안 들어도 우리가 상대방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선언을 일방적으로 용서해버리는 것이에요.
저도 어떤 때는 제 자신을 용서를 못해서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어요.
제 자신이 용서가 잘 안돼서. 그래서 죄의식도 있고 괴롭고 그래서
한 번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고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그래서 해방을 받았어요. 제 2의 해방을 받았어요.
여러분, 제가 민족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직장에서도
여러분이 용서의 해방, 분노와 증오로부터 여러분이 모두가 해방을 받아서
하나님의 평화 속에 모두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스스로 용서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서로 용서하며 자유를 누리는 인생, 평화롭게 사는 인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