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행24:1~9 16.09.04설교녹취, 출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명의 암살단원들과 대제사장 무리는
로마군 진지 안에 갇혀있는 바울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에 대한 재심문을 구실삼아
바울을 다시 산헤드린 공회로 끌어내게끔 천부장의 허락을 구하면,
암살단원들이 로마군 진지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길에서 바울을 암살한다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의 사실을 전해들은 천부장은,
그날 밤에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 밤 중에, 470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로 이송하도록 했습니다.
40명의 암살단원들과 대제사장 무리는
이튿날이 밝아서야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았습니다.
허탕을 친 셈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104킬로 떨어져있습니다.
기차나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104킬로라면,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이 104킬로나 되는 먼 가이사랴로 이송되었다고 해서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 제거를 그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행24: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 된지 5일 지나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고발하기 위해서
몇몇 장로들과 함께, 104킬로나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돈을 주고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를 대동했습니다.
특히 9절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무조건 동조할 박수부대로 동원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48년부터 59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재임했던 아나니아는
탐욕스럽고 포학스러워서,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를 횡령하는가 하면,
자기 업적을 위해서는 폭력과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부도덕한 종교 장사꾼이었습니다.
그 불의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대규모의 고발단을 이끌고,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서, 총독 벨릭스의 관저 법정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대제사장 무리가 대동시켜온 더둘로를, 변호사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레오’에서 파생된 ‘레토르’는
본래 <웅변가, 연설가> 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시점은, 대략 주후 58년 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는, 별도의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돈을 받고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변론을 해 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웅변가로서, 법률적 지식까지 갖춘 사람이라면,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들과는 달리, 정통으로 법률지식을 전공한 법률가 계층도 있었는데,
그들은 법정 변론에는 나서지 않고, 법률자문과 법 정책에만 관여하는 상류층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웅변가들이 법정에서 직업적으로 변론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더둘로는, 웅변가이면서도, 돈을 받고 법정 변론도 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둘로가 돈을 받고서,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법정에서 변호한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변호사와 동일하지만,
국가가 부여하는 공적 법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웅변가 였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변호사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이 총독 벨릭스에게 이송된 한, 대제사장 무리는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에 대한 사형 선고를 받아내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을 짜야 했습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그들의 종교법만으로도 얼마든지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총독의 법정에서는, 로마제국의 실정법으로 바울을 옭아매어야만 했는데,
로마시민인 바울은, 로마제국의 실정법을 어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 무리는, 웅변가이면서 법정 변론도 겸하는 더둘로를, 돈을 주고 고용했습니다.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에 대한 사형선고를 이끌어내는데,
더둘로의 웅변술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4: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총독 벨릭스가 진지에 구금되어있던 바울을 호출하자
더둘로가 수사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그의 세 치 혀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24: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더둘로는 웅변가 답게, 총독 벨릭스에 대한 찬사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벨릭스에 대한 더둘로의 찬사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후 52년~60년까지, 유대지방의 제11대 로마총독이었던 벨릭스의 재임기간 내내
유대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소요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예출신으로 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른 벨릭스는,
매사에 뇌물을 밝혀서, 심지어는 도둑떼로부터도 뇌물을 받고
시민을 괴롭히는 도둑떼를 그냥 방치해 두기도 했습니다.
그의 역량에 의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개선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 덕분에, 백성이 태평을 누리고,
그의 선견으로 많은 것이 개선된 것을, 크게 감사한다는 것은
재판장인 벨릭스에게 아부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둘로는, 곧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행24: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의 고발내용은, 바울을 로마법으로 옭아 맬 수 있는 핵심내용은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둘로의 첫 번째 고발내용은, 바울이 마치 전염병같은 인간이어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 ‘소요’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타시스’는
반란, 폭동을 의미합니다.
