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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과 착함의 능력 행10:38
죄인들에게 있어 가장 축복된 일은, 하나님 앞에 나올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나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정성을 다해 예배 드리는 일보다
축복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가득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히 앉아서
아름다운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저 매일 101번 이상씩 ‘하나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저 밖에 없습니다.
위선과 거짓과 탐욕과 악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라고 고백드립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어요.
‘내 속을 들여다보니 천한 것은 쥐꼬리만큼 없고 악
한 것이 더 많아서 이것이 이길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속에는 악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그저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 고백할 것은 아직도 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기 저기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참 귀한 교회 불러주셔서 말씀 전하게 된 것,
하나님의 은혜인데.
저는 은퇴한지 7년이 되는데. 7년 동안 매주 빠지지 않고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한 두 교회 설교하고 있는데
금년에 세 교회, 큰 교회에서 또 설교하게 된 것도 감사하고.
오늘 이렇게 이 교회에 와서 이렇게 힘 있게 예배드리는 모습을 볼 때
너무 좋습니다.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제가 평생에 깨닫게 된 깨달음 중
세 가지 말씀을 골라서 오늘 말씀드립니다.
1부 예배 시간에는 인생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비롯해서
선배들이 걸어간 인생이 무엇인가?
일곱 가지 길을 걸어가는 존재다.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는 복음이 무어냐?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이 무어냐?
세 번째 시간에는 선교가 도대체 무어냐?
이 세 가지 말씀을 오늘 드리는데.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이 무엇이냐?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세상을 바라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미쳐서 산 사도 바울의 고백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복음이 무엇이냐... 이런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복음 3도, 십자가 복음 3도. 그런 말을 제가 만들어봤어요.
십자가에 나타난 그 복음이 무엇이냐. 물론 백 가지 천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제가 세 가지로 요약해서 늘 말씀 드립니다.
▲1. 첫째는 약해지고 약해지신 것이다.
예수님처럼 약해지신 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약해지신 분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해지고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강해지고 지혜로워졌습니다.
미련해지고 약해지고 어리석어지는 게 십자가의 복음이구나..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만왕의 왕이 매를 맞고 조롱을 당하고 죽임 당해요.
한 말씀도 안 해요.
오히려 자기를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십자가 복음은 약한 것이구나. 미련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영국의 세계적인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Power through weakness.
약함을 통해서 나타낸 능력.
제가 직접 영국에서 몇 번 설교를 들었어요. 2007년 7월,
영국 케직 사경회에서 설교를 하세요.
‘십자가의 복음은 약해진 거다.’ 그분 말씀을 인용합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걸 묵상하려고 해요. 우린 얼마나 약해졌나.
조금 욕하면 화를 내고 대들고. 예수님은 그런 일이 없으셨어요.
사도 바울도 그런 일은 없었어요.
매 맞으면 기뻐하고 핍박 당하면 기뻐하고..
예수님도 나로 인해서 욕하고 핍박 당하면 기뻐하라.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약해지는 것이구나.’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장에서 하나님이 약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하나님이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십자가는 약해지는 것이다,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미련해지는 것이다, 그래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다.
이방에는 미련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이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멋지게 유창하게 설교 안하려고 한다.
로마의 웅변설 포기했다, 헬라의 지혜 포기했다.
나는 두렵고 떨림으로 설교한다.
내가 너무 설교 잘하면 십자가를 가리우게 될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변질시킬 것 같다. 두렵고 떨림으로 약함으로
이 복음을 전한다.’ 이게 십자가 복음의 특징이에요.
순수한 십자가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어눌하게,
유창하지 않았어요.
사도 바울은. 떨림으로 십자가 복음 전한다. 십자가 복음은 약한 거다.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약해져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어리석어져야 한다. 너무 유창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이 그랬어요. 아니 너희들이 왜 바울을 높이냐,
게바를 왜 높이냐. 이것들이 무어냐.
사도 바울은 자기를 묘사하는 단어를 아주 부정적인 단어를 다 골랐었어요.
바울이 무슨 물건이냐. 존 스토트 박사가 그렇게 설교하시더라고요.
중성 명사를 썼다, 남성도 아니다. 바울이 무슨 물건이냐,
아볼로가 무슨 물건이냐. 조금 내려가서는 Nothing.
