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6

선교적 교회

LNCK 2017. 3. 30. 16:01

선교적 교회                    행13:1~12                 16.02.07 설교스크랩, 녹취

 

오래 전 잠수함을 타본 적 있습니다. 관광용이라 아주 깊은 바다 속까진 들어가지 못했죠.

작은 잠수함을 타고 들어가는데 어느 정도 일정 깊이로 들어가니

더 이상은 내려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은 수압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런 방송이 나오면서 창가로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십시오.’ 그런 방송이 나왔습니다.

 

육중한 철판으로 된 배도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는 그런 엄청난 압력이

바다 속에는 존재합니다.

창가로 내려다보니 저 아래쪽 잠수함이 내려갈 수 없는 곳에도

유유히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 물고기들은 수압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육중한 철판으로 된 잠수함도 더 이상은 내려가지 못하는데

저 밑에 깊은 심해까지도 다니는 물고기가 있는 것이죠.

 

후에 자료를 찾아보니 여러 과학적 답변이 있더라고요.

심해 깊은 곳에 사는 물고기일수록 부레, 허파 같은 기능을 하는 그것이

액체로 가득 차 있고 여러 차이를 설명합니다만

결론은 그 물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그 안에 동일한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스터리한 일이죠.

 

신체 구조가, 몸 안의 구조가 다르지만 그 이유가 뭐냐,

압력을 소화하고 그 압력을 견딜 수 있게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답입니다.

 

사도행전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바다와 같은 엄청난 시대의 압력,

세상의 유혹, 삶의 압력, 주어진 사명의 압력. 엄청난 압력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내면의 힘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죠.

 

깊은 바다속에 작은 물고기들과 같은, 어쩌면 당시의 바다로 볼 때는

사도행전의 인물들은 지극히 작은 물고기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세상의 압력을 이기는 내면의 압력이 존재했습니다.

주님께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을 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엄청난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 감당해야 할 많은 압력의 유혹에 눌려서

때로는 교회가 무너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성령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임재하심,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먼저 역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로,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사용됩니다.

 

왜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로 쓰임 받게 되었을까요?

그 도시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부자들이 모이는 국제 도시였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아니죠. 그 안디옥 교회 안에 참된 선도적 교회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보여지는 선도적 교회의 모습,

그것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일에 쓰임 받는

그런 교회임과 동시에 안디옥 교회의 공동체 안에 복음의 역사와 능력이 살아 있는

그러한 교회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1. 첫째로 안디옥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선교적 교회는

그 공동체 안에 벽이 없는, 어떤 장벽이 없는 교회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는 외부적 사역 이전에 내부 사역의 선교에 성공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서로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사람을 사귀다 보면 벽이 생기죠. 보이지 않는 벽이죠.

편견의 벽, 그리고 의심의 벽. 뜻하지 않는 오해의 벽.

 

교회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많은 벽들이 생기는 거예요.

벽이 많을수록 선교적 교회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교적 교회 안의 벽은 허물어집니다.

십자가는 모든 벽을 허물고 휘장을 찢으셨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무셨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지 않겠습니까.

 

죄의 벽을 넘어서시는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 공동체는

어떤 벽도 존재치 않습니다.

언어의 차이건, 문화적 차이건, 인종의 차이건 간에

그것이 벽으로 부딪혀지지 않는 거죠.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명단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31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명단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존재했던 예언자들과 교사들.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언적 역할, 또한 교사의 역할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바나바. 제일 앞에 바나바가 나오고 마지막에 사울,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죠.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가장 첫과 끝에 나오는 것은 헬라어적 표현 방식 때문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중요한 사람의 이름을 열거할 때 가장 중요한 사람을 처음에,

두번째로 중요한 사람을 제일 마지막에 두는 문법적 습관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 보면 인종을 초월한 명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 북아프리카죠.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있습니다.

또한 바나바는 구브르 출신 유대인입니다.