2천년 전 로마제국의 의료 및 방역수준으로, 흑사병 같은
전염병을 예방하고 다스리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전염병처럼 위험한 인물이어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재임기간 내내 크고 작은 소요로 골머리를 앓던 벨릭스로서는
만약 더둘로의 이 고발내용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둘로의 두 번째 고발 내용은,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단’의 헬라이 하이데시스 는 본래 ‘당파’를 뜻합니다.
더둘로는 이 단어를, ‘불순한 무리’를 뜻하는 ‘도당’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나사렛 도당’이란, 나사렛 출신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도당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마치 전염병 같은 위험한 인물이어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로하여금 소요를 일으키게 하는 바울은
한 개인이 아니라, 불순한 무리의 집단인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이므로
바울이 하기에 따라서는
그를 추종하는 나사렛 도당의 무장봉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더둘로의 마지막 고발 내용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둘로가 자신의 웅변으로 바울을 고발한 내용가운데
실제로 바울에게 해당되는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더둘로는, 자신의 웅변술로, 그렇게 주장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고발내용은, 본문의 시점에서 약 30년 전에
유대인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고발했던 내용과 판박이입니다.
당시 유대교지도자들이, 애당초 예수님께 문제를 삼았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한다’는 신성모독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할 때는
‘스스로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한다’는 정치범으로 고발했습니다.
그래야 로마법으로, 총독의 법정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형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더둘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모함으로, 바울을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둘로는,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반란, 폭력, 심지어는 무장봉기까지 획책하는
정치범이라고 그를 고발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바울을 로마법으로 옭아매어, 사형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둘로는, 그렇게 바울을 고발하면서
자기 고발 내용에 대해서, 그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더둘로는,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다’고
자신의 말을 끝맺었습니다.
더둘로는, ‘총독 당신이 바울을 직접 심문하면,
내가 지금 고발한 이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당신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둘로는 ‘내가’가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형을 썼습니다.
자신의 고발 내용은, 자기 개인의 고발내용이 아니라
자기 의뢰인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포함한
대규모 고발단의 고발내용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시점은, 벨릭스 총독이 부임한지 6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고, 확충하기 위해서
그동안 정기적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많은 뇌물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므로 더둘로의 이 끝맺음은,
‘총독 당신은 오래 동안 당신에게 많은 뇌물을 바쳐온
대제사장 무리가 원하는 대로 판결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었습니다.
노련한 웅변가다운 마무리였습니다.
그러자 박수부대로 동원된 유대인들이
‘옳소’라고 소리치면서, 총독 벨릭스를 압박했습니다.
더둘로는, 수사학으로 무장한 레토르 즉 웅변가였습니다.
웅변가는,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도록 논리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논리적이기 위해서는, 지적이어야 합니다.
또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게끔, 품위와 예의도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더둘로는 겉으로는 분명히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웅변가답게, 본문에 나타나 있는 더둘로의 세련된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하지만 더둘로가 바울에 대해 고발한 모든 내용은
교활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그동안 연마한 웅변술로
자기 세 치 혀로 바울을 난도질 했습니다.
더둘로는, 자신이 지금 웅변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따지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돈을 준 대제사장 무리가 원하는 대로
바울을 로마법으로 얽어매어, 바울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질 수 있게끔
그동안 자신이 연마해온 웅변술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어떻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웅변하면서
의로운 사람을 죽이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더둘로에게 돈을 주고
더둘로를 고용한 불의한 대제사장 무리보다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자신의 모든 수사학을 동원해서
바울을 죽이려했던 더둘로가 더 사악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악한 더둘로가
2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적용 /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현대의 더둘로들이 있습니다.
더둘로에게 돈을 주고, 더둘로를 고용한 대제사장들이나,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자신의 모든 수단과 재능을 동원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드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우리는 흉기를 들고, 단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더둘로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좀 더 확장해서 보면, 오늘날에도 돈 때문에,
사람들이 생명을 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대로된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식당
-불량식품 제조업
-건설업자가 부실공사를 해서, 보다 많은 이득을 챙기는 것
-제조업자가 공해물질을 많이 배출해서 공기와 강물을 오염시키는 것
그건 그 공기와 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살인행위입니다.
