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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예술

LNCK 2017. 8. 19. 12:03

 

 

복수의 예술                      12:19~20                           16.06.26스크랩

 

복수심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제가 얼마 전에 TV에서 복수에 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이런 대사가 등장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왜냐면 오래 동안 고통 받아야 하니까요

 

공감이 가는 대사였습니다.

나에게 큰 잘못을 한 사람,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오랜 기간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사는 것은 큰 고통일 것입니다.

 

평생 이런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속극이나, 영화의 주제도 복수입니다

복수는 나의 힘

복수는 나의 삶의 의미, 목적이라고들 말하지요.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가장 강한 집념과 열정 중에 하나가

이 복수하려는 마음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그보다 더 7배나 더 갚아주고 싶은 이 복수심!

이것은 우리들의 본능이고 우리의 천성입니다.

 

우리 안에 복수심은, 일종의 정의감까지 곁들여 있습니다.

불의에 대해서 응징하고 싶은 마음,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의식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힘으로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악을 처벌하고 공의를 실현시키려고 할 때

오히려 우리는 악에 의해서 희생됩니다.

 

괴물과 싸워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다가,

우리 자신이 더 큰 괴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대신 심판자의 역할을 하려 할 때,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신뢰하지 못하는 신자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너희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죠. 12:19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대신 원수 갚아주신다하는 말을

별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원수 갚아주시는 것이 그렇게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원수 갚아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수 갚아주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죠.

 

먼저 하나님이 악을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동작이 매우 느립니다.

그래서 (심판이) 한없이 지체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속이 타고 터지게 만드십니다.

 

마지막에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시니까,

이 땅에서는 좀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판이 임해도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나가 떨어졌을 때나, 이제 심판이 임하게 되죠.

 

그동안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인간은 아주 편안하게 잘만 지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맡겨드릴 수 없이,

우리가 먼저 심판을 해버리려고 하는 것이죠.

 

또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주시는데, 악을 징벌하시는데

참 이상하게 징벌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셔야 할 텐데,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은혜로 갚으십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회개의 은혜까지 나중에 베푸셔서

구원까지 받게 하십니다.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한 그 인간, 아주 처벌로 받지 않고

이 땅에서 편안하게 잘만 살다가, 잘만 나가다가,

끝내 심판도 받지 않고, 회개의 은혜까지 받아서 구원과 영생까지 받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버리죠.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아주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회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가 행한 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회개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그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죠.

하나님은 꼭 이런 식으로 원수를 갚으실 것 같으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맡겨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손에 그냥 피를 묻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런 식으로 심판하신다.. 하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일어나는 시나리오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우려하는 것처럼

그렇게 헐렁하게 감상적으로 집행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탁월한 구원자이신 것은 믿는데,

하나님이 탁월한 심판자이신 것은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눈먼 사랑으로 가득해서

그의 공의와 그리고 그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불의와 그리고 우리가 당한 잘못과 고통

세상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은 다 잊어버려도

우리 하나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십니다.

우리의 원수에게 그에 합당한 진노하심과 심판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응징과 심판이,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 느릴지라도

그분의 처사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결국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해서 갚으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면

증오와 복수심에서 우리는 해방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손에 복수의 피를 묻히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 해석

 

하나님이 우리 대신 원수를 갚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수에게 복수 대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 위에 쌓아 놓으리라12:20

 

 

이 말씀을 어떻게 보면, ‘우리가 원수에게 선을 베풀게 되면

결국에 원수에게 더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더 교묘하게 복수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면서 속으로는

이놈, 내가 네 머리 위에 진노에 숯불을 더 쌓아두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쾌재를 부르면서, 앙갚음을 하는 것이 되겠죠.

 

원수에게 먹이고 마시면서

그 음식과 그 물에 독극물을 집어넣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런 해석을 반대합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우리들이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면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서,

그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된다.. 하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숯불이란, 그 원수들 마음 안에서 뜨겁게 일어나는 부끄러움, 수치를,

그래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해석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들이 꼭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베풀게 되면, 또 그들이 변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수가 친구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원수에게 선을 베풀게 되면,

그들이 우리를 더 우습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더 강퍅해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고,

자기 잘못을 오히려 정당화 할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우리들에게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잘못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달인들이기 때문이죠,

그들이 혹시 어떤 자책감을 느낄지라도 하나님께 스스로 용서받았다 하는

자작 위로와 확신을 갖는데 아주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원수 사랑에 감동해서 변화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게 감동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교하고 복잡한 그런 존재인지 몰라요.

인간을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숯불, 그 원수 안에 수치심이 뜨겁게 일어나서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 그걸 완전히 우리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숯불에 가장 자연스런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숯불이란 말이, 이런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뜨거운 숯불을 떨어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140:10

 

어떤 학자는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더 혹독하게

원수들에게 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선을 베푸는 것이 되기 때문에

크리스천의 정신에,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고

그리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과 완전히 상충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문맥과 딱 드러맞습니다.

너희가 원수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그리고 내가 원수 갚으리라하는 그런 말씀과 잘 연결되는 것이죠.

