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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7

복음의 능력 / 폴 워셔 (노르웨이 1/6)

LNCK 2017. 6. 1. 14:31

복음의 능력               고전15:1~3                     스크랩, 출처

 

폴 워셔, 노르웨이 집회  (1/6)                                    2/6



 

오늘 저녁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것이 제게는 매우 큰 영광입니다.

저는 새로운 곳을 처음 방문할 때마다, 장소에 상관없이 유럽, 남미, 아프리카

어디든지 반드시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축소되어 거의 없다시피한 날들과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복음을 5-10분 내로 배우고 더 대단한 것들로 넘어갑니다.

여러분이 신약을 이해하면 그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교회 내에서 조차

성경이 보여주는 그대로의 복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신앙의 선조들이 알았던 복음 역시 알지 못합니다.

 

복음의 심오함에 대해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시록과 재림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중요한 일이죠. 성경에 기록된 일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은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 재림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 여러분은 재림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영원히 천국에 거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그대로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은 사영리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알기 원하는 다섯 가지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책 몇 장에 담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보다 더 큰 것입니다.

 

철학적이면서 답해야할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는데

영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말이죠.

 

우리는 영원이란 무한대의 시간일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이라는 것을 알고,

영원이란 아주 기나긴 시간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현대 많은 기독교 노래들은 황금길과 진주문 등

천국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에 대해 찬양하지만

제 아무리 황금이 깔린 길과 진주로 된 문이라 해도

몇 백 년 후에는 따분해지기 마련입니다.

 

영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답해야 할 철학적 질문 중 한 가지는

무엇이 우리는 미치지 않게 할 것인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무한한 실존과 지속적인 삶 무엇이 우리는 미치지 않게 할 것인가?”

에 대한 답은, 천국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만족감을 제공하는 완벽한 곳이 아닌데

황금길과 진주문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요.

 

영원이란 무한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영원이 아무리 길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은 결코 고갈되지 않으며

그 영광과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에

주요히 드러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의 낮과 밤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물론 아는 바는 전혀 없지만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이럴 겁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입성해 하나님을 뵈면 이전에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것 같을 텐데

복음도 알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일들도 알지만

 

이전에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것 같을텐데 하나님의 강화하심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모든 것이 여러분을 파괴시킬 것입니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고 여러분의 지능과 사고가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침대에 가서 좀 누워야겠지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또 다른 비전을 보는데

전날의 것을 훨씬 더 능가하는 것으로

그것을 수용할 만큼 여러분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정말로 미쳐버리거나 여러분의 지능이 과부하로 폭파되거나

심장이 파괴될 텐데요... 너무나도 큰 영광 때문에요.

 

영원의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찾아내고

그분의 한없는 아름다움과 모든 탁월하심과 선하심을 발견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

그리고 우리를 얻고자 하신 일들을 통해 가장 크게 나타나 있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현대 기독교에는 특히 미국에서 전파된 많은 것들이

여러 나라의 기독교를 부패시켰습니다.

 

번영에 관한 복음, 안락한 삶에 관한 복음,

세속적인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쉽고 간단해진 복음..

 

이 모든 것들은 신성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저질러진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인 것입니다.

 

복음을 빼서 복음을 복음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복음에서 모든 영광을 빼버리고 복음을 재포장해

세속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한자라도 변경하느니

차라리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를 만지고 죽었을 것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대부분이 모두는 아닐지라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여기고 아마도 그리스도인이실텐데,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아시나요? 복음의 영광을 아시나요?

여러분이 만약 복음을 소유하셨다면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

 

일전에 한 번영주의 설교자가 번영에 대해 설교할 때

제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제가 불구의 몸이 되거나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감옥에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삶이 끝난다 해도 상관치 않는데

내게 필요한 모든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다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곳 노르웨이 집회기간동안 복음에 대해 살펴볼 예정인데

복음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특정 성경지문들을 살펴보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114절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4절은 바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사도 중 한 분이었습니다.

택함을 받은 이들 중 하나.

하나님의 대사. 너무나도 독특하고 특별한 방식으로요.

