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빌2:5~8 16.10.02 설교스크랩
▶죄가 우리 가운데 왔을 때 우리는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보다는,
자신을 의지하는 교만을.. 의지하며 우리는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 바로 죄의 뿌리요, 우리의 모습인 것이죠.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할 때
그 구원 속에는 겸손을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겸손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과 부여하심에 참여하실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런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성도들에서
나타나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흔적은 외형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그 흔적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한 것.
▶저희 교회가 창립 3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의 순서를 따라 우리의 말씀을 강해해 가는데
‘창립 기념 주일에 이 본문이 정해진 것,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구나.’
교회에 역사가 많아질수록, 교회의 과거의 역사를 자랑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몇 년 된 교회다!’
그 과거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만 속에,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겸손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는 교회다,’
그 많은 성도들을 자랑할 때, 하나님은 한 순간에 그 교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시설이 좋은 교회, 심지어 많은 일을 하는 교회.
그런 교만조차도 교회의 본질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죠.
교회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철저하게 겸손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한 해 두 해 역사가 깊어갈수록, 한 해를 더 지날수록
그만큼 우리가 더 겸손해지는,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나타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교회의 연수가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나는 이 교회에서 이만큼 오래됐다는 교만이 자라는 게 아니라
더욱 더 그리스도의 겸손이 나타나는 그런 신자들, 그런 성도들, 그런 교회!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믿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진정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겸손 없이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하는 고백이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겸손이 저절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예수님의 마음’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천적으로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품는다는 것은 붙잡는 것입니다. 매달리는 것입니다.
품는다는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11:29절에서
이 예수님의 마음을 소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빌2:5절의 해설판이
마11:29절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 주님의 멍에를 함께 매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품어야 할, 교회가 품어야 할,
우리 성도들이 품고 일평생 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겸손입니다.
그분의 겸손이 어떠한 낮아지심이었는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식으로 정보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품고 적용하고 실천하고 배움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과 연결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6~8절의 말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5~8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1. 이 말씀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 낮아지심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깊이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얼마나 높이 계신 분인가를 우리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것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강아지가 사람과 함께, 좋은 관계 속에 함께 먹고 사는 것 같지만
강아지는 절대 사람의 영광, 사람의 능력, 사람의 고귀함을 알 수 없어요.
강아지가 아무리 사람처럼 시늉도 내고
동물 가운데 원숭이가 사람처럼 먹기도 하고 손발을 움직이지만
사람의 가치와 영광과 존엄은 알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영광이 더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알고 체험하기 때문에 찬양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부분, 측량할 수 없는 영역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높으심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어요.
그렇기에 본래 하나님과 본체이시고 동등하신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양이 되신 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낮아지심은 우리가 결코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신 이후에
낮아지신 모습만으로도 우리는 상상하기가 어려워요.
사람 가운데서도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가장 깨끗한
그런 어떤 준비를 맞이하고 한 아기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래도 가장 깨끗한 준비 속에서 태어나는데
우리 예수님은 동물들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동물들의 먹이통에서 태어나는 것만 해도
우리는 사람이 되신 이후의 그분 모습만으로도 낮아지심을 경험하죠.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의 이 선재하심,
인간이 되시기 이전에 그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믿지 않아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이후의 낮아지심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있어요.
슈바이처 같은 사람, 그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지 않았어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인간이 되신 이후의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보고
나도 저렇게 낮아지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봉사하는 삶을 산 분이죠.
그러나 그 정도의 낮아지심이 아니에요.
인간이 되신 이후부터의 낮아지심만이 아니라
그분은 사람이 되시기 이전에 본래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그리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그 하나님이,
연약하고 유한하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흙을 입으신 모양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이죠.
▶C.S. 루이스라는 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돼지가 된 것보다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지신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개나 고양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개나 고양이로 낮아지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
연약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만큼 더 큰 낮아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되시되 건장한 청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요,
화려한 궁궐에 대저택의 멋진 요람 위에 비단으로 둘러쌓여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 그것이 주님의 낮아지심입니다.
▶예수님의 이 공생에 이전에 30년동안의 삶이, 성경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죠.
그 이유를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하는데 공감이 되었어요.
“그것은 그분의 낮아지심 때문이다.”
공생의 기록 이전에 예수님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갈릴리 주변의 호수의 어부들과 어울리며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 속에 태어나시자마자 기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아기로서 세상을 변화시켰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 낮아지심의 증거라는 것이죠.
그분의 낮아지심은 측량할 수 없는 낮아지심.
▶2. 두 번째로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얼마나 자발적인 낮아지심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6~8절에서 반복되는 단어들 속에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의 자발성입니다.
자기주도성입니다.
자기를 비워, 자기를 낮추어, 영어로 재귀대명사가 쓰여 있습니다. Himself,
반복되는 게 무엇입니까. 스스로 주도적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셨다는 거예요.
이 겸손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는 Humility죠.
굴욕이라는 단어, 모욕당했다, Humiliation이라고 하죠.
이 단어는 같은 라틴어 Humilitas에서 파생된 거예요.
같은 어원에서 이 겸손이라는 단어와 굴욕이라는 단어가 나뉘어졌어요.
왜 어원이 같을까요. Humilitas라는 단어에서 어떤 일이,
그것은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고
내가 할 일이라고 스스로 가는 것은 겸손, Humility가 되고.
‘저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라고
스스로 원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한다는 것은 모욕이 되는 거예요.
