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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을 위해 울어야 할 때! 사22:1~25 한글출처 영어출처
It's Time to Weep for America! July 29, 1996
저는 결코 저 자신을 예언자라 주장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뼈를 녹일 정도로
저의 심령에 불 지피실 때에는 보고들은 것을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
파수꾼의 메시지라고 하든 여러분 마음에 드는 대로 부르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대해 저의 심령에 말씀하신 것을
저는 여러분에게 꼭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진실된 예언자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때때로 미래의 일들과 다가오는 심판을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예언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실로 몇 번이나 주 성령님께서 제게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경고하도록
강요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는 메시지는 예언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분을 곧장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 지에 관한 영원하신
몇몇 원칙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읽는 분이시면 누구나 어떻게 주님께서
미국을 대하시는지를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또는 미국 아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와 하나님이 역사 하셨던 예들을 공부하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공부하므로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실로 그분께서 죄악된 나라들을 다루시는 원칙은 절대적으로 변함이 없으십니다.
티끌만치도 그 분의 방법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세대마다 한결 같은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 분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다른 세대들을 다루신 것과 똑같이
현재 죄에 물들어 있는 우리 세대를 다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원칙대로 행하시는 그 분의 방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현 시대의 우리를 다루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상대로
그들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시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했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불평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을 방종한 육욕에 내던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순하게 역사를 고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 같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대하셨는가를 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으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9-11).
사도 바울은 "이것이 바로 분명한 성경의 본보기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실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구약 성경의 한 예를 빌려
그의 서신을 읽는 성도들에게 경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의 세대들을 심판하신 것과 똑 같이
그들의 탐심과 방종한 육욕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하나님이]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베드로후서 2:6).
베드로는 "만약 당신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멸한 것 같이 여러분을 멸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처럼, 저 자신이
구약 성경 특히 이사야서를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이 경고를 드립니다.
▶근래 제가 이사야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저를 22장에서 멈추게 하셨습니다.
갑자기, 저는 모든 예언자들의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했는지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서 22장은 은혜로 가득 찬 한 나라가 죄악으로 인해 타락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선을 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백성들은 완전히 타락했으며 마치 무신론자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의 백성들에게 예언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의 시작을 선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유다를 위한 회개의 부르심은 끝나 버렸습니다.
돌아 오라 그러면 치유되리라!는 울부짖음의 예언의 음성은
그 땅에 이제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미 너무 때가 늦어 버렸습니다. 이 백성들은 너무나 뻔뻔스러워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루라도 더 참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가슴은 미어졌지만,
이사야는 이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22:14).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으실 죄를 범했다. 선을 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뒤돌아 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버렸다!
◑유다가 행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일으켰는지를
여러분이 완전히 이해하시면,
그들의 행위를 통해 현재 미국 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여러분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심판을 가져왔던 바로 그것은
바로 지금 미국이 행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행한 악행이
그 나라에 패망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됐다면,
우리의 죄악은 분명히 이 나라의 파멸의 고통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존재하며 이 나라의 악행을 보았다면,
"이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릴 때입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악의 잔이 가득 차서 넘치고 있습니다!" 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22장은 '이상의 골짜기'라 불리웁니다.
그리고 여기 이사야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우므로 그 뜻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석자들에 의하면 이사야는 분명히 지붕 위에(아니면 어느 높은 곳에) 서서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너무나 끔찍해서
그의 심령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는 몸을 떨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파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이사야 22:4).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지 마십시오. 당신이 목격하는 것을 당신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요!
나의 심령은 곧 찢어 질 것 같고, 나의 가슴은 터질 것 같소.
나는 몹시 고통스러우며 감당할 수가 없다오. 나의 백성은 곧 멸망할 것이오!"
"...내 마음이 진동하여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 하도다..."(사 21:4,3)
이것은 분명히 이사야의 애국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자기 나라의 죄악으로 인해 애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실로 심판이 미국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애통하는 목사들이나 크리스천은
정말로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심판을 오랫동안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차들의 무리와,
능숙한 궁사들과, 힘센 기마병들, 낙타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봤던 그 예언적인 환상이
바로 그의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적군이 예루살렘을 둘러쌌으며 함락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군대가 움직이는 소리는 언덕을 메아리 쳤습니다.