 

오늘날 많은 자들이 자칭 사도라 하지만

그들은 종교놀이를 하는 어리석은 아이들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도들이 있는데 그들은 신약에 나와 있는 열두 분으로

그들은 교회의 초석으로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으며

또 다른 초석이란 없으며, 이 사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분들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분들입니다.

스펄전 조차도 자신을 일컬어 설교자, 복음을 전하는 이라 말하며

높은 자가 되기 위해 수치스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펄전도 그렇게 말했는데 사도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아시겠나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들입니다.

 

마태복음 11:11.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도들이 있는데 그들은 시험에 넘겨져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고 복음을 위탁받았습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이란 여러 메시지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복음은 바로 메시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복음이란 기독교의 시작과 끝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이 점을 아셔야만 합니다.

 

한 가지 더 필히 아셔야 할 점은,

복음은 성경의 모든 장에 나와 있지만

성경의 모든 메시지가 복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매우 특정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과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들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는데

그것은 복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무를 지닌’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라고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그는 모든 이에게 빚진 자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 외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편히 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아닌 세상 모든 이들에게 긴급하고도

중히 전해야 할 메시지를 빚진 자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급박함을 아시겠나요?

 

그는 치유함을 설교하느라, 복 받고 잘 사는 것을 설교하느라,

긍정의 힘을 설교하느라 급박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급박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에게는 가장 귀중한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의 못 박히심을 전하는 것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신가요?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대다수의 현대 복음주의 TV설교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설교를 몇 달 간 들어도 단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것은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복음은 그의 모든 것이자

그가 생각하는 것이며 복음을 더 크고 폭넓게 이해하기를 갈망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내가 빚진 자라

여러분도 이곳에 계시고 그리스도인이니 빚진 자입니다.

여러분도 이 복음을 알아야 하는데 입을 열어 누군가에게

하나님, 복음, 성경적인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기독교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리고 그 활동들 중 엄청나게 많은 부분들이 전혀 쓸모없는 활동들입니다.

쓸데없는 짓이요.

 

왜냐하면 복음 전도의 사명은 원래 성경에 입각한 교리적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일인 동시에 복음을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소유한 자들은 복음의 선포자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해설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요점을 조목조목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바울은 이 복음을 누구에게나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 외에

또 다른 한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바울은 지혜자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고,

어리석은 자에게도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유대인에게 가서도 복음을 전했고, 이교도에게도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동일한 복음을요.

 

그는 복음을 재포장하지 않았고 더 잘 이해되고 쉽게 받아드리도록

복음을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손대지 마십시오.

 

복음을 한자라도 변경하거나

우리 문화나 여러분 문화에 맞게 재포장하면 어떻게 된다구요?

 

갈라디아서 18, 9. “저주를 받을지어다저주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에서 온 대부분의 사상들은 어떤가요?

복음을 변경했다 말할 용기는 없지만 현대인들을 위해 복음을 재포장할만한 충분한 용기와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위해 복음을 재포장할 만한 충분한 용기는 있습니다.

 

아니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럼 계속해서 15. “그러므로 나는바울은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만남, 복음과의 이러한 만남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15.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회심 전 바울은 이방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였습니다. 눈꼽만큼도요.

이방인은 개였고 언약 밖에 있는 자였습니다.

아마 이방인을 정죄하는 것에 열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에게로 가서 복음 전하기를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육은 복음을 부끄러워할만한 많은 타당한 이유들이 있는데

복음은 육적인 것, 인간의 교만함, 인간의 지성에 대립되기 때문입니다.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점은, 복음은 진정으로 구원에 속한 하나님의 권능이

틀림없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복음이 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저가 로마제국의 주()입니다. 로마제국은 신들로 넘쳐났습니다.

수백, 수천의 신들 온갖 종류의 신들이죠.

그 신들 대부분, 모두는 육체를 따랐고 육에 대한 애태움이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들과 신의 형상을 닮은 아름답고

강인한 남성 조각상들을 보는 이유입니다.

모두가 육을 따라 강인하고 과시적이며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이라고 하는 보잘 것 없는 한 유대인이 있습니다.

잠시 상상해 보세요.

바울이 강당 같은 철학자들의 모임장소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 모두는 토론중입니다.