바울도 베드로도 아무것도 아니다. 왜 너희들이 설교자를 높이느냐.
예수님만 높여야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러고. 조금 내려가서 4장에 가서는 만물의 찌꺼기,
시궁창에 버려지는 음식 찌꺼기다. 어떻게 그런 표현까지 써요.
저는 옛날에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곤고한 사람이로다.
Wretched. What a wretched man I am.
영어로 하면 ‘저주 받을 새끼’에요. 어떻게 그런 단어를 썼을까..
‘저주 받을 새끼. Wretched. 시궁창에 버린 찌꺼기.’
그래야 복음이 나타납니다.
‘나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노라. 나는 만물의 찌꺼기다.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에 보면 약함을 자랑하여,
‘내가 자랑할 건 약함 뿐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병에 들어서 ‘나 좀 고쳐주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야. 내 능력은 병 가운데 약함 가운데 나타나!’
그러니까 기뻐해요. ‘내가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
약함의 예찬이에요.
예수님이 약해지셨어요. 사도 바울이 약해요.
그리고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약해야 합니다.
조선 사람 약했어요. 평안도 사람 약했어요.
전라도 사람도 약했어요. 너무 강하면 복음 받지 못합니다,
너희들 부르심을 보라. 고린도전서 1장 나와요.
저는 장신에서 합신에서 설교할 때마다 그 성경을 읽었어요.
설교 듣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너희들을 부르심을 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능한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을 택하시고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옛날 조선 때는 약했어요.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가 그때 조선에 와서
이 나라보다 절망적인 소망이 없는 가난하고 약한 나라가 어딨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상하게 이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길선주 목사님 통해서 한국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예뿐만 아니에요. 이천 년 교회 역사에요.
가톨릭이 처음에는 잘되다가 너무 강해지니 문제가 생겨요.
한국 교회가 지금 너무 강해지니 문제가 생겨요.
한경직 목사님처럼 약해지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약해지고
장기려 박사님처럼 약해지면 세상이 돌을 안 던져요.
오히려 동정을 하겠죠.
너무 강해지고 부자,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자가 됐어요.
예수님이 제일 책망해요. ‘회개하라,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너는 가난뱅이다.’
서머나 교회는 칭찬해요.
‘가난과 궁핍이 있는데 핍박이 있는데 너는 사실 부자다.’
‘십자가 복음은 약해지는 거구나.’ 이건 우리가 싫어해요.
근데 어떻게 해요. 프랜시스는 제일 약했어요.
‘나는 가난과 결혼했다. 고난은 내 스승이다’, 그랬어요.
우리 선배들은 그랬어요.
지금 한국 교회는 너무 강해졌어요. 너무 높아졌어요.
벌써 오래 전에 미국의 지도자 한 분이 와서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너무 위대해져서 너무 우상화되어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을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한 일이 있어요.
한국 교회가 좀 더 약해질 수 없을까. 너무 멋진 프로그램에 정신이 나갔어요,
지금. 그거 다 없애버리면 좋겠어요.
음악 공연장 같이 되고 극장 같이 되고 무슨 연설장 같이 되고.
한경직 목사님 그런 거 하나도 몰랐어요.
그분은 삶이 설교하는 것이다.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약해지시고 가난해지셨어요.
부요하신 분으로 가난해진 것, 이것도 약해지는 거예요.
능력 다 버려요. 멸시를 받는다 그랬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헨델의 메시야를 감상하면서
그때 영어로도 한 것 같아요. Despised rejected.
멸시를 받아 싫어버림을 당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를 받아 싫어버림을 당하냐. 충격을 받아요.
지금도 가끔 제가 비판을 받을 땐 아, 나도 다행이다.
예수님이 멸시를 받아 싫어버림을 당했는데 나도 좀 비판 받아야지.
약해지는 것. 어리석어지는 것.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이니 어떡해요.
십자가의 복음을 닮으려면 우리 선배들 중에 그런 분들 찾아보려면 많이 있죠.
▲2. 둘째로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특성이 무어냐. 능력 아니에요.
능력 있으면 다 때려 죽여야죠. <착함>이에요. 착함!
착함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강도든지 로마 군인이든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든지.