자기는 재처리 비용을 절감할지 모르지만요.
-유해물질로 어린이 용품을 만들어 파는 것
-게임업체가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를 파괴하는 게임을 만들어 파는 것
-운수업자가 경비절감을 내세워서 운송수단에 대한 관리를 부실하고, 과적하는 것
-의사가 돈 때문에 환자를 과잉진료하는 것.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될 환자를 수술하는 것
-공무원이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관이나 시설점검에 소홀하거나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방산비리를 저지르는 것.
이것은 국민에 대한 살인행위와 같습니다.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업자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모독하거나 해치는 더둘로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번 돈으로, 사람들 앞에서는 더 세련되고
더 품위있게 살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돈 때문에 의로운 바울을 죽이기 위해
자기 혀로 바울을 난도질했던, 본문의 사악한 더둘로와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번 28일부터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될 예정입니다.
2011년 6월에 이 법안을 제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의 이름을 따서
일명 ‘김영란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이 시행되면,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 거품을 제거할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2016년 8월 29일에 확정된 김영란 법 시행령에는
이 법의 적용 대상자에 대한 금품수수와 관련된 조항만 아니라
식사비, 선물비, 경조사비의 상한금액까지 규정되어 있습니다.
식사, 다과, 주류, 음료 등 음식물은 3만원
금전 및 음식물을 제외한 선물은 5만원
축의금, 조의금 등 부조금과 화환 및 경조사비는 10만원이 상한 금액입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경기가 위축될 것이라고 여러 기관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그 동안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인 거품 속에 있었음을 스스로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턱없이 비싼 주거비와 물가,
분수에 넘치는 허례허식, 국제적으로 수치스러운 부패지수 등은
모두 이 비정상적인 거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처음 이 법을 시행하게 되는 만큼,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세우려는 이 법의 취지와 정신은
이 법의 적용 대상자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 국민 모두가 특별히 크리스천인 우리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2014년 3월 20일, 양화진 목요강좌에 출연해서
<공정한 한국사회를 위한 제안> 이라는 제목으로
‘김영란 법’ 제안 취지에 대해서 강연했습니다.
양화진 홈페이지에서 해당 동영상을 누구든지 시청할 수 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스위스에서 살았고, 일본과 독일에서도 몇 달씩 지냈고
지난 40여년 동안 전 세계 수십 개국을 여행했습니다.
일본에서 감사의 선물은, 조그만 과자상자입니다.
서북 유럽에서 감사의 표시는, 카드 한 장입니다.
그래도 굳이 뭔가 선물 해야할 경우에는, 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일상사속에서 거창한 선물을 주고 받는 예를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사회를 그렇게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일구어 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된 이래에,
특정인에게 선물을 보낸 대상은, 우리 교회를 창립한 백주년 재단 이사들이 유일합니다.
해마다 설날, 교회 창립일, 추석 이렇게 세 번씩
10안팎의 선물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는 김영란 법 취지에 맞게
5만원 이내의 선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동안 명절이면, 과일이나 쇠고기를 선물로 저희 집으로 보내주시는 교우님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추석부터 일절 사양하려고 합니다.
귀한 선물들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교통정리 해 드리는 수고를
제 아내가 더 이상 하지 않게끔,
혹 이번 명절에, 제게 선물을 하려고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주위의 어려운 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그 사랑을 전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김영란 대법관 한 사람의 신념과 의지와 끈기가
그 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반대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거품을 제거해야 한다는 국민적인 합의를
도출해 내었습니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모독하고 해치는 일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퇴출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사회도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어떤 경우에도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모독하거나, 해치는 일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안에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제자들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우리 앞에서,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수치를 느끼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그 사람들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더둘로가 아니라
가난해도, 사람을 살리는 바울이 되십시다.
결코 짧지 않은 손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서
인명경시의 우리 사회를, 사람의 생명이 존중받는 새로운 세계로
반드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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