 

그들 민족과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것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 앉아 잠시 듣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철학자들이 쳐다보니 유대인 하나가 있습니다.

 

그래, 뭐지?”

전부들 틀렸습니다. 모두 다 틀렸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다 틀렸습니다.

모든 면에서 다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틀렸습니다.

여러분의 문화도 틀렸고 현실도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한 유대인이 최고의 지적문화 사회의 사람들 앞에 서서

가장 정통적이며 강력한 문화의 무리들 앞에 서서 말하길

모든 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면 로마제국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된 이유 중 하나가 뭔지 아시나요?

무신론자란 이유에서였습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죠?”

,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란 이유로 처형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로마의 모든 신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로마인들의 신들은

신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실존하지 않는다구요.

 

이런 겁니다. 바울이 만약 오늘날 몇몇 설교자들처럼 이렇게 말했다면

, 선택하세요. 여기 여러분이 고려할만한 또 다른 구원자가 있습니다.”

 

바울이 만약 예수를 여러 구원자들 중 하나로, 많은 신들 중 하나로 말했다면

그리스도인 그 누구도 처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시겠나요?

모두가 행복했겠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국 토크쇼 아무데나 출연해서 예수는 여러 구원자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면

저랑 문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단 한사람도요. 절 잘 받아주겠죠.

 

하지만 제가 아니요, 부정관사가 아니라 정관사요

예수는 구원자들 중 하나가 아닌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분 외에는 다른 구원자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릴지 아시겠나요?
제가 얼마나 편견 투성이로 보일지, 제가 얼마나 오만한 말을 하는지.

 

모두가 자신의 신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신들을 바꾸고 교환하는 등 온갖 일을 다하며 모두가 좋은 시간을 갖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나타나서는 너희들의 신은 다 가짜야, 모두 가짜라구

사람들의 비난이 얼마나 쏟아질지 짐작이 되십니까? 어떤 공격을 할지도요.

 

바울이 육적으로 복음을 말하기가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이해가 가시나요?
하지만 전해야만 했는데, 사실이었으니까요.

 

모든 철학자들이 몸을 돌려 바울을 쳐다봅니다.

좋아, 재미삼아 그냥 이 자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구. 정말 재밌잖아

그럼, 참 신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봐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렇군

 

모든 사람이 그분을 대적하였고 모든 면으로 그분의 율법을 범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철학자들이 바울의 말을 들어줄만했고 도덕주의자들 역시 그러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인간과의 화목을 위해 신이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금기사항이 있다면 바로 이것인데

결코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그들의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영혼과 물체는 섞이지 않고 물질과 영적인 것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스적 사고방식에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가장 터무니없는 말이고 유대적 사고방식에서는 최고의 신성모독적 발언인 것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고?”

그가 누구지? 어디서 그런 일이 있었던거야?”

 

팔레스타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좋아,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기로 해서 왔는데 고른 곳이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땅이었다고?”

 

로마도, 스파르타도, 다른 어디도 아닌 팔레스타인을 골랐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왔으니 유대인들이 그를 섬기고 있을 테고

왕실에서 태어났겠군

그분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 갈수록 흥미진진하구만

뭐야? 어떻게 된 일이냐구?”

 

그분은 동정녀에게서 나셨습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생각 한 번 해보세요.

 

그럼 그렇겠지, 동정녀에게서 났단 말이지. 좋아 알겠고

그럼, 그 동정녀는 왕실 사람이었단 거지?”

 

아니요, 그녀의 남편은 목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역사상 단 한번 인간이 되어 오셨는데 가장 멸시받는 땅에,

목수와 결혼한 동정녀의 몸을 통해 오셨다는 말이군

맞습니다

 

좋아, 그럼 다른 건 또 뭐가 있지?”

그분은 완전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다고?”

로마인조차도 다른 로마인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는데 인간이 되어온 신이

자기 나라에서 자기 백성들과 완전한 삶을 살았는데

자기 백성모두가 자신들의 왕을 로마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지?”

그분은 죄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목격했을테지?”

아니요. 500명가량이 그분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전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 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요

 

그럼, 그분은 지금 어디계시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나?”