똑같은 자리에 있어도,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면 겸손입니다.
‘이것은 내 자리가 아니야, 나를 무시했어’라고 생각하면
모욕당한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겸손을 배울 때 대게는 어느 정도 굴욕을 겪으면서
낮아지는 겸손을 배웁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 내가 원치 않는 고난, 원치 않는 시련, 원치 않는 상황.
또 나를 대접하지 않는 어떤 사람, 나를 무시하는 사람과 부딪히면서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난을 통해 어쩔 수 없어서 낮아지신 게 아닙니다.
그분은 낮아지시려는 분이기 때문에 그 고난을 향해서 가신 것입니다.
순서가 다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겸손을 배웁니다.
그분은 겸손하시기에 고난을 스스로 택하셨다는 거예요.
우리가 배운 고난은 다 자발적인 게 아닙니다. 상황 속에서 배운 겸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요된 겸손이 아니라, 그분 스스로 낮아지신 거예요.
스스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겸손”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지극히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그 과정을 설명해줍니다.
말씀의 육신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요1:14절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로 향하시는 여정, 그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사람으로서 낮아지시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이 낮아지시는 거예요. 십자가까지.
요10:18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18
‘누가 내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놓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또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 계명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십자가로 향하시면서 누가 내게 이것을 빼앗아서 빼앗기는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내놓는 것이다.’ 자발성. 자기주도성이죠.
십자가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신 이후에도 십자가를 향하여
스스로 낮아지시는 과정 가운데 십자가까지 가신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어쩔 수 없어 상황에 이끌려 고난 받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으로 낮아지심으로 십자가까지 끝까지 가셨습니다.
철저한 자발성, 자기주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낮아지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이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죠.
▶3. 이 말씀은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얼마나 철저한 낮아지심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규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낮추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수도사는 매일 저녁마다 자신을 때리는 회초리를 갖다놓고
하루 동안 ‘너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아느냐?’
자기를 때리면서 낮추려는 수도사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봤자 자기 몸만 아플 뿐이에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뿐입니다.
그런다고 우리가 낮아집니까.
어떤 사람은 형식이나 제도를 통해 낮아짐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어떤 특별한 옷을 입거나 어떤 습관이나. 효과는 있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자아가 더 강해지고
자기 의가 더 드러날 수가 있어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같이 낮아지는 정확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어디서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반복되는 예수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뜻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한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다.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Not I’
철저하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 그분이 하라고 하신 말씀,
그분이 정하신 때를 따라 순종하시고,
심지어는 다시 오는 그때도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오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철저한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철저한 순종에 낮아지심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우리의 겸손은 어디에서 나타나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낮아짐이에요.
‘내가 나를 낮춰야겠다, 내가 낮아진 인생이 되겠다, 내가 겸손해야지..’
그러면서 자신의 규칙을 만들지 마세요.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겸손이지’ 라고 생각해서
자기 스스로 종교적 규율을 만드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금식하면서 재를 풀어헤치고 옷을 찢어놓고,
그런 게 겸손의 상징으로 봤지만, 그것 자체가 교만이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 만든 어떠한 형식 제도는 우리를 낫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낮아지심의 가장 정확한 방법은 순종하는 겁니다.
순종. 순종이 낮아지심의 법칙이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죽으시되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털 깎는 자 앞의 잠잠한 양처럼 온유하게 순종해야 한다.
철저한 순종!
▶그 순종이 철저한 순종이냐 아니냐를 증명하는 건 뭡니까?
온유함으로 순종하냐 이거예요.
순종하긴 하는데 분노하며 순종하는 것은 철저한 순종이 아니에요.
온유한 마음으로 털 깎는 자 앞의 잠잠한 순종.
여러분. 그래서 철저한 순종은 조용합니다. 잠잠한 양 같이.
우리 안에 잠잠한 순종이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시끄럽게 순종하는 경우도 있어요. ‘내가 이렇게 순종한다’,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온유한 순종. 잠잠한 순종.
그 순종이 우리의 생명을 요구할지라도 조용히 잠잠히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죠.
▶시편 40편 8절에 이 주님의 철저하고 잠잠한 순종을
시편 기자를 통해 미리 고백하셨죠.
시편 40: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마음을 미리 품고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겸손이요,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말씀에
잠잠히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요 낮아짐입니다.
이 측량할 수 없는 낮아지심, 자발적인 낮아지심.
그리고 순종을 통해 죽기까지 순종하신 철저한 낮아지심,
그 마음을 우리가 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창립 31주년을 맞이하는 저희 교회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더욱 품는, 더욱 배우는, 나타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드러나는 교회.
그것이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마땅한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CGN TV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방송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방송입니다.
이 CGN TV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그러한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이 시대에 가장 낮은 곳까지 갈 수 있는 그러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참여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품고
겸손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죄에 뿌리내린 교만에 조금도 우리 마음을 내어주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리스도의 겸손의 뿌리에 우리 인생이 연결되어
날마다 그분처럼 낮은 인생, 낮아진 인생으로
주님 앞에 영광 돌려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된 인생, 복된 교회가 되게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J.H.W.
'분류 없음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 이깁니다 (0) | 2017.02.13 |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0) | 2017.02.09 |
까불림이 다가 올 때 / 윌커슨 (0) | 2016.12.28 |
창4:12, 레18:28, 대하7:11~14 신앙 경영 (0) | 2016.12.26 |
전임사역 full-time ministry / 데이빗 윌커슨 (0) | 2016.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