배신자 베드로든지. 핍박자 사울이든지. 도사 길선주든지.
깡패 이기풍이든지.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착함. 착함.
사실 한 번 이걸 깨닫게 되면 성경이 다 착함 같아요.
부자되기 원하면 성경이 다 부자처럼 보이고.
복, 복 그러면 다 복 같이 보이고.
아, 약함. 약함. 착함. 이제는 착함이죠. 착함.
소금과 빛이 착하다 그래요.
사도행전 10장 몇 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두루 다니며
착한 일만 하셨다, 그게 쭉 나와요.
전에는 그런 거 베드로 몰라요. 능력, 설교 이것만 했어요.
고넬료가 착한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냈지.
나까지 여길 가라 그랬지. 예수님이 나보고 여길 가라 그랬지.
예수님은 착한 분이시구나.
소금과 빛은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주린 자에게 먹여라, 원수를 사랑해라. 이게 착함이죠.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하셨다.
착함. 사실 예수님의 사역을 쭉 보면 너무 착해요.
어떻게 태어나실 때부터 죄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우리를 위해서 너희를 위해서 우리 같은 죄의 모습으로..
로마서 8장을 읽다가 아주 충격 받았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구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너무 착하셨어요.
문둥병자 만지고 다 만져요. 죄인을 만져요.
어떻게 이렇게 착해요.
간음한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도. 막달라 마리아 칭찬해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의 여자, 성경학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해요.
사랑이 많어, 많은 죄가 용서해졌어.
그 쓰레기 같은 걸 어떻게 그래요. 그렇게 착해요.
너희도 좀 착할 수 없느냐?
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셨다...
성경은 착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요.
그렇게 보니 사도행전이 참 착한행전이에요.
예루살렘 교인들부터 착해요. 안디옥 교인들도 착해요.
도르가가 착해요. 겉옷과 속옷을 줘요.
그러니 그것을 복음이 전해요.
고넬료가 착해요. 루디아가 착해요. 디모데가 착해요. 바나바가 착해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그 다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요.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이 착하셔서
그들을 바라본 사도행전의 모든 사람이 착했구나.’
저는 옛날에 착함 그러면 자유주의인 줄 알았어요.
인본주의인 줄 알았어요. 제가 무식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착하셨구나. 사도 바울이 착했구나, 디모데가 착했구나.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통 신학 강의가 아니에요. 뜨거운 체험도 아니에요.
화려한 프로그램도 아니에요.
그저 상처 입은 사람들 어루만지는. 예수님처럼. 나환자도 어루만지고 품고
그럼 다 무릎 꿇죠. 공산당도 무릎 꿇고 무슬림도 무릎 꿇어요.
저는 공산당에게 사랑을 베풀고 무슬림에게 베푸니까
그들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나오는 걸 여기저기서 봤어요.
사랑 밖에 없구나. 착함 밖에 없구나.
그들을 오히려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저는 종교 개혁이 솔라,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이라는 건 좀 문제다, 물론 중요해요. 사실 믿음만이에요.
그런데 만, 만 그건 아니에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그랬으니까. 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지옥 가라.
마태복음 7장에 마지막이 그래요. 주여, 주여, 하나님.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
착함이 있어야 한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
▲3. 셋째로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특성이 무어냐.
<주변성>이에요. <땅끝>이에요.
우리는 대한민국을 좋아하고 국가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나, 나,
내 가문, 내 교회 그걸 좋아해요.
이스라엘 좋아하고 유대 좋아하고...
그런데 그건 정반대에요. 주변이에요.
성부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은 주변이에요.
사실 십자가는 지옥까지 가는 거예요.
사도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 그랬어요.
지옥. 그건 우리가 이해는 할 수 없어요. 저주의 땅으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는 화려한 영광의 자리가 아니에요.
세상으로 오셨고 사마리아로 가시고 여기저기 가시다가
골고다 언덕은 영광이 아니에요. 지옥의 저주, 주변이고 아주 끝이에요.
땅끝. 사도 바울은 땅끝으로 가요. 베드로도 땅끝으로 가요.
주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이것은 기독교 아니에요.
물론 민족을 사랑할 수 있지만
한경직 목사님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잘못이다, 그랬어요.