아니요, 천국으로 올리우셨습니다.”

 

저 그런데, 시저는 주()가 아닙니다. 예수가 주십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 바울의 말이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

 

그의 육은 이러한 사실들에서 뒷걸음칠 수많은 이유들을 갖고 있었는데,

바울이 살았던 세상에서 복음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러한 사실들에서 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결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사실과

바울이 철학자들과 함께였을 때를 포함해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들 중 몇몇이 그를 따라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초자연적 메시지라는 것과 함께 성령의 초자연적 거듭남의 역사하심이라는 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특히 복음을

현대 문화가 잘 수용하도록 만드는 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복음은 어떤 문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문화도, 로마문화도, 야만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권능으로 많은 이가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메시지를 붙들면 붙들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될 것이고,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복음이 죄인들과 맞설 수 없고 더 적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 분들은 지금 당장 제 말을 들으세요.

세상은 또 한명의 영리한 사람이 필요한 것도,

또 한명의 멋진 사람이 필요한 것도, 또 한명의 전략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 마음에 새기고 입에 담고

간절한 중보기도를 드리며 복음의 일점일획도 변경함 없이

담대히 복음을 선포할 자, 그가 바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어린아이들이 교회를 가지고 장난치려는 것이 지겹습니다.

전략가가 될지, 코미디언이 될지, 연예인이 될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지 결정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사울의 모든 갑옷들을 벗어던지고

복음의 매끄러운 돌을 집어 들고 가서 골리앗을 쳐서 없애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그분을 대적하는 세상 문화를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서 매번 듣는 또 한 가지는,

저는 Tony형제님과 같은 노방전도자는 아니지만,

저도 노방전도를 매번 했고 할 것이지만 저의 주요사역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노방전도자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모두가 제게 말하길 안돼요. 노방전도는 세상문화에 안 먹혀요.

역사공부 안하셨나요? 세상문화는 노방전도자들을 결코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요. 노방전도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조롱했습니다.

 

Whitefield를 그린 그림들을 본적이 있으신가요?

그에 대해 끔찍한 말들을 했습니다.

 

Jonathan Edwards, John Wesley 등등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왔을 때

비방자들이 와서 그를 비방하고 교회를 파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를 따름과 우리 메시지가 진실됨을 너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빌립보에서 고난 받은 것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바울이 빌립보가 아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가 빌립보에서 고난 받은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걸까요?

 

왜냐하면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

그의 등에서는 피가 나고 머리와 얼굴은 부어있었고

발목과 발은 족쇄에 묶여 있어서 너무나 부풀어 올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명확하게 성경적으로 전해질 때 사람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때

그곳에 그분의 권능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저는 해외 선교를 했습니다. 정글에서죠.

, 때때로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엄청난 일들을 목도했습니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적들을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제게 와서 이런저런 기적들에 대해 말한다면

저는 하품을 할 것입니다.

 

저는 기적들을 목격했고 정글에도 있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경이로운 일들을 보았지만

그것들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같은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제게 기적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말하세요,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보다는 현대 복음전도자들이 벌이는

온갖 종류의 속임수의 감상적인 순회공연을 보기 원하죠.

증명해 드리죠.

 

내년에 노르웨이에서 집회를 한다고 칩시다.

기사와 이적, 긍정의 힘에 관한 집회를요.

 

예약 가능한 가장 큰 집회 장소라도 인산인해를 이룰 겁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의 의미에 관한 집회를 한다 치면

운이 좋아야 200명 정도 모일 겁니다.

 

사람들도 많은 설교자들도 그리스도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권능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권능,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요.

 

복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가 행하신 일 안에 있는 능력을요.

그것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서 으뜸이 되어야 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나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것 안에 엄청난 능력이 드러나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우리의 묘사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은 여리고성과 같이 굳게 닫혀있어서 그 누구도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군인들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둘러싼 죄의 벽을 허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 전략을 총동원한다 해도 한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복음을 선포할 때 가장 크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에서 벗어날 때, 매춘부가 정결하여짐을 볼 때,

탐욕스럽던 사업가가 세상의 안녕을 염려하는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볼 때,

아버지가 되지 못할 것 같던 자들이 훌륭한 아버지 역할들을 감당할 때

그것이 능력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기사와 이적 등을 가장 많이 행했던 사역자들 대부분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도덕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그들 다수가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내재된 하나님의 능력

1:16.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바울이 단지 정죄에서 구원받았음을 말한다 생각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 마십시오.