그 무시무시하고 유명한 엘람의 마병들과 접전의 기르 용사들이 선두에 서서
진군해 오고 있었습니다.
전마(war horses)들은 으르렁 거리며, 말발굽이 땅을 흔들었습니다.
마차의 바퀴들은 구름같이 먼지를 일으키며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보병들은 예루살렘 성벽에 접근했습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며
창과 쇠지레로 성벽에 구멍을 뚫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놀라운 광경입니까!
▶이사야는 이 공포에 찬 장면으로부터 시야를 떼어
그 도시의 평평한 지붕 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목격한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지붕 위에서 술과 파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의 군대가 그들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기 위해
모여서 그 광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에서 눈을 돌이켜 평화로운 예루살렘 성의 지붕을 내려다 볼 때
이사야는 그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훤하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 하던 고을이여..."(사 22:2).
지금까지 그 선지자는 성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해왔습니다.
여러분의 우상은 무너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뢰하는 성벽은 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백성들이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적군이 다가오고 있는 광경이
좀 더 잘 보이는 지붕 위의 좋은 자리를 다투었습니다.
그 도시 전체가 들떠서 흥분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떠들썩한, 시끄러운, 흥분된'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벽 가까이 사는 백성들은 계곡 아래의 경치를 잘 볼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친구들을 관람석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들은 "올라와요. 이 광경을 꼭 봐야 되요.
점심을 싸 가지고 가족과 함께 오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어린이들은 신나서 소리 질렀습니다.
"저 큰 백마들을 좀 보세요! 저 멋진 마차들을 좀 봐요.
힘센 군인들이 방패에 기름치는 것 좀 보세요. 정말 멋져요!"
그들은 모두 잔치를 벌이고 술에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이사야 22:1).
저는 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지붕 위에서 외치는 모습을
제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여 정신이 나갔습니까? 어떤 영이 당신들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패망이 여러분 코앞에 다다랐는데 지붕 위에서 파티나 하고 있다니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입니까? 게다가 술 취하기 까지 하다니!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무엇이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이 나라 전체가 하루에 몇 천명의 영아들이 유산되고 있는데
파티를 벌리며, 춤추며, 마시며 오락이 넘쳐 날 수 있습니까?
어떤 질병이 이 나라를 눈멀게 해서
이 나라의 대통령은 몇 주 후면 태어날 영아들을 낙태 시술하는 살인을 저지르는
의사들의 시술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노인들이 자살하는 것을 돕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더러운 쾌락을 계속 추구하도록 허용하는 무시무시한 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미국은 지구 곳곳에서 이 나라로 몰려드는 낙태 옹호론자,
음란물 제작자, 마약 밀매자,
노인 살인자에 의해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음성은 파티중인 군중들의 소리에 파묻혀 버렸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 저 사람이 바로 노인네 이사야 선지자예요.
침울한 불운의 설교자. 뭐라 하던 상관하지 마세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언적인 경고는 웃음거리가 되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미국을 위해 슬퍼하는 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와 우리나라의 죄를 위해 누가 애통해 합니까?
그들 자신이 심판을 직면해 있으면서 축제를 거행하고 있는 바보 같고,
'눈먼 예루살렘 지붕 위의 그 무리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이 파멸의 시작점을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그들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죄는 단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해 버리는 것 훨씬 이상의 죄였습니다.
그들은 심판이 예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령을 강퍅하게 만들었습니다.
(앗수르를 통한 일시적) 심판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 그 증거가 명백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이 그 모든 심판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강퍅함이 바로 용서하지 못할 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더욱 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볼 뿐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다가온 심판을 조롱하고 즐길 뿐 아니라
동시에 전염병이 한창 돌고있는 가운데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백성들은 그 도시를 휩쓸었던 전염병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이사야 22:2).
역사학자들은 이 당시 예루살렘에 전염병이 엄습했다고 고증을 했습니다.
피난민들은 침략하는 적군을 피해 도망쳐 먹을 것도,
물도 없는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형편없는 건강상태 때문에 전염병이 급속히 퍼졌습니다.