 

우리는 구약에서 이런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계속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다윗은 사울에게 원수 갚지 않고,

오히려 선을 베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을 심판하셨죠.

 

우리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베풂에도,

그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의 악함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이 그들 위에 더 맹렬한 진노를 쏟아부으셔야 할 이유가

더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원수에게 선을 베풀 때,

복수심과 앙심을 품고 선을 베풀라는 말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이죠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선을 베풀라는 것이죠.

원수들이 회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회개하든가 아니면

회개하지 않든가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죠.

 

그들이 회개하든/말든,

우리는 그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 생각할 문제

 

그들을, 우리들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불의와 잘못이 자동적으로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에게 잘못의 용서를 구할 때

그때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죠.

 

죄인이 회개하지 않아도 우리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라는 말은

반쪽만 맞는 말입니다.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았는데,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께도 없습니다.

 

그런 잘못을 범한 사람이, 뉘우치고 회개하고,

우리들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는데,

우리들이 먼저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들에게 없습니다.

 

회개치 않은 사람은, 우리들이 오래 기도하고 마음을 돌이켜서

그에게 용서하는 것을 오히려 짓밟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내가 네 잘못을 네 죄를 용서한다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우리들의 그 값진 용서를

오히려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들의 용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짓밟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용서를 그가 진심으로 돌이키고

우리들에게 용서를 비는 것을 교묘히 회피하는

타협안이나 절충안으로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람이 회개할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 하는

원한과 복수심에 계속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용서를 빌지 않더라도

복수심과 원한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원수를 계속 마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그리고 욕하고, 정죄하는 많은 죄를 범하게 되죠.

 

항상 원수를 묵상하고 우리는 살게 됩니다. 그래서 원수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용서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품고,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선을 베푸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지극히 사랑받으니,

하나님께 무한한 용서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영인 성령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그것이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신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하게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역사를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악에 대응해서, 우리도 악을 범하는데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행하는데

하나님이 과연 누구를 심판해야 할까요?

 

이렇게 용서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독한 증오와 복수심에 결박해서,

그 감옥에서 해방시키게 됩니다.

 

우리 영혼안에 퍼져가는 증오의 독기를 해독하게 됩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은,

원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피해도 입히지 못합니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입니다.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족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막혀서 우리들은 영적으로 점점 곤고해지고 피폐해 집니다.

우리안에 성령의 은혜가 소멸됩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악과 싸우다가,

악을 우리가 응징하려고 하다가

우리가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불의와의 싸움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잘못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원수를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고

그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정의를 위한 우리들의 싸움을 더 성숙하게 됩니다.

 

더 온유하게, 더 지혜롭게, 더 효과적이 됩니다.

우리들은 확실히 이기는 그러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하면, 우리가 그 악한 자의 수준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악을 불러올 뿐입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그리고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 대신 싸우십니다.

 

그러나 악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성령의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혈기로 행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의 보응의 원리로 우리들이 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갈등과 고뇌의 과정을 통해서 서서히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적과의 동거, 원수와의 동거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원수같은 존재들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마주치고 싶지 않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해야 하고,

계속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안에 용서의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그 인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괘심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전혀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낄줄 모르는 그 뻔뻔한 모습을 대하면,

용서의 마음은 사그라지고 다시 미움과 분노가 우리 안에 치밀어 올라옵니다.

 

그 원수가 처벌을 받기는커녕, 편안하게 형통하게 잘 되는 것만 보면,

더 열불이 치밀어 오르고, 하나님께까지 원망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들은 원수같은 존재들과 매일 더불어 살면서,

매일 이런 마음의 갈등을 겪고 그리고 새롭게 용서를 결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원수같은 미운 사람을, 우리들이 대할 때,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은 증오와 그리고 원한입니다.

 

이런 첫 번째 반응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고,

다음 순간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점점 수월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인 무신론자 니체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가르침은

인간의 자연스런 성향과 본성에 완전히 상충되는 것을 요구하는

위선적인 윤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은 인간 안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여정을 지나면서, 원수같은 존재를 만나며

그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원수 대하기

 

원수같이 미운 존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중에도 우리 아내와 남편이 서로 원수처럼 보일 때가 있고,

우리 자녀들이 잠시 원수같이 느껴질 때가 있고,

또 우리가 다른 이에게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원수들이 우리들에게 가하는 고통과 불의로 인해서

우리 삶이 비참해지고 그리고 우리가 망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와 그 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원수를 복수심과 악으로 대응할 때,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고

그 영화의 대사처럼 고통스러워지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되며 몰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와 악을 선으로 대응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수준으로 높아지게 됩니다.

 

원수를 선으로 대할 때, 가장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의 완숙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원수같이 민mean하고 미운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아름답고 존귀한 인간으로 성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예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인간적으로 용서하기 힘들고 미운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원하시죠?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는데 가장 거침돌이 되는 것이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를 성숙케 하는데,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전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 앞에 은혜의 향연을 베푸시고, 우리 잔이 넘치게 하십니다.

 

그 원수도 끌어안을 수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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