구원을 세 가지 시제에서 보시기 바라는데 복음은 이 시제들을 넘어선 우위의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죄의 정죄함에서 벗어났고 복음이 그리하였습니다.

죄의 정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둘째, 복음은 지금 현재도 그리스도인을 죄악의 힘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복음을 통해 더욱 거룩해질수록 죄에서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세상과는 같지 않아집니다.

 

셋째, 언젠가 그리스도인은 영광스런 복음을 통해 완전하게 죄에서 벗어나

영화로운 몸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여러분이 천국행 티켓을 받았으니

계속 거룩치 못한 삶을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복음과 믿음으로 한번 구원받았으면 복음으로 인해 변화되고

복음 안에서 더욱 거룩하게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 칭의의 증거는 성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아는 까닭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실 줄을 아노라

하신 말씀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계속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개인적으로 복음이 저를 이렇게 구원하기 원합니다.

 

복음이 저를 지옥에서 건져내셨다는 것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복음을 연구하고 또 읽는 걸까요?

우선, 제가 복음 안에서 큰 영광을 발견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저는 제가 물 위를 걷거나 기적을 행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에서 자유로워지기 원하고 아내 사랑하기를 그래야 할 만큼

자녀 사랑하기를 그래야 할 만큼 형제와 자매 사랑하기를

그래야 할 만큼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가 내 자신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충만하기 원하고

내 삶을 다른 이를 위해 비우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며

정결하고 흠 없고 순전하기 원합니다.

 

복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서 이같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신학은 제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니 젊은 분들이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학에 대해 자주 말하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때때로 엄청난 신학적 논쟁을 주고받는 자리를 지나다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Paul 형제님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전 그저 제 아내를 사랑하려합니다.”

 

전 정결해지기 원합니다.”

그분의 보혈로 제가 깨끗해진 것은 알지만 삶의 일상에서도 저는 정결하기 원합니다.

순전하기 원하고 심지어는 내 대적에게도 선한 생각을 품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같이 되고 싶고 자질구레한 값싼 장신구들을 원하는 것이 아닌

금을 원하는데 나의 주인 되신 분을 닮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가 아닌가요?

그는 달려갔습니다. 무엇을 향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을 향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향해.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에 여러분이 정말 꼭 아셔야 할 것이 있는데,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그 말은. 때때로, 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참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속도와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이요.

 

역사나 우리의 삶 속에서 회심한 이들 중

한 번에 빨리 성장하는 이들도 보고 또한 힘겹게 더디 성장하는 이들도 더 많이 봅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 속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러한 일들을 보아왔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강인한 사람도 연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배제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여기에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가장 나약한 성도라 할지라도 성장해 나가고,

가장 나약한 성도라 할지라도 구원을 경험해 나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죄나 정죄함에서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더욱 거룩한 삶으로의 행보를 위해 점진적으로 죄에서 더 많이 자유로워집니다.

 

이곳에 모인 많은 분들이 영적으로나 그리스도를 닮음에 있어

저보다 훨씬 더 나은 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데,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쁨은 저 또한 그런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격려이기 때문이죠.

 

제 삶을 보면 제가 아주 조금씩 변했을 진 몰라도

지난 30년간 저는 계속해서 변해왔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의 저는 텍사스 대학 도서관에서 주님을 만났던 그 시절의 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곳에서 저를 구원해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에 확 변화된 삶을 사는 이들만이 참된 신자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세속적인 신자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분이 일을 시작하시고 마무리 하십니다. 진심으로 믿는 참된 신자들에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누구나, 모두가 변화될 것입니다.

 

1:16. “모든 믿는 자에게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것에서 무엇을 알 수 있나요?

 

복음은 바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였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 형제자매여러분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판별하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위에 둡니다.

