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 : 그의 경건, 열정, 희생 그리고 그의 삶 출처
-언더우드 선교의 특징과 공적을 중심으로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 기념 <제9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윤경로
◑1. 언더우드 목사의 신앙 배경과 내한 경위
2016년 10월 12일,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원두우) 선교사 서거 100주기를 추모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지금부터 131년 전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오후 3시 경
제물포(인천)항에 입항한 한국 최초의 미국인 복음 선교사입니다.
이후 1916년 10월 12일 서거하기까지 내한 첫 장로회 선교사이자,
한국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로서
온 몸으로 예수님의 제자도를 실천한 삶을 살았습니다.
호레이스(Horace)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존 언더우드(1827-1881)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리 사이의 3남 3녀 6남매 중
넷째(아들로는 막내)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부친 존은 제조 화학자로서 과학자요 발명가였고 문구 사업가였습니다.
등사용 잉크, 타자기 잉크리본 등을 발명했고, 직접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이 같은 사업 재능은 맏아들인 존 토마스 언더우드에게 전수되어
미국에서 유명한 ‘언더우드 타자기’ 및 잉크제조회사를 운영하였으니
발명가 겸 사업가인 집안에서 유년시절을 여유롭게 자랐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에 신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집안 어른은
아버지 존의 외조부인 알렉산더 워(Alexander Waugh, 1754-1827) 박사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의 웰즈 스트리트 회중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1790년대 성공회, 장로회, 침례회, 감리회 및 회중교회 등의 연합운동에 참여했으며
유명한 런던 선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성서공회의 해외 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초교파적인 선교활동을 하는 등 언더우드 가문에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디모데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받은 것처럼 *딤후1:5
언더우드는 외가와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 제자도의 바탕에서 경건한 행실이 중요하다고 할 때
청년 언더우드의 경건 신앙은 이러한 신앙 가문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던 호레이스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865년, 당시 영국에 살던 언더우드가의 가정에 불행이 닥쳤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한 해에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 가 아버지의 사업까지 동업자의 배반으로 실패하는 비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노모와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으로
5남매를 어렵게 기르다가 몇 년 후 재혼합니다.
언더우드는 1869년, 열 살 때 둘째 형 프레드릭 언더우드와 함께
영국에서 프랑스의 가톨릭계 기숙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기숙사에서도 형제는 프랑스 학생들의 조롱 속에서도
가정에서 익혀온 취침 전 경건 기도 생활을 계속하여
결국은 프랑스 학생들도 동참케 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언더우드의 부친은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에서
1872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했습니다.
이때 호레이스의 나이는 13살이었는데, 2년여의 프랑스 유학도 접게 되었습니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뉴더햄에 정착한 후 아버지는 다시 잉크공장을 차렸고,
점차 자리가 잡혀갔는데, 교회는 뉴더햄 주민들이 많이 다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전 가족이 출석하였습니다.
이로써 언더우드 가문의 교파가 회중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바뀐 것입니다.
18세 되던 1877년 뉴욕대학에 입학한 언더우드는
뉴더햄에서부터 뉴욕까지 7마일을 걸어서 통학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대학을 졸업하던 1881년에 아버지가 별세하였고,
그해 그는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NJ)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교에 입학,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회자로서, 나아가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언더우드가 신학을 하게 되기까지는
첫째, 외증조부 워 박사에게서 비롯된 회중교회적인 신앙 분위기,
즉 초교파적인 선교 신학에 뿌리를 둔 경건주의 신앙과
둘째, 아버지의 근면과 성실성,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척하는 모험심과 창의적인 가정 분위기 등의 영향을 받아
훗날 한국의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제자도의 핵심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으뜸이라고 할 때
언더우드가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었던 근본 바탕은
이러한 가문의 신앙 배경과 모험적, 개척적인 성장 과정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겠습니다.
언더우드의 삶을 통해서 가정교육과 부모의 영향이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언더우드는 어떠한 계기와 경위로 한국의 첫 선교사로서 내한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선교사의 꿈을 갖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합니다.
그가 14살 되던 해 인도 사람의 강연을 듣고, 인도 선교사의 꿈을 품고
이러한 인도 선교사의 꿈을 위해 그는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는 한편
1년여 동안 특별히 의학공부 과정을 밟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지를 인도에서 한국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뉴브런즈윅 신학교 학생 가운데 선교사를 자원한 학생들의 모임에서
한 회원의 한국에 관한 논문발표를 듣고
동방에 'Korea'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 학생자발운동(SVM)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1882년에 체결된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으로
은둔국이었던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1,200~1,300만 되는 인구에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앞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미국교회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며,
누군가 갈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열변을 들었던 것입니다.