또 니게르는 로마 이름이고 시몬은 유대인입니다.

거기에는 로마인, 유대인, 북아프리카인,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 공동체 안의 리더십도 인종을 초월한 국제적인, 세계적인

그런 리더십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위치도 초월했습니다. 후반부에 보면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 헤롯 안티파스, 그는 헤롯 대제의 아들이죠.

헤롯 안티파스. 개역개정을 보면 젖동생이다.

젖동생은 젖먹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적어도 그만한 사회적 신분이 있어야겠죠. 아무나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왕의 친족이거나 가까운 가족이거나 그만한 대등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이겠죠.

 

반면에 사울은 랍비로서 가난한 선비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그들이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세상에선 존재하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도 어려운데

그 당시 시대로 생각하면 그 당시의 왕의 한마디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왕권 시대에,

노예 신분제가 있었던 그런 시대에, 차별이 심했던. 그런 시대에,

이런 공동체를 이뤘다는 것은 그들 안에 먼저 복음의 역사가 능력 있게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들 안에 선교가 먼저 이뤄졌다는 거예요.

 

진정한 선교적 교회의 모습은 교회 공동체 안에 먼저 선교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벽이 허물어진 거예요.

 

명단에서 주목을 끄는 인물은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이죠.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일부 학자들은 이 시므온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이 아닐까 하는 주장을 합니다.

이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은 마가복음과 로마서를 보면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가 당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시므온,

그가 후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되고

안디옥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그러한 하나의 주장이지만

또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 사회적 배경, 그러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동체로 있었던 것.

그것은 예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고

십자가로 그들이 어떤 모든 벽이 다 허물어지는 그러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세상은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교적 교회는 끼리끼리 모이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 예수님이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예수님이 아니라면

서로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선교적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기막힌 구성원들입니다.

 

당시 마태는 하던 일이 세리였어요. 세리는 매국노로 취급 받던 사람입니다.

그런 세리를 폭력으로라도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열심당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열심당원 시므온이 있어요.

누가 먼저 부르심 받았는지는 모르나 예수님이 부르셔서 소개했더니

바로 자기가 제거하려고 했던 그 정적이에요.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저 사람이랑 여기 같이 있어야 하나...

 

그런데 그들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뭐예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치적 성향, 사회적 배경, 경제 생활, 기질적 차이.

기질로 보면 이 베드로 같은 사람은 얼마나 급하고 단순하고 때론 열정적입니까.

 

그런데 속이 뭔지 모르게 그 머리를 계산하기 좋아하는 가롯 유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을 때 저 가난한 자에게 주면 수많은 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느냐..

계산이 빨라요. 그렇게만 생각했으면 정말 좋은데

그가 정말 계산한 것은 그가 돈궤를 맡고 있었기에

저것이 우리한테 오면 내가 가져올 수 있는데..

 

이렇게 계략적이고 모략적인 생각을 가진 유다와 베드로가

같이 어울릴 수가 없어요.

베드로는 마음만 좋으면 그 날 잡은 배를 다 줘버렸을지도 몰라요.

기분만 좋으면 오늘 잡은 고기들, 다 너 가져. 어떻게 보면 화끈한 스타일이죠.

 

가롯 유다는 절대 그런 일이 없죠. 그런 계산적 인물과 충동적이고 단순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함께였던 열두 명의 제자 공동체를 생각해보세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은 예수님 제자 공동체의 차이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이뤘던 구성원을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진정한 선교적 교회는 바로 우리 안에 선교가 일어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국제적인 도시였기에 이런 리더십이 구성되었다.. 그것이 아니죠.

엄청난 국제적인 환경 속에서도 같은 민족, 같은 기호에 맞는 사람끼리만

뭉쳐 있는 집단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고

진정한 선교가 그들 관계 속에서 먼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저희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선교가 일어나는 거예요.

십자가로 모든 벽을 허무시고 모든 장벽이 벽이 되지 않는 그런 교회.