 

그가 윤리 도덕을 가르친다 해도 그의 설교는 윤리나 도덕을 넘어선 복음일 것입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결혼, 거룩, 기도, 금식, 어떤 것을 가르치던 간에

그는 복음을 제일로 할 것입니다.

 

그가 믿는 자들을 고무시키는 모든 것은 복음에서 시작해서

복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복음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기쁨은 복음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신 일들이죠.

 

하지만 그가 다른 많은 것들을 하며 복음을 마치 이유식처럼 취급하고

더 대단한 것들로 넘어가는 것을 보신다면 그에게서 달아나십시오.

그에게서 도망가십시오.

 

그럼 좀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5장으로 가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것이라 믿는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분들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하시면 되고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말하는지 보세요.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나요?

믿음의 형제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복음을 나누고 또 전했는데

다시 돌아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전한 복음을 그들에게 다시 알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성화의 성장 안에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대한 지식이 점점 더 커지고

 

그 성화의 과정에서 이미 얻은 것을 유지해 나가는데

복음을 떠나 새로운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전 것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복음을 붙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로워야 하고 선행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며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말하길 항상 복음을 전하되 필요할 때는 말을 사용하라

진리가 담겨있는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사도들의 사역과는 상반됩니다.

 

제게는 선교가 완전히 제한된 나라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기독교가 출입금지인 이슬람 국가에서죠.

그는 진실 된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합니다.

 

그가 선교지에서 이웃들을 방문했을 때

그보다 먼저 와 아주 오랫동안 사역을 한 선교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웃주민들 모두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이슬람교도 모두가 그가 얼마나 멋지고 친절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지만

 

정작 예수에 관해서는 아는 이가 한명도 없었는데

그 선교사가 입을 열어 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되려는데 선교지에 가서 단지 사람들을 친절히만 대하고

복음전파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하실거면

제발 자신의 시간도 후원교회 선교비도 낭비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것이 모든 지옥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번영, 친절한 사람이 되는 법, 아내를 사랑하는 법,

기적을 행하는 법을 가르칠 때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게 호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입을 열어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말하고 예수 외에 다른 신은 신이 아니며

그보다 먼저 오거나 나중 온 자는 모두 거짓 선지자라는 말을 할 때

십자가에 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제가 저희 교회 설교를 위해 보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의 1,2장으로 여러분을 모시고 간다면

바울은 거의 매절마다 복음에 대해 말하고 전하고 말하고 전하고 말하고 전합니다.

 

그것이 사도들의 사역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여러분께 도움이 될 만한 또 다른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몇 해 전 제가 페루에 있었을 때 한 젊은이의 전화를 받았는데

페루에 와서 저와 함께 사역하고 싶다고 했고 저는 좋다고 했습니다.

 

본인 성경공부는 어떻게 하시나요?”

성경공부는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요. 그냥 페루에 가서 제 삶을 바치고 싶습니다.”

 

본인의 설교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설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냥 페루에 가서 제 삶을 헌신하고 싶습니다.”

 

중보기도는 얼마나 하시나요?”

중보기도가 좀 약해서요. 그냥 선교지에 가서 목숨 바쳐 일하고 싶습니다.”

 

젊은이, 페루에는 자네 목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들은 예수가 필요하고 누군가 입을 열어 그들에게 예수를 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네.”

 

만약 우리가 지난 2000년 동안 사람들에게 좋은 일들만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면 단 한명의 그리스도인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2000년 동안 순교의 제물들이 되어왔는데

입을 열어 세상이 잘못되었다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며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공격적이고 냉소적이며 분노에 차서는 안되지만

우리는 입을 열어 그들에게 진리를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러면 설령 우리가 친절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우리를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험악하고 매정한 사람이라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반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의 일부입니다.

 

고전15:1.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이 말이 뜻하지 않는 바를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 이것을 세계 각국에 퍼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2분이 채 안되는 시간을 나누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께 지금 마음에 와달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

이 기도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시겠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일생에 한번 이렇게 조물주에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구원받았다 여기며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예수를 마음에 초청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빈껍데기 신앙고백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가 행해진 방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는 당신이 죄인이란 걸 아십니까?”