훗날(1909) 언더우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당연히 인도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확신했기에
인도에 가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으며
1년간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다른 인물이 그곳(한국)에 가도록 마련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1년이 지나도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도 그곳에 보내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외 선교에 있어 지도급 인사들조차
한국에 나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글을 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한 메시지가 나를 깨우쳤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그러나 인도 선교를 특별한 소명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몇몇 특별한 준비를 한 것 등이 떠올라,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1년간의 고민 끝에 한국 선교사로 떠날 결심을 하고
소속된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를 냈으나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어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도 같은 요청을 두 번씩 냈지만
이 역시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 꿈을 접고 뉴욕에 있는 한 교회 청빙을 수락한다는 편지를 써서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순간,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싶었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한국은 어떻게 될까?’
나는 편지를 도로 집어 넣고 한국에 가기로 다시 한 번 결심한 후
센터스트리트 23번지(옛 장로회 선교본부 건물)로 방향을 돌렸다”
라고 훗날 간증하듯 회고한 바 있습니다.
마침 이때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는 총무가
엘린우드로 바뀌었고
여기에 브루클린의 평신도 맥윌리엄스가
한국 선교에 써달라고 보낸 1,250달러가 헌금되었기에
‘신비한 음성’을 들은 한국 선교가 현실로 구현되었던 것입니다.
▲1884년 11월에 언더우드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 뉴브런즈위크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그해 12월 31일 ‘첫 선교지’ 한국을 향해 출발했던 것입니다.
여행용 가방 하나와 타자기 한 대, 대형 카메라 하나가 그의 짐 모두였다고 합니다.
경유지로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후 3개월간
주로 헵번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J. C. Hepburn
미국성서공회의 헨리 루미스에게서
최근 한국 상황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때 요코하마에 머물며 우리말 성경 번역을 하던 관비 유학생 이수정을 만나
간단한 한국어 공부도 하였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함께 출발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란 칭호를 함께 받았으니
이 두 사람은 장로교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로 소속은 서로 달랐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당시 재한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두 사람을 “위대한 H.G.들”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둘의 이름(First and Second name) 이니셜이 모두 ‘H.G.’였기에
두 선교사는 서로를 “언디”(Undy), “아펜”(Appen)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언디’는 새문안교회를, ‘아펜’은 정동교회를 창립했던 것입니다.
◑2.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상의 특징과 공적
1885년 4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내한, 1916년 10월 하늘의 부름을 받기까지
31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 공적과 활동은
매우 다양 다기했습니다.
한국에 체류하던 시절 그가 책임지고 있던 여러 직함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한국에 온 첫 선교사로서의 명예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책임자로 활동하며
한국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31년간의 한국에서 활동한 언더우드 목사의 주요 업적을 추려 보면
새문안교회 목사로 섬기는 외에
한글 성경번역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경전서>의 번역을 주도하였고,
최초로 <찬양가>를 제작 보급하여 교회음악의 기초를 놓았으며,
<한국어문법>과 같은 한국어 문법서와 <한영자전>, <영한자전>을 편찬하였고,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신문>을 간행하여
기독교 언론의 기초를 놓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이 밖에 36개의 기독교단체 책임자, 연합신학대학 학장이자
심리학·철학·윤리학 교수, YMCA 이사장,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회 회장, 피어슨신학교 교장,
서울전도위원회 회장, 성경개혁위원회 회장,
선교회 집행·교육·재정위원회 위원, 세브란스병원 이사회 위원,
서울 초등학교 위원회와 연합공의회 법정위원회 위원 등
주요 직함만도 10여개 넘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그의 복음 선교사로서의 공적과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는 데 한정하고자 합니다.
재한 선교사 가운데 언더우드만큼 쉼 없이 선교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선교사는
없다 하겠습니다.
내한 초기 그의 열정적인 전도와 선교의 열정은 말년에도 전혀 늦춰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방대한 선교사업과 서신 교환을 위해 미국인 선교사 보조원을 포함하여
한국어와 영어에 능한 비서 두서너 명과 타이피스트 3~4명 외
한국인 번역자와 필경사를 옆에 두고 일했을” 정도로
말년에도 그의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 예로 부인(L.H. Underwood)이 펴낸
‘한국의 언더우드가(家. The Underwood of Korea’(1918) 문서에 보면
“1915년 4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한 해 동안에 각지로 보낸 편지 및 보고서가
무려 2,300여 통에 달할 만큼 열정적인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 열정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한국을 향한 그의 선교 열정이 적극적이었으며 시종여일했다는 점은
그가 한국교회에 남겨준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의 그 열정과 희생의 헌신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서도 당연히 필수적 요소인데
언더우드 역시 구원의 열정을 갖고 수많은 일들을 열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고
결국 이 땅에서 온 몸을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1900년대 접어들어 전도활동이 자유스러워지면서
그의 본격적인 지방전도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매우 독특한 전도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지방전도여행에는 한국인 동역
자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들 가운데는 두서너 명으로 구성된 코르넷(cornet) 연주자와
환등기 기사를 꼭 대동하였습니다.
