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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F 사라 배리 선교사 간증

LNCK 2018. 2. 19. 18:46

www.youtube.com/watch?v=j48vGK78Q4g

◈UBF 사라 배리 선교사 간증             요12:24               스크랩, 출처

 

International Mission Leader’s Charlotte Forum 2015

(장소 : 고든콘웰 신학교 샬럿 캠퍼스) May 15, 2015

   

※강사 소개 : 김아브라함 UBF 대표

 

제가 미스 사라 배리 UBF 원로 대표를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UBFMiss 배리를 마더 사라 배리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여러분과 한국 학생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헌신했습니다.

그 헌신을 통해 UBF(대학생 성경읽기회) 운동이 진행되면서 자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사라, 열방의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많은 사람들의 어머니로 만드셨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사용하셨는지

그의 증언을 통해서 듣겠습니다.

마더 사라 배리를 환영하겠습니다!

 

      

▣사라 배리 선교사 간증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함께 예배를 드리는 큰 특권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명령을 실천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합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드는 것!

우리가 함께 일하게 도와주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첫 번째로 내가 나눌 것은

내가 추구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나라

 

나는 축복을 받아 예수 믿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와 교회학교를 내 생애 통해 다녔지만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내가 방황하며 뜻 없는 삶을 살 때,

대학 2학년 때에 방향도 모르고, 나는 성경을 집었고,

나는 드물게 성경을 열었고 그리고 약1:5절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읽었습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나는 이것이 약속의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 주에 나의 친구는 장로교회 그룹 성경공부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했고, 로마서에서 나는 죄인임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내 마음에 받아들였고,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오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단 하나의 잣대가 됨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자라난 미시시피 하류 지역은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허용되었습니다.

내가 자라는 동안 나는 인종간의 갈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성경공부를 할 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은 마음, 불신의 상처 혹은 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고 멸시하는 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지 하나의 인종이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인종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똑같은 피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는 주일학교, 방학 성경학교에서 가르쳤고

가정선교, 장로교 캠프에서 일했습니다.

 

나는 성경과 스퀘어댄싱을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여러 활동은 내게 평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평화를 찾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께서 요14:27에 약속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통해 나는 깨달았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내가 많은 활동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님을요!

 

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퍼뜨리는 것 역시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국은 625 전쟁 중이었습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전쟁에 군인들을 내보내는 것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평화는 전쟁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복음의 군사들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자원운동(SVM) 서약서에 서명을 했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때에 그곳이 어디든지 저는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2. 나의 두 번째 점은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입니다.

Bible Korea and World Mission

 

이것은 UBF의 모토(슬로건)입니다. ‘성서한국과 세계선교!’

그 표어가 내 마음에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SVM 카드에 서명했습니다.

*Student Voluntary Mission Movement 선교사 서원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리치몬드에 있는 장로교 크리스천 교육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1년 수학한 후에 옥스퍼드 미시시피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사역자 직을 받아들이고 학생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거기서 섬길 때 예수님이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28:19~20

예수께서 명하시기를 세상 모든 나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리고 (몇 해 전) 나의 SVM 학생자발선교사 헌신서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로교 세계선교기관에 자진해서 지원했습니다.

어디든지 필요한 곳에 선교사로 가겠다고요!

 

나는 테네시 네쉬빌의 선교본부에 가서 선교사 자격시험을 치렀습니다.

선교본부 심리학자들은

내가 독신임을 이유로 결코 합격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독신은 불합격시킴

 

그래서 나는 남자친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1954년에 나는 한국에 가기 전에, 성경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납적 성경공부를 배우기 위해서 뉴욕에 있는 성경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고, 제가 성경을 잘 가르치도록 도와달라고

나는 또 한국어를 배우게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에는 방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언어(한국어)만 구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한국에 갔습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나는 요12:24 한 알의 밀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한국행은 배로 갔는데, *1955, 25

그 배에는 12명의 승객이 있었으며 한 달이나 걸렸습니다.

      

우리는 4마리의 비둘기를 새장에 넣어 갖고 갔습니다.

광주 크리스천 병원에 책임자인 하링턴 의사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던 분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또한 그의 일터에서...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집에서 기르는 비둘기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장에 가득한 비둘기를 우리들의 배의 우리 방에 두었고 (외로움을 달래라고?)

그러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들은 하딩톤 의사에게 주었는데, 그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광주에 비둘기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한국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나는 한국교회가 성경을 매우 존중함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한 가지로 되었고 한국말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국말로 되었고 한국인들은 일제하에서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성경공부입니다.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전도인으로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목표는 자립, 자치, 자전 (스스로 전도), 선교지향적 교회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축복하셨다고 믿습니다.

      

나의 첫번째 일은 주로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일 년 중에 일부는 광주에서, 일부는 서울에서 지냈는데,

그때 나는 표준 광주 사투리를 배웠습니다. 하하하

 

나는 전남 장로교 노회에서 농촌 전도를 할당 받았습니다.