어떤 벽도 없는 교회. 그런 교회가 선교적 교회입니다.

이런 안디옥 교회를 우리가 본받을 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2. 두번째 선교적 교회는

함께 기도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합니다.

 

선교적 교회라는 말을 들으면 정신없이 지치도록 외부적 활동만을 하는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이 함께 모여 예배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살아있었습니다.

 

워킹 타임 이전에 웨이팅 타임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금식하면서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기도하는..

그들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카누 목사님께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시면서 이런 코멘트를 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가 비뚤어지는 가운데

어떤 조직이나 행사를 중심으로 사람을 묶어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어서 회장, 부회장, 총무 등을 세워놓지만

사실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조직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모두가 회장 역할을 하고 필요하면 모두가 총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조직은 그저 흩어져 무너지지 않을 정도만 존재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형식이나 틀이 아닌 사람들 자체의 응집력으로 하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이 바로 합심기도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 조직의 생명력이 되는 것,

어떤 조직, 절차, 제도.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묶어놓는 교회가 아니라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며 금식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조직을 움직이는 공동체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될 때

그게 바로 사도행전적, 선교적 교회인 것입니다.

 

오랜 목회 경험을 통해서 고백하는 고백적 설교,

그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이 뛰어다니느라

조용히 앉아 기도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을 놓친다면 선교적 교회가 아니죠.

 

선교적 교회는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항상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미션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션이기 때문이죠.

성령님께서 이들에게 주시는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2, 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13:2. 그들이 주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

 

선교적 교회는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 놀라운 것은

그들의 리더십에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이라..

어떤 일을 맡겼는지는 아직 구체적이지 않죠.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했을 때

구체적인 장소와 위치는 순간순간 순종해가면서 들려주신 거예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말씀하시진 않으세요. , 우리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아프리카로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지역에 가서

첫째 날엔 무엇을 하고 둘째 날엔 무엇을...’

이런 식이라면 우린 숨막혀서 못하는 거예요.

 

가라, 그러면 일단 가는 거예요.

어디로, 누구를 만나라. 순간순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 다음 걸음을 연결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따로 보내심을 받도록 구별된 이들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일부였다는 거예요.

 

2절의 음성이 들린 이후에 3절의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바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고 그들을 보냈습니다.

 

온누리 교회 30년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설립 초기의 장로님들이 초기 선교사들로 파송됐다는 거예요.

온누리 교회 역사가 타교회 역사와 다른 점입니다.

 

온누리 교회가 선교적으로 안디옥 교회를 닮을 수 있는 유사점이

초기 장로님들이 선교사로 파송됐다는 거예요.

 

초기 선교사역을 하신 장로님들의 글이, 고백이 책으로 나왔죠.

두 권의 책 가운데 제가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한 권은 조성록 목사님이 소명을 받고 사역하신 것을 유은필 권사님이 쓰셨죠.

<은발의 소명자> 거기 보면 부르심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김영길 장로님 얘기도 나오더라고요.

처음에 장로님께서 군 장성으로 예편하신 후에 김영길 장로님이 창조과학회,

일본 창조과학회에 데려가신 거예요.

 

통역하시게 됐는데 일본어를 잘하시니까. 통역을 너무 잘하신 거예요.

주변 사람이 그랬다는 거예요.

이렇게 일본어를 잘하시는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실리 없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그랬다는 거예요.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로 탁 반대해버렸다는 거예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그 마음 속에 고백을 보면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거절했는데.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일본 선교사로 부르셨어요.

1994330일 조목사님 일기가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 누구일까 생각할 때

그 대상은 일본입니다. 내가 머지않아 생을 마치는 날을 생각하면서

일본인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들을 잘못되길 바라는 마음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략하고)

 

나는 일본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고 일본에서 선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후의 사명이라고 믿게 됐습니다.

 

양 국민이 서로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진정한 평화를 갖는 것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복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단 내렸습니다.’

 

사실 일본에서의 사역이 그렇게 녹록치 않았죠.