라고 대답하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대답한 사람은 의미도 모른 채 라고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걸 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죠.

 

마귀에게 가서 죄인이냐고 물어도 그렇다고 할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한 사람의 말뜻을 알 수 없는데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죄를 자랑하고 누가 더 큰 죄인인지에 대해 떠벌리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느냐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당신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시어

당신이 사랑했던 죄가 미워지고 자랑하던 죄가 부끄러워지며

붙잡혀있던 죄에서 자유해지기 원하십니까?”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천국에 가고 싶으신가요?”

 

아니요, 전 정말 지옥가고 싶거든요.”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셔야 할 것은 모두가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이론과 철학과 사회 재건주의가 말하는 모든 것이죠.

모든 사람은 천국에 가려하거나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 갔을 때 하나님이 그곳에 안 계시길 바랄 뿐이죠.

 

그러므로 천국에 가고 싶으세요?”가 질문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부터 성령님께서 당신의 삶에 역사하시어

당신이 사랑하지 않던 하나님을 이제 사랑하십니까?”

 

당신이 찾지 않던 하나님을 이제 찾고 알기를 갈망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당신 마음에 초청하십니까?”라고 묻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사도적 명령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회개의 열매와 회개의 흔적과 믿음의 표시를 보이며

회개하고 믿는다 말하면 용기를 북돋아주십시오. 잘했다 칭찬해 주세요.

 

만약 당신이 진실로 회개하고 진실로 믿으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경고하십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회심했다는 증거는 계속해서 그분과 함께 걸어갈 것이며

그분을 계속해서 신뢰할 것입니다.”

 

“20년 전 당신의 회개의 증거는 오늘도 당신이 여전히 회개한다는 것이고,

20년 전 당신이 구원 아래 있음을 믿는 증거는

오늘도 당신이 여전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난 감기주사 맞고 예방접종했으니 괜찮아.”는 복음이 아닙니다.

영접함의 의미는 우리의 인생을 그분께 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미국에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해야하지만

()로는 아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보여드릴 것이 있는데 로마서 10장으로 가시겠습니다.

반드시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해야하지만 주로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로마서 109-10절을 문맥을 무시하고 사용하는 이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보세요, 예수를 구원자로 시인하나요?

아니요, ()로 시인합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점을 아셔야 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와 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로 영접합니다. 누군가는 하나면 된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주()이자 구원자입니다. 그것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과 그분의 주권에 완전히 굴복해야하는 것을

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바는 이것인데 성경 전체를 보면

그분은 구원자이자 주()신데 여러분은 그분께 매달려 그분을 신뢰해야합니다.

 

여러분의 의지로 마음으로 그분을 주라 고백하고

이제 내가 그분을 따르기 원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실패했을 때 고백도 하지만

여전히 그분을 주()로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로 여길지라도요.

 

그런 잘못된 생각을 떨칠 수 있는 또 다른 지문인

요한복음 1장으로 빨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이 암시하는 바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일반적인데

우리는 이 말이 원칙적으로 유대인에게 하는 말임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 자기 동족들이죠. 동시에 전 세계인을 아우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생각은 그분이 유대인에게,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구약이나 예수님 당시 시대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유대인들이 누구를 기다렸나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가 구원자였나요? 그렇습니다.

또 무엇이었나요? 왕이었습니다.

 

아시겠나요? 그는 절대 권력을 지닌 왕입니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19:14)

아시겠습니까?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은 그분을 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인으로요.

로마서로 빨리 돌아가 보여드릴 것이 있는데요.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특히 미국에서 그렇습니다.

복음주의 캠페인에서 사람들은 앞에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고

뒤돌아서서 모든 회중들에게 예수를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게 이것입니다.

물론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반드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이해해야 하는데 본문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본문을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로마서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이것 입니다.

유념하세요, 예수는 주()입니다.

 

로마제국에서 누가 주()였나요? 시저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믿고 진실로 그리스도를 주(), 구원자로 믿는다면

구원을 받았으며 여러분의 구원이 진실임을 믿을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그분을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을 치르는 일이라 할지라도요.

 

우리가 얼마나 이 구절을 잘못된 의미로 왜곡했는지 아시겠나요?