광주지역에 선배 선교사는 플로랜스 룻 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한국 이름을 주었습니다. 배사라.

그녀는 나의 한국말 공부를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시골 전도를 소개했습니다.

 

나는 화순, 담양, 영광, 장성 일대를 다녔고

그리고 섬들은 배로 방문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전하는 한국 여인처럼 검정색 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나는 풀뿌리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가난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신앙이 그들을 유지시켜줌을 배웠습니다.

 

4년 후 (1959년에) 나는 첫 번째 텀을 마치고 시카고에 돌아와 있었고

나는 미국의 집에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있는 동안에 한국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 정부를 뒤집어엎었습니다. *1960419

 

내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는 한국 학생들이

예수께 오도록 돕는 것이 가장 긴급한 상황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1961년에 다시 한국 옴. 광주 대학생 사역 시작)

 

그래서 나는 도시로 선교 본부를 이동하고

기독교 학생 센터를 열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나는 이 사무엘(이창우 당시 전도사)을 만났습니다.

장로교단은 그에게 광주시내에 교회를 시작하게하고

그에게 학생들과 함께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목자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학생회관을 연지 바로 직후에 1961년 군사정변이 있었습니다.

군대가 나라를 장악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은 매우 실망했습니다.

 

많은 자들이 공산주의 동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적국에 합쳐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어공부반을 매일 오후와, 나중에 매일 아침시간에 열었습니다.

학생들은 영어를 배우기 원했고, 그래서 그들은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어로 공부했지만

소망과 비전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잉태되었습니다.

 

곧 그들은 영어보다는 성경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한국말로도 가르쳤습니다.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심을!

 

이사무엘 박사와 나는 40년을 함께 일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성경적 원리를 찾고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그저 들락거리는 <학생모임>을 만들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도를 하고 우리는 기도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제자도를) 가르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영어 성경반에서 7명을 뽑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열린 7명의 학생들이

매일 (리더) 기도모임에 함께 하게했습니다.

 

그들은 소규모 미팅이라고 불었습니다.

숫자가 조금씩 늘었습니다.

매일 기도모임에 많은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 리더기도회의 모토는 딤후2:15절 이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나님께서는 이 학생들을 통해서

마침내 UBF가 시작하도록 일하셨습니다.

 

그 해 학기 말에 전남대에서 매주 학생들이 인도하는 성경공부가
80개로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세상을 축복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대학생 성경 연구회

 

영어로는 University Bible Fellowship

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구원자이시며 또한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UBF는 학생들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한 지혜입니다.

 

당시 우리에게 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지근성인데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구호물품들이 한국에 부어졌습니다.

이것은 축복이자 저주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고아와 아녀자들을 입히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거지 근성이 자라났습니다.

미래의 지도자들인 젊은 남녀들은 가난했고, 운명론적이며 소망이 없었습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좀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

우리는 선교사를 동남아로 보내기를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선교사를 보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자 나라 미국만이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선교사를 보낼 수 있도록!

 

그러나 1964년 믿음으로, 우리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졸업생 김한옥 양을 제주 대학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바다 건너입니다. 제주도 섬에요

맨주먹으로 With our bare hands

우리는 한명의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를 지원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들의 점심값을 드렸고, 땅콩을 팔았고, 구두를 닦았습니다.

 

정요셉은 그 시절에 의대생이었는데, 그는 피를 팔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는 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를 우리를 독립하도록 축복하셨고, 선교사를 보내는 운동을 하게했습니다.

 

 

3. 세 번째 네 장막을 넓혀라‘  이사야 54

 
 "성서한국 세계선교 장막터를 넓혀라!"

 

나는 1964년에 두 번째 안식년으로 집으로 갔습니다.

네쉬빌 테네시 피디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밟았습니다.

네쉬빌에서 3일 되었을 때 저녁에 교회에 가는데 한 젊은이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를 매우 심하게 때렸으며 나를 범하려 하였으나 그는 실패했고

나는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이 고함소리를 듣고 경찰을 불렀고 나는 구해졌습니다.

나는 거의 죽음을 당할 뻔 헀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나는 석사 학위를 끝내고, 나는 두려움을 이기려고 몸부림쳤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셨습니다.

나는 치유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1965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함 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한국에 있는 장로교 선교회에 나를 서울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들이 허락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광주를 떠나게하면 UBF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옮겼습니다.

 

나는 서울로 가는 계획을 세웠고, 광주의 학생들은 서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서울에서 개척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서울의 학생들은 지식이 많아서 성경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 효제동 25번지 노랑색의 집을 빌렸습니다.

이 집의 위치는 서울대학교의 메인(연건)캠퍼스와 아주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영어공부반을 광고했습니다.

학교하는 길에 매일 학생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매일 아침 성경공부를 하고 학교로 갔습니다.

 

많은 의대생들이 영어 때문에 왔지만 성경공부를 위해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하셨습니다.

 

서울대 교양학부, 미술대학, 법대생들이 왔습니다.