일단 전도집회 장소에 도착하면 우선 천막을 치고
그 앞에 대형 크기로 그려진 예수 초상화를 걸어 놓은 후
나팔수를 앞세워 주변 동네를 다니며 전도지를 돌리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운집하면 코르넷 연주자의 선도로 찬양가를 힘차게 부르고
이어 환등기를 돌려 마치 무성영화 시절 변사(辯士)의 구성진 소리로 그림 설명이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참여한 지방전도여행이 특별히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미국인 언더우드 자신이 지방민들에게 더없는 호기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말로만 듣던 ‘파란 눈’(碧眼)의 ‘코쟁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코쟁이’ 외국인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방전도여행을 떠나면 적어도 하루에 짧게는 40리길, 길게는 60리 길을 걸으며
전도여행을 강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남다른 전도방법을 살펴볼 때 매우 조직적인 두뇌와
사업가적 기질을 지닌 ‘수완가’였다는 점 등
그의 개인적인 특징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남다른 사업가적 솜씨 때문에 한때는 타자기 회사를 경영하는 형님으로부터
부사장 자리를 맡길 터이니 미국으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후손 원일한 장로 증언).
이러한 사업가적 기질은 여러 면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는 초기 선교비 염출의 한 방법으로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학계에서 처음 공개된 1906년에 작성된 유언장에 보면
황해도 소래(松川)에 ‘소래비치회사’를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였음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안식년이면 본국에 돌아가
미국 전 지역 교회를 돌며 한국선교를 위한 상당한 후원금을 모금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강점당한 1910년 한 해만도
선교지원금으로 17만 불을 모금하였다고 합니다(L. H. Underwood 증언).
한 마디로 놀라운 사업적 수완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남다른 친화력과 뛰어난 조직력의 소유자였으며
일에 대한 추진력이 대단하였습니다.
즉 성경 보급과 판매를 위해 서울 중앙(새문안교회)에
도매서(都賣書, Colporteur; 宋淳明 장로)를 두고
지방 매서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며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어려움에 봉착했던 한글성경 번역사업을 기필코 해 낸 일,
이 밖에 수십 개 선교단체의 책임을 맡아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뛰어난 조직가로서 인화력과 일에 대한 남다른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 유산으로
교회의 연합정신과 일치운동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선교 활동이 자유스러워지자,
구미 각국의 여러 교단과 교파 선교사들이 대거 한국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하나의 선교의 장(場)을 놓고
교단과 교파 사이에 선교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여기에 이즈음 신구교(新舊敎) 간의 갈등과 반목이 한국에서 또한 재연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교회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던 이 시기
교파간 선교 경쟁이 갈등과 대립으로 비화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 협조적인 호혜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언더우드의 연합정신과 인화력 및 지도력의 공헌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교단, 교파간의 선교지 분할(지역 분배)을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선교기관과 교회 사이의 연합운동을 가능케 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선교지 분할은 훗날 한국교회를 교파주의적 교회와 지방색에 의한
교권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조치를 함으로써 일찍이 몰려올 교파간의 분쟁을 사전 봉쇄했으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연합과
일치운동의 전통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문안 강단에 교회 연합 운동 정신의 고양과 실천을 위해
다른 교단과 교파 교역자들을 세웠던 일이며
기독교 연합행사를 주로 당시의 새문안교회에 유치했던 것도
그의 이러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연합신문의 창간이며 연합찬송가의 발간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면서 기독교 연합교육기관으로서
연희대학교를 세운 것도, 바로 그의 연합정신의 적극적인 표현이자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철학과 정신과
그가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 선교적 유산은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언더우드가
‘회중교회’ 전통의 경건한 신앙 가문에서 물려받은 ①‘경건신앙’
청소년기에 네덜란드 계통 ‘개혁교회’에서 배운 ②‘개혁신앙’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은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신학을 통해 배운 ③‘선교신앙’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에 세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기둥 위에서 미지의 조선을 향해 선교의 결단을 내린 ①‘개척정신’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명령을 따라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쓴 초교파적 ②‘연합정신’
규모 있게 조직적, 체계적으로 각종 선교사역을 열정적으로 추진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와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십자가의 ③‘희생정신’은
예수 그리스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제자도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야말로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명령한 제자도를 온전히 실천하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간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도 이상과 같은 언더우드의 신앙에 나타난
‘경건, 열정, 희생’의 제자도를 이 시대에 본받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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