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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LNCK 2017. 2. 9. 14:09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4:1~9         16.11.20.설교스크랩

 


도입

 

로마서 1장에서는 감사하지 않는 문제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문제로 지적합니다.

 

로마서 121절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졌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1:2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그 말씀을 한 직후에 감사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영혼의 대표적인 문제가 감사가 없어지는 거죠.

 

그 결과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릴 때 우리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므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우리 믿음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문제와 필요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거죠.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이것도 믿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믿음이 없으면 첫번째 두번째 믿음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믿음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열병에 나병환자들이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믿음으로 나온 것이죠. 주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한 명만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움을 구할 때는 간절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임한 이후에 감사도 간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움을 구하는 것은 간절한데, 감사는 간절하지 못한 거죠.

우리가 열이라는 그 소리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면

우리의 감사도 열이 되어야 하는데, 감사는 십분의 일이 될 때가 많다는 거죠.

 

우리는 빌립보서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의 영혼을 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 나타난 바울의 믿음은 문제 해결을 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므로 기도하는 그런 믿음도 아닙니다.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처음 빌립보에 갔을 때 거기서는 기적이 나타났죠.

빌립보 감옥이 열렸습니다.

저녁에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어요.

 

그런데 로마 감옥에서는 감옥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영혼이 더 기뻐하고 감사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빌립보 감옥이 아니라 자신이 머물렀던 그 빌립보를 향하여

이 보낸 편지를 쓴 로마 감옥에서

그는 더욱 더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다는 거죠.

 

그가 더 기쁨이 충만한 것은 기적이 나타난 빌립보 감옥이 아니라

아무 기적이 없었던 로마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빌립보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4:4절의 말씀을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 안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는 요소를 지적합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것인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본문에, 두 가지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요소가 지적됩니다.

        첫째는 <갈등>입니다.

 

4:2 내가 유오디아에게 간청하고 순두게에게 간청하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이들이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혹은 성도들일 수도 있겠죠. 여러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 편지에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것 자체가 두 사람에게는 책망이요 때로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짧게 이름을 언급하며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이오디아와 순두게, 유 집사님과 순 집사님. 유 권사님과 순 권사님.

 

이 두 사람의 문제는 가볍게 넘길 문제 같지만

사실은 작은 갈등의 불꽃이 사실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큰 이슈와 전쟁도 사실 파고 들어가면, 두 사람 간의 갈등일 수 있습니다.

작은 갈등의 불꽃을 섬세하게 다루며 해결하는 이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특별히 믿음의 공동체는 갈등이 전혀 없는 곳이 아니라

갈등을 건강하게 잘 해결해가는 것입니다.

 

스캅 팍이라는 유명한 크리스천 정신의학자가 있죠.

이분이 쓴 <디퍼런트 드럼> 다른 북이라는 뜻이죠.

우리 모두가 다 다른 북인데 어떻게 공동체를 이뤄가느냐.

그 책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아주 따끔하게.

 

성도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르길 좋아하면서 아무런 고통 없이,

아무런 희생 없이, 아무런 헌신 없이 그리스도의 몸이 저절로 되는 줄 착각한다는 거죠.

 

거긴 헌신이 요구되고 희생이 요구되고, 때로는 뼈를 깎는

십자가의 고통을 우리 모두가 감당함으로써 이뤄갈 수 있는 것이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공동체의 특성 중 하나는

은혜롭게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용할 때

그것은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포용이지

성도수를 교회수를 늘리기 위한 포용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헌신, 참여. 마땅히 자기가 책임져야 할 책임.

그런 것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저희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교인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1:1양육을 다 해야 하잖아요. 헌신을 요구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20 몇 년까지는 세 가족 등록 가정, 강의 듣고 등록하고

그 다음 1:1을 선택했지만. 이제 7~8년 전부터는

등록 과정부터가 1:1로 해야 하잖아요.

안 그러면 많은 성도 앞에서 잠시 왔다갔다 하는 그런 것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없다는 거예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분이 뭐라고 주장하냐면

교회가 주일날 출석을 불러야 한다는 거예요.