많은 서울대 학생들은 진리와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노란 집에서 골목 뒤에 있는 조금 큰 집으로 옮겼습니다.

주소는 효제동 37번지입니다.

전형적인 한옥이었습니다.

우리는 방들의 칸막이를 헐고 바닥과 천정을 다시하고 큰 집회실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센터 뒤의 작은 방에서 거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큰 일을 하셨으며 우리 모두는 이 허름한 집에 함께 살았습니다.

 

서울 개척 기간은 시위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그들은 일본과의 관계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헌법을 싫어했습니다. 대통령도 싫어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있을 때마다 대학은 문을 닫았습니다. UBF는 성경학교를 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성경을 더 많이 배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국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젊은 여인들이 독일에 간호사로 나갔습니다.

몇 사람은 오늘날 UBF선교사로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어 굶주리는 한국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무엘 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UBF간호학교 졸업생, 선교사 훈련을 받고 독일에 평신도 선교사,

자비량간호사, 선교사로 가는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UBF독일 선교가 탄생되었습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그 일에 맞추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습니다.

UBF평신도 선교사들은 곧 기도와 고기 잡기(전도)와 일대일 성경공부하는 것을

뉴욕, 시카고, 워싱턴, 토레도, 그리고 크고 작은 곳에서 했습니다.

 

이 사무엘 박사 가족은 1977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나는 몇 달 후에 왔습니다.

그때 6명의 서울대학 간호학 졸업한 학생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학생들을 섬기기 위해서 시카고에 왔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그들은 직업을 가졌고

그들은 에븐슨에 있는 침실 하나의 아파트를 얻었고

6명이 한 방에서 산다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노스웨스턴 학생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대일 성경공부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그래서 UBF 고기 잡기 사역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UBF는 캠퍼스로 들어갔습니다.

한국의 UBF 또한 학생들을 고기 잡기 시작했습니다.

Fishing은 우리들의 프로그램으로 어디든지 자리 잡았습니다.

 

1985년에 이 박사와 그의 아내 그레이스는 러시아에 갔습니다.

그 시절에는 러시아는 우리의 적이었습니다. *냉전시대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러시아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러시아를 위해서 기도했고, 러시아 빵을 먹었고, 러시아 차를 마셨고

매주 금요일 밤은 러시아 기도의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 첫 번째 학생 선교사가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모스크바에 개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예를 계속해서 따를 때

하나님께서 평신도 선교사를 통해서 일하셔서

서울, 독일, 러시아, 미국에 개척을 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 요한 전 박사는 계속해서 세계 선교사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김 아브라함은 올간 주립대학 학생이었습니다. UBF 가정교회를 열었고

그는 계속해서 고기잡기를 했으며 지금은 시카고에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요셉 박사와 에스더 정은 광주 개척자인데 노인 선교사로 우간다에 갔습니다.

안 요셉 박사는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대사관에서 일했으며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UBF교회당들을 개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장막을 동과 서로 넓히게 하셔서 계속해서 복음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2002년에 하나님께서 이 사무엘 박사를 집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는 국제 UBF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전형적 지도자 유형이 아닙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80개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선교사들과 국가 리더들과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나는 (노쇠해서) 국제 대표직을 사임했고 전 요한 형제가 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김 아브라함 박사가 이었습니다.

 

UBF 개척시대에는 우리들의 방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이 깊이있게 성경을 대하고 예수를 믿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이단연구연합(Cult Awareness Network CAN)은 학생들을 빼내어 가고

젊은이들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타깃 삼고 이단이라고 몰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멤버를 빼내갔습니다
CAN은 거의 20년 동안이나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이 납치범들은 불법이기 때문에 후에 잡혔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했고 진실은 이겨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나갈 대에 공격이나 고발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우리의 진짜 문제는 서로 사랑하라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명령을 빨리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말씀에 따라서 행하십시다.

 

우리가 당신께 쓰음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역을 그의 교회에 주시고 모든 나라로 제자를 삼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고쳐 주시옵소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을 선생님으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KIMNET 모임을 축복하여 주소서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여 주소서

   소금이 되어서 예수의 복음을 세상에서 나누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공로패 증정 .................

 

우리는 매우 기쁩니다.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삶과 사역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감사패를 준비했습니다.

 

기독교 헌신 레거시 상

사라 배리 선교사에게 수여합니다.

UBF 원로 대표

 

당신의 뛰어난 주님을 섬김에

당신이 50년 동안 선교사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955년부터 2015년까지

그리고 1961년에 UBF를 설립했습니다. Univiersity Bible Fellowship

그리고 이 사무엘 박사와 한국 대학들에서

 

당신은 1977년에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부터는 국제사무실에서 지금까지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UBF를 키우기 위해서 당신을 한 알의 밀알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1700명의 자비량선교사를 99개국에 파송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모두들 일어서십시오.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시도록

우리는 당신 때문에 하나님을 보았고,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 패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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