우리는 대한민국을 너무 좋아하는데
나는 그거 목사들과 선교사들은 그거 안 부르면 좋겠다.
수백 만의 외국인들이 어떻게 볼까.
주변성. 구약은 본래 주변성이에요.
아브라함 보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해서,
너를 축복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너를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족속이. 조만간 이스라엘과 앗수르와 애굽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한다...
어떻게 그 원수 같은 것들이 함께 해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사46장 9절에도 그래요.
‘내가 너를 택한 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겠다’, 그게 쭉 나와요.
요나야, 너는 니느웨로 가라. 이게 구약에 많이 나와요.
이스라엘도 예루살렘도 하나의 근거지는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로 가는 건 아니에요. 땅끝이에요. 땅끝.
신약의 복음도 주변 지향적이에요.
하늘을 떠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복음을 전파했을 때
지역적으로는 갈릴리, 사마리아, 욥바, 가이사라, 안디옥,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주변, 주변, 주변.
로마까지 가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어제 나에게 로마까지 가라 그랬다.
조선까지 가라. 중국까지 가라. 사회적으로는 상층이 아니에요.
가난한 자, 거지, 병든 자, 저주받은 자. 백부장이 나와서.
그때는 백부장 다 때려죽일라 그랬죠. 이런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다.
백부장을 칭찬해요. 별 거 아니에요. 내 종 좀 고쳐주세요,
그거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 마음을 봐요. 이런 믿음을 내가 본 일이 없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물론 자기 자녀들을 향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주변과 땅끝과 이방이에요.
정치, 사회, 인권. 개혁도 중요하지만 복음과 사랑을 품고
그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주변으로 가고 가고 가고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에도 가라. 사도행전 1장 8절에도 가라. 가라.
물론 너무 높은 자세로 가면 안돼요. 그저 끌어안는 거예요. 품는 거예요.
같이 노는 거예요.
‘너는 못됐어, 너는 다 틀렸어.’ 그러면 테러가 일어날 수 있죠.
그저 같이 놀고. 예수님이 아이들과 놀고 세례와 친교와 식사도 하시고.
죄인들을 좋아하시고..
9장에 보면 마태복음 나는 의인 안 부르러 왔어, 죄인 부르러 왔어.
나는 건강한 사람 안 부르러 왔어, 나는 병자 부르러 왔어.
나는 의인 안 부르고 죄인 부르러 왔어.
그 말씀 저에게 너무 위로가 돼요.
▲마치는 말 / 약함과 착함의 모범, 한경직 목사님
십자가 복음의 특성이 무어냐, 물론 백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1) 약해지고 약해지고 약해지는 것이다. 죽임 당하는 것이다.
2) 착한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처럼.
거기에 악한 건 하나도 없어요.
한경직 목사님 악한 건 하나도 없어요.
약해지고 착해지고.
3) 모두를 품는 주변성.
전 이 세 가지 특성을 지닌 분들 중에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 등등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없어서 성 프랜시스 얘긴 못해요.
한경직 목사님은 약함을 지닌 분이에요. 몸도 약하고.
평생 폐 하나 없이 사시고. 마음도 약해요.
누가 이리 오라 그러면 오고 저리 가라 하면 가고. 비판도 당해요.
무식한 학자들이 비판도 해요. 독재자들이 오라고 하면 가고.
그렇다고 독재자를 인정한 건 아니에요.
약하신 분이에요. 젊었을 때 제가 탄신 백 주년 때 기념 강연을 했는데
다 할 수는 없어요. 열일곱 살 때, 평양 영성 소학교 교사로 봉직했을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절망해요, 좌절해요. 약해요.
막 이렇게 대항하질 못해요.
스물일곱 살 됐을 때 브리스턴 신학교에서 폐결핵 말기 선고를 받고
인생을 포기하려 그래요. 약해요. 난 이제 죽었다.
약함 중에 하나님이 역사하세요.
신의주 제2교회와 영락교회 목회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내요.
6.25 전쟁 중에도 약함을 드러내요.
군사 독재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내요. 그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어요.
한경직 목사님이 오늘 대담에서 괴로운 일이 무어냐고 질문했을 때
일생을 연약한 몸으로 살아온 것이 괴로움이었지요, 그랬어요.