 

몸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이 안 보이는데 찾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 팔 다리가 안 보이는데 찾지도 않는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어쩌면 저희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이렇게 나를 몰라보는 게 좋아서 오는 것,

그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갈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관용하라이렇게 말씀합니다.

 

4:5.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여기서 관용이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어떤 잘못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 이 자체가 관용이죠.

 

어떤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너그럽게 가능하면,

스트릭하게 아주 엄격하게 생각할 수 있고

가능하면 포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너그럽게 대하는 두 가지가 가능한 거예요.

 

예일대의 유명한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교수님이 있죠.

<배제와 포용>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 배제와 포용의 연결을 이렇게 설명했어요.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진리에 대한 의지가 없으면 포용이 있을 수 없다"

 

어려운 말씀이지만 어떤 갈등의 상황에서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정의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포용을 원해야 한다는 거예요.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정의도 있을 수 없다, 또 정의가 없다면 지속하는 포용도 있을 수 없다.’

 

굉장히 깊은 책이지만 우리에게 포용에 대한 관용에 대한 의미를

정의와 더불어 포함시킵니다.

 

관용을 나타내십시오라는 이 본문의 맥락이 뭐냐면

이게 갈등의 상황이거든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 두 사람의 갈등이

지금 빌립보 교회 전체 안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관용을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자신과 다른 것,

자신과 다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신에 대한 반대에 대한 관용.

이런 관용도 있는 거예요.

 

저는 관용이란 단어를 갈등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갈등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습니다.

 

제가 읽은 책 가운데 깊은 감동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 파크 팔머라는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비통한 자를 위한 정착>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정치학 책이지만 내용은 아주 깊은 기독교적 메시지.

원제목은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

 

이분은 여기에서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문제,

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끌어안느냐는 것은

마음의 치유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첫째 중요한 원칙은 서로에 대해

자유롭게 반대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반대가 용인되지 않는, 반대를 관용하지 않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닙니다.

 

대게 보면 관계가 가까우면 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워서

겉으로만 예 하는 경우가 많아요.

용기 있게 진실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없으면

굉장히 위험한 것이죠.

 

겉으로는 예 하면서 속으로는 아니오, 그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오라고 말할 때 그것이 공동체 안에는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죠.

 

그렇지만 그 긴장을 관용하며 끌어낼 수 있는 공동체.

이런 포용과 관용이 있을 때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때로 아니오라는 반대의견을 표시한다고 해서 관계가 끊어진다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서로에 대해 자유롭게 다른 생각을 표시하지만

그것이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 분열과 다툼이 되지 않고

그것이 창조적인 공동체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잘못된 정치가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의견은 묻지마 찬성이에요.

관계가 먼 사람의 의견은 묻지마 반대에요. 무너진 공동체.

 

결국 긴장과 갈등은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치유되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도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반대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교만이죠.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용. 누군가 나와 반대되는 생각. 다른 생각을 할 때

그 사람에 대해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품을 수 있는가..

그런 관용도 있는 거죠.

 

잘못한 사람에 대한 관용도 있지만,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관용하는 마음.

왜 그렇겠어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주님이 심판자이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관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 한국 사회는 파커 팔머가 제시한 이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관용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 둘째로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염려>입니다.

 

염려에 대한 치료책은 감사입니다.

4:6~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7. 그리하면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한 조사기관에서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해본 데이터가 있습니다.

40퍼센트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에요.

 

30퍼센트는 변화시킬 수 없는 과거의 일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이 30퍼센트나 되는 겁니다.

 

12퍼센트는 사실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한 가십이나 비판.

 

10퍼센트가 악화되어가는 건강,

 

8퍼센트가 진짜 앞으로 맞이할 문제들.

그러니 18퍼센트만이 진짜 염려할 수 있는 내용들이에요.

 

염려는 불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기도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염려는 함께 포함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신의 증거이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의 마음이기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기도와 공존해야 할 것은 감사입니다.

우리의 염려를 치료하고 해독하는 영적인 치료약은 감사입니다.

거룩한 연금술이 필요한 겁니다.