좌우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악취는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시민들은 전염병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에 무감각 해 졌습니다.
어찌나 무감각했던지
아래에서는 다른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지붕 위에서는 온갖 오락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읍의 귀한 물과 식량, 포도주를
향락을 위해 다 써버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많이 들어 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이 시대 미국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전의 독일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희 집에는 베를린 곳곳의 파티장에서 만취된 사람들이 찍힌
잘 나온 사진들이 담긴 책이 있습니다.
연합군 측이 밤마다 폭격을 가하자 히틀러는
그의 벙커(지하 엄폐호)속에 숨어서 자살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폭탄의 물결 속에서도 사람들은
전쟁 중에 임시로 만들어진 술집으로 몰려들어가 술과 춤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베를린은 하나의 큰 집단 파티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모든 일은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몰락하기 바로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영원으로 향하는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후 장례식의 장면과 영구차가 흔한 것이 되어 버렸을 때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 졌습니다.
▶만약 이 같은 사태가 다시 미국을 휩쓸어 수많은 생명을 잃게 된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하나님께 돌아올까요? 우리들이 정신 차리며 회개할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과연 울부짖어 하나님의 자비와 치유를 구할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일 것입니다. 미국은 역사상 가장 최고의 난장판이 될 것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흥청댐과 파티에 빠질 것입니다.
실로, 이 나라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모든 국가들의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것들이 넘어질 때가 가까웠을 때 부자와 세력이 있는 자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 ...
결박을 당하였고... 멀리 도망한 자도..."(이사야 22:3).
도망갈 기회를 찾는 이들은 바로 지도자들,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사회가 돌아 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이사야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이사야 22:5).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가 붕괴되더라도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마지막 한건을 올리기 위해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의 자세는 이러했습니다.
"빨리 한 건해야지. 그리곤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을거야".
하지만 이사야는 그들이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그 도시의 국고를 담당한 셉나를 지적했습니다.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이사야 22:16).
이사야 선지자는
"보십시오! 성읍의 국고 맡은 자가 언덕 위에 돌로 된 집을 짓고 있소.
그는 그것이 묘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곳에 숨으러 올라가고 있소!“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파렴치한 도피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 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 있으리라"(이사야 22:18-19).
즉 하나님은 "너희들을 축구공 차시듯 차셔서 들통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안전한 곳이 없노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로우심으로 예루살렘을
구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도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한창 파티하고 있는 중에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갑자기 그들의 처해있는 위험을 향해 그들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이사야 22:8).
성령님께서 내려 오셔서 파티를 중단 시키셨을 때 어떤 일이 벌어 졌는지를
성경은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혹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간 사람이 있는지,
이사야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찾아 간 사람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백성들은 적어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심령 깊숙이 하나님의 손이 그들이 처한 심판가운데 임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몇 년 전 이 나라에 있었던
비슷한 한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라크와 전쟁이 터졌을 때, 부시 대통령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방 바닥에 엎드려 몇 시간씩 기도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국회는 전 국가에 기도령을 내렸습니다.
교회들이 만원이 되었습니다. 뉴욕시의 신문들까지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 주일 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똑 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이사야 22:8).
예루살렘 백성들은 그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위험의 신호를
주님께서 보내셨을 때
그분께로 돌아 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원들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의 무기의 힘을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겐 튼튼한 방패가 있지. 성벽은 단단하군.
성벽이 갈라지면 보수할 수 있는 물자가 있어.
우리는 요새를 구축할 수 있어."
단순히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걸프 전쟁' 때의 반응입니다. 1990~1991
텔레비전은 우리 측 군대의 대대적인 공적을 매일 보도했습니다.
우리는 미군 탱크들이 적군들을 위축시키며 사막을 재빨리 뚫고 나가는 것을 신나게 봤습니다.
우리는 우리 측이 정확하게 목표들을 쳐부수며
또한 우리 측의 비행기들이 레이저 빔 폭격들을 막는 것을 놀라움에 차서 봤습니다.