불줄기 같은 역사를 일으켰다고는 볼 수 없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이런 순종과 헌신과 발걸음 자체를 귀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분의 사역은 후배 일본 목회자들이 잘 이어받아 사역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온누리 교회 초창기의 리더십들이.

바나바와 사울 같은 그런 리더십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러나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는 것입니다.

 

두번째 장로님은 최선주 장로님이죠. 온누리 교회 팀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최선주 장로님이 치과의사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 선교사로 떠나시면서부터죠.

 

<선교는 나에게 축복이었다> 최선주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온누리 교회의 역사와 같은 이 책을 여러분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어요.

 

중국으로 가겠다는 마음만 섰지 정작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막상 떠나려하니 집착하며 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20년간 번창한 병원, 강남의 좋은 저택,

10여년간 가꿔온 경기도 광주의 농장들을 비롯해

자질구레하게 붙들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포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그때 체험했다.

특별히 애지중지 가꿔온 병원, 집보다도

경기도 광주에 그 아름다운 농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그런 마음으로 농장을 향해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그 복잡한 마음으로 깜빡 조신 거예요.

차가 부딪혔고 가족들의 팔다리가 부러지고

장로님도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는 교통사고가 났어요.

 

병상에 누워 말씀이 그리워서 우연히 읽었는데

그 말씀이 누가복음 1220~21절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의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네 예비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 말씀을 탁 읽으시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시게 된 겁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떠나시도록 준비해야 된다 해서 팀 기도 모임이 생기고.

7년의 준비과정을 통해서 중국 선교사로 떠나셨죠.

 

1994년 중국으로 떠나셔서 선인장을 재배하시며 비즈니스 사역을 하셨죠.

그때 추장로님을 도와 같이 선교하신 분이 박종길 목사님이세요.

 

온누리 교회 바나바와 사울. 두 분. 사진이 잘 나오네요.

기록적인, 평양부터 베이징으로 이렇게. 박수로 우리 한 번 격려해주십시오.

 

목회자가 설교하지 못하고 농부의 일을 한다는 것.

그때도 바나바처럼 사울처럼 사역하신..

지금도 최선주 장로님의 간증 제보, 얼마나 박목사님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요즘은 제가 깊이 은혜를 받고. 귀한 사역을 감당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온누리 교회 역사에서 이런 조성록 목사님, 최선주 장로님.

또 김영길 장로님 한동대 내려가서 사역하시고..

 

초기 장로님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쉽지 않았다는 게

너무 진실하게 고백하는 거예요.

 

사랑하기 힘든 민족. 떠나기 어려운 환경들을 떠나는 것.

그렇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이 순종하며 떠났던 것처럼.

그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그런 발걸음이 선교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면 저도 떠나야죠.

모든 것이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특징입니다.

 

 

3. 세번째 선교적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 영적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겁니다.

 

이 세번째 특징에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첫번째, 두번째 특징은 내면적 특징이죠.

그 공동체 안에 장벽이 허물어지는 그런 모습,

어떠한 차별 없이 장벽 없이 완전히 하나되는 복음으로 하나된 공동체.

 

그리고 성령님의 음성, 예배와 금식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들.

그리고 나서 세번째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놀라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이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키프로스, 바나바의 고향이죠.

고향이라서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당시 키프로스는 지중해 연안의 큰 섬입니다.

가장 큰 섬이고 무역도시이고 그리고 그 당시에 로마가

그 키프로스를 다스릴 때 비너스 신을 섬기는 그 여신을 섬기는

아주 타락한 부도덕한 도시며 총독 본부가 있는 곳에서.

 

그들이 바보라고 하는 곳이죠. 그 키프로스 섬의 수도 같은 곳이 바보입니다.

그곳은 마귀가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이에요.

그곳에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미신이 성행했습니다. 미신이란 언제나 퇴폐적 문명의 중요한 근거예요.

정치가들이 마술사들을 의지합니다.