 

감사가 염려의 문제를 치료합니다. 여러분 염려가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감사로 바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감사가 같은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왜 이 문제가 나에게 생겼느냐?’ 하는 거 아닙니까.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그 문제가 생긴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목적 없이 이런 일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돌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주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신다.’ 그럴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죽기 전날 밤, 이런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장수할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그분은 제게 산에 오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바라보았고,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거기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저는 행복합니다.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분의 마음속에 나오는 담대함과 행복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감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했어요.

 

염려를 감사로 대체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이죠.

이 평강은 수비대가 전쟁에서 성을 호위하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성은 얼마나 연약합니까. 한마디의 말로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만큼 연약한 게 없어요.

 

눈빛 하나, 표정 하나, 단어 하나로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마음의 성이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 마음의 성은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평강이에요.

하나님의 평강은 어디서 옵니까. 감사의 마음에서 임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고 해서

상황이 순간 변한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상황이 변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마틴 루터 킹처럼 흔들리지 않고

분별력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판단력을 우리에게 허락한다는 거예요.

 

시험을 앞둔 학생이 이제 시험이 앞에 있는데 염려가 돼요.

이 말씀 그대로 염려하지 않고 감사했어요.

내게 수능시험이라는 어려운 과제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해요. 그러나 공부 안하면 떨어지는 거예요.

 

평강하게 떨어지는 거죠. 그러니 평강이라는 것은

내 앞의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준다는 게 아니라

그 문제 앞에 염려함으로 벌벌 떨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이 되는 게 아니라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음의 보호를 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세상의 모든 압력과 유혹을 넘어설 수 있는 힘입니다.

 

전에도 제가 말씀드렸는데. 바다에서 제가 잠수함을 타본 적이 있습니다.

잠수함을 타고 내려갔는데 더 이상 못 내려가는 거예요.

수압이 너무 세서 이제는 내려간 잠수함도 터질 수 있으니까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 작은 잠수함이 견딜 수 있는. 그런데 그 잠수함 밑으로 보니까

저 밑으로 물고기들이 다녀요. 참 신기했어요.

 

이 육중한 철갑으로 된 잠수함도 못 내려가는 그 수압을

견딜 수 있는 물고기들이 있는 거예요.

 

그 물고기들은 수압을 어떻게 견디죠. 그 안에 과학적으로는

어떤 물고기의 물질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지만

사실은 그 안에 압력이 있는 거예요.

 

작아보이지만 그 엄청난 수압, 인간의 힘으로 만든 철갑으로 둘러쌓인

그 잠수함도 견디지 못하는 수압을 견딜 수 있는 내면의 압력이 있는 겁니다. 신비한 거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내부의 압력이 물고기 안에 있기 때문에

터지지 않고 그 물고기가 자유롭게 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그 내면의 압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공이다그런 표현을 하는 거죠.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내면의 압력이 충만해야

우리는 외부의 압력과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보면 마지막, 8~9절에 보면

어떻게 이 평강을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운 대로 계속 실천하는 겁니다.

 

4:8. 마지막으로 형제들이여, 무엇이든지 진실하고 무엇이든지 경건하고

무엇이든지 의롭고 무엇이든지 거룩하고 무엇이든지 사랑할 만하고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일이 있거든 거기에 무슨 덕이나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십시오.

 

9. 여러분은 내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이곳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합니다. 무엇을 실천합니까.

진실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감사의 기도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했습니다.

그 다음에 행할 것은 진실하고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때

그 평강이 계속해서 임한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4장을 보면 성령님이라는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와 열매를 설명하는 거예요.

 

성도들이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

어떤 갈등이라도 관용으로 그것을 변화시키고.

염려는 감사로 변화시킬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거예요.

 

이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성령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허락된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삶 누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평강을 잃어버린 이 나라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어둡고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힌 백성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그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이 어두웠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다투고 분열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이 가득 찼습니다.

 

주님, 다시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므로

우리의 영혼이 밝아지고 분별력 있는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갈등을 관용으로 변화시키며

염려를 감사로 변화시키므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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