한 장군이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 있는 어떤 굴뚝에도 미사일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걸프전은 브로드웨이에서의 승전 축하 퍼레이드와 함께 다 끝나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하나님께 영광 올리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장군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그 광경에서 제외 되셨습니다.
제가 우리 군대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싸운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잘 싸워 준 군인들을 주신 것에 대해
또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미국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보다
그들의 군사력을 더 신뢰한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 하였고
이 일을 예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22:11).
이러한 이유로 이사야 선지자는 슬피 울었던 것입니다.
안전보장의 허상이 백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생각에조차 존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우리는 혼자 해낼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뻔뻔스러운 자만감에 매달렸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이와 비슷한 거짓 안보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졌습니다.
이라크를 패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의 힘센 군대에 도전할 만큼 힘있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를 폭격 할 자가 더 이상 없어.
수소 폭탄이 미국에 떨어진다는 두려움은 더 이상 없어!'
우리는 우리의 무기를 신뢰해 왔습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즐기고 있는 상대적인 평화로 인해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폭풍 직전의 고요함입니다!
*1996년 설교인데, 5년 후에 911이 일어났죠. 폭풍 직전의 고요함이 맞았습니다.
사실 1989(베를린 장벽 함락)~2001 (911)까지가 가장 세상이 평화로웠던 잠시 였습니다.
어떠한 요소가 한 사회에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게 할까요?
◑무엇이 최후의 심판을, 어떠한 뻔뻔스러운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실로 행하시게 만들까요?
이스라엘의 어떠한 죄악이 심판의 방아쇠를 당겼을까요?
무엇이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너희들은 선을 넘었구나!"라고 말씀하시게 했을까요?
이사야는 우리에게 대답을 줍니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이사야 22:12-13).
그들의 뻔뻔스러운 반항 중에서도
성령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부르고 계셨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거리에서 거룩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굵은 베를 쓰고 울며, 슬퍼할지어다!"
하지만 슬퍼하기는커녕, 그 백성들은 파티를 계속 했습니다.
비탄에 빠지며 우는 대신,
그들은 음식과 포도주로 흥청거렸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내일 이맘때면 우리들은 다 죽을거야. 뭐하러 산 짐승들을 아껴둬?
모든 양들을 다 잡고 잔치를 벌려 마지막으로 진탕 한 번 먹자구.
빨리 포도주 통을 가지고 나와. 우리 만취되어 나가자구!"
그래서 그들은 지붕 위에서 춤추며 마셨습니다.
적들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입니다.
마차들은 종대로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성벽을 부수는 헤머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병들의 무리는 싸울 준비를 하고 섰습니다.
벌써 성벽에는 틈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만 더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영원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 시간에 백성들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몰려들었다고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이사야를 찾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지
또 어떻게 그들의 성문으로부터 적들을 쫓을 것인지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게 하지 않았습니다! 운명론이 벌써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무신론자들처럼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그들은 구원받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여전히 그들이 회개하도록 부르시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큰 자비나, 두려움, 또는 경고라도
그들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포도주 잔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건배하며
그분 앞에서 웃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지옥에서 뵐께요!"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이 그분의 심판의 계시를 불러 일으켰던
마지막 거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꼭 같은 태도가
오늘날 이 미국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특징은 소위 ‘절망의 자포자기 sensuality of dispair’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바로 "나는 내가 지옥에 가리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앞에 하나님을 두기를 원하지 않아"라는 사고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을 코웃음 쳐 왔습니다!
◑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느냐구요?
너무나 비관적으로 들린다구요?
여러분은 어쩌면 "이러한 메시지의 목적이 뭘까?
왜 하나님이 이와 같은 예언을 나누라고 하실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이에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들을 위에 것들에 초점을 맞추게 하여
우리들이 세상과 얽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무너진 곳을 막아설 자,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4:2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누가 복음 21:34).
어쩌면 여러분은 "데이브 형제님,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완전히 무기력해져요"라고 생각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아니요! 그것은 주님과 함께 그 분의 집에 갈 준비를 한 사람의 반응이 아닙니다.
죽음은 진급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면
위를 쳐다보며 기뻐하라고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구속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영을 주셨습니다.
위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세주께서 가까이 다가오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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