고위 정치가들은 개인적인 마술가들을 고용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의사결정을 할 때 마술사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 마술과 그런 미신을 의지하는 시대. 그 지역으로 부르심 받은 거예요.

그곳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서기오 바울.

 

그런데 그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을 청했다고 했어요.

성령님의 역사가 놀라운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만 역사하시는 게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에게도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게 하십니다.

 

선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여기 나옵니다.

항상 내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면

하나님이 거기에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서기오 바울은 감정적이거나 치우친 사람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의 변증을 듣고 싶은 거예요.

 

주변의 그를 둘러싼 마술사들이 믿지 못하게 방해했어요.

엘루마라는 마술사가 총독을 방해했어요.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시니

그를 막을 수 없었어요. 사울이 엘루마라는 마술사에게 행한 담대한 말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3:9. 그러자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충만한 가운데

엘루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10. "이 마귀의 자식아! 너는 모든 의의 원수로다! 너는 갖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구나. 주의 바른 길을 어지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11. 이제 주의 손이 너를 치심으로 네 눈이 멀어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쳤고

그는 이리저리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사울이 성령충만해서 엘루마를 책망하자 귀신이 떠나가고

그리고 그에게 신비적 역사가 일어나고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어요.

다메섹에서 바울이 체험했던 것과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귀신이 떠나가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첫번째 두번째 요소가 없는 성령의 역사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 십자가의 능력으로 벽이 허물어지며 하나됨을 경험하고

예배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런 역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담대하게 마귀를 쫓아내며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거죠.

이를 통해 총독이 놀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12

이 일을 보자 총독이 믿게 됐고 주에 관한 가르침에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

 

놀랍게 믿게 되었다는 거예요. 미신과 악습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변화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온누리 교회가 선교적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는

우리 성도들을 통해 사회 각층의 분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들이

믿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선교적 교회는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요즘은 이상한 일로 교회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에 관한 가르침과 성령의 역사로 세상을 놀라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먼저 그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 서로 놀라게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 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 되는 거예요.

 

모든 믿음과 편견이 사라지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영적 하나됨을 보여주며 우리가 놀라야 합니다.

 

또한 예배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세상이 절대 들을 수 없는,

세상은 들을 수 없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으로 놀라는 거예요.

그런 놀라움이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귀신도 떠나가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통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선교적 교회는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안에 먼저

선교적 사명의 놀라움이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온누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적 교회로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성도들 간의 모든 벽이 십자가로 허물어지게 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예배 가운데 금식 가운데 주의 음성을 분명히 듣고

순종하는 저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통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들이 믿게 하여 주시옵고

미신과 세상 관습과 이 세상의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누리 교회가 지난 30년 간 선교적 교회로

지금까지 인도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됨의 역사를 지키고 계신 것에 감사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교회로 지금까지 사용하신 것에 감사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들이 믿게 되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영혼들이,

미신과 세상의 철학과 물질과 이념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주 앞에 돌아오는 일이

임하게 하신 것에 감사합니다.

 

더욱 더 온누리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주님 앞에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 앞에도 나타날 수 있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온누리 교회가 지난 30여년의 역사를 통해

안디옥 교회처럼 세계 선교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로 사용하여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세상에 있는 장벽이 무너지게 하시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리더십들로 세워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영혼, 세상에 사로잡혀 있고

미신과 우상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온누리 교회를 통해 예수님 믿게 되는

역사가 있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선교적 교회로 주님 앞에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소아시아 유럽의 복음화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은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안디옥 교회가 믿지 않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세계 선교에 쓰임 받는

선교적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J.H.W.

 

 

 


'분류 없음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적 타락 전에 영적 타락  (0) 2017.04.10
행복한 사람  (0) 2017.03.31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   (0) 2017.03.24
원수의 요새들을 파함 / 프랜시스 프랜지팬  (0) 2017.03.21
약함과 착함의 능력  (0) 2017.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