그런데 그분은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요.
1960년 8월 3일 <약한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약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얘기를 쭉 했고
1972년 4월 23일 이런 얘기를 했어요. <약할 때 강함이라>
이런 설교를 했어요.
“인간이 약할 때는 흔히 겸손하여집니다.
건강하던 이가 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이게 다 은혜가 됩니다. 모든 경험이 유익하게 됩니다.
병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더 십자가를 바라보고
병 중에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게 될 겁니다.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하여집니다. 교만은 만죄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인간이 약해질 때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깊은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약할 때 더 기도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 뉴멕시코주 알바 컬키라는 도시에 있던 요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 제가 폐가 약하여 약 2년 간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병석에 고요히 누워서 약할 때 강함이니라.
라는 성구를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때 강함이니라, 하고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이상 한경직 목사님이 설교에서 인용했어요.
한경직 목사님 착했어요. 착한 일을 다 했어요.
장신대 어느 교수님이 한국의 착한 일을 하는 기관치고
한경직 목사님이 만들지 않으신 기관이 어딨냐고 그랬어요.
신의주 제2교회 때부터, 영락교회 때부터. 6.25 때, 그 이후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까지. 모든 착한 일을 다 하셨어요.
그래서 고훈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기리면서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라고 목이 메어 불렀어요.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 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이 없으신 한국의 성자요,
한국의 작은 예수요,
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요.
우리가 오늘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가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입니다.
실제로 한경직 목사님 주변성이에요. 사회적으로 제일 불쌍한 사람,
일본을 위해서 마지막에 기도했어요.
자기를 박해하던. 북한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기도했어요.
남한산성에 자주 가곤 했어요. 세계를 품으신 분이에요.
이분은 요새 우리처럼 어떤 것은 악의 축이고 그런 거 없어요. 모두를.
한경직 목사님의 관심과 사랑은 민족과 나라에 국한하지 않았어요.
일본과 북한과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에 다 미쳤어요.
한경직 목사님 물론 한국 나라와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넘어선 분이었어요.
1957년 3월 3일, <성서적 애국심>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시면서
예수님도 애국자십니다.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가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귀하지만 국가를 우상화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민족과 국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이십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 변태적으로 발전하면
독재주의가 생기는 것이고 배타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1902년에 한경직 목사님 태어나시고
손양원 목사님 태어나시고 유관순 선배 태어나셨는데.
참 너무 귀한 삶들을 사셨어요. 약하셨어요. 착하셨어요. 주변이에요.
대한민국만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셨어요.
그래서 오늘 십자가 복음의 특색이 무어냐,
그래서 제가 복음 3도. 복음의 세 가지 길.
약함의 길을 걸어가는 길. 착함의 길을 걸어가는 길.
주변성의 길을 걸어가는 길.
우리 한국 교회가 새로 좀 정돈을 해서 우리가 가는 길이 좀 잘못됐다면
너무 지혜롭고 강하고 부자되고 이런 거 좀 포기하고. 능력, 필요 없어요.
착함이에요. 능력 필요 없어요. 착함이에요. 화려한 예배 필요 없어요.
이사야 1장에 그래요. 이사야 58장. 내가 받는 예배는 그딴 게 아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는 그런 게 아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옷을 입히는 그것이 금식이다.
예배다. 좀 돌이키면, 예배도 좀 돌이키고. 우리의 강조하는 것도 돌이키고.
좀 약해지고. 착해지고. 우리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일본도 중국도 무슬림도. 품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북한도 품어야죠. 북한도 품어야죠. 사랑으로 품으면 돼요.
착함과 약함으로 품으면 돼요.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가 새로 태어날 수 있고 할렐루야교회가
이런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십자가 복음의 특성들을 지니시고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정한 죄인 이런 귀한 말씀 십자가의 도를 전할 자격이
도무지 없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깨닫게 하신 말씀을 몇 마디 증거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처럼 약해지고 매 맞아도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착함과 약함을 주시고
주변까지 저주의 땅까지 내가 갈 수 있는 그런 주변성도 주시옵소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지니고 십자가의 모습을 지니고 살다가 죽는
그런 성도들이 되도록 우리 할렐루야교회 축복을 주시고
오늘 모든 성도들 주님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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