바울이 말하는 바를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로마에서 일하는 목수들이고 수많은 불신자들과 섞여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밖에서 모두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우리가 짓고 있는 건물 밖 언덕 위에서요.

 

그런데 갑자기 쿵쿵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떨리는 맘으로 올려다보니 한 무리의 로마 군병들이 향불이 타는 제단을 들고 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일어납니다. 불신자들은 일어나 그 제단을 향해 올라가는데 별일 아니죠.

그들은 향을 조금 집어 들고 불에 던지며 시저를 주()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인 중 한명을 강제로 그곳에 보내는데

한 번도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 자로 교회의 분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자이죠.

 

그는 눈치를 보다가 향을 집어 불에 던지고 시저는 주()라 말하고

자리를 뜨는데 교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이죠.

 

로마 군병들이 또 한명의 교인을 창끝으로 밀어 그곳으로 올려 보냅니다.

친애하는 그리스도교 형제여, 시저가 주()라고 고백해!”

“Kyrios Jesous”

예수는 주()십니다.”

 

그를 처형하고는 또 다른 교인을 올려보냅니다.

예수는 주()십니다.”

 

또 다시 처형합니다. 또 다른 교인을 그곳에 올려 보냅니다.

예수는 주()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이것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아시겠나요?

 

그들이 말하는 영접의 의미는 영접기도 후에 뒤돌아서서

교인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죠.

그런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되고 구원받은 믿음의 증거는 생명을 치를지라도

그분을 고백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계시록 3장으로 빨리 가보겠는데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스펄젼(Spurgeon)을 포함해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그리스도를 영접함을 설명하는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학이 아주 훌륭했다고 해서 이것이 적절한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이 본문이 오늘날 사람들을 속이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사용됩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식입니다.

, 지금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그분 목소리를 듣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을 마음에 초청하면 그분이 당신 마음에 오십니다. 지금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냥 그분께 와달라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제가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

 

알겠습니다. 제가.. 저를 따라하세요.”

그러죠.”

 

예수님, 저는 당신이 구원자임을 압니다.” - “예수님, 저는 당신이 구원자임을 압니다.”

저는 제가 죄인임을 압니다.” - “저는 제가 죄인임을 압니다.”

당신을 제 맘에 모십니다.” - “당신을 제 맘에 모십니다.”

아멘” - “아멘

예수님이 마음에 오셨나요?”

 

영접기도를 따라한 불신자는 때로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물론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오셨죠. 그분이 약속하셨어요.

당신이 예수님을 마음에 와달라고 하면 오신다구요. 오셨다니까요.

그 믿음 위에 서면 된다구요.”

 

성경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아시겠나요?

그것은 올바른 게 아닙니다, 형제여러분.

결코 아니죠, 바른 것이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만약 누군가가 구원되었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그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러분께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 안에 있는 성령님을 증언하지 못할 때

여러분이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을 증언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 안의 하나님의 영이 다른 사람을 위해

아바아버지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성령이 거하고 있는 사람이 아바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끔찍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럼, 잠시 본문을 보겠는데

우선, 문맥은 복음전도나 죄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문맥은 예수가 라오디게아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배제되어 있었고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던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기에

볼지어다이곳에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발췌할 때 조심하시기 바라는데 전후관계를 무시할 수 있으니까요.

본문을 어떻게 설명할지 보시겠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부르시나요?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예수님은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를 부르십니다.

, 그렇습니다. 그분은 복음을 통해 부르십니다.

 

우리는 일반 부르심과 특별 부르심에 대해 하루 종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이 전해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께 오라 부르신다는데 동의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온종일 하나님은 완악한 인간들을 향해 손을 펴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온종일.

 

이스라엘에게 그리하셨고 오늘날에도 그리하시며 노르웨이와 미국에게도

그리하고 계십니다.

온종일, 심판의 날 이제는 충분하다시며 팔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부르시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듣고 청종하면, 순종으로 청종하면,

누구든지 그리하면 그분께 오는 그 누구도 내쫓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Paul형제님, 당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는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또한 저는 우리는 반드시 결단해야 하고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반드시 믿어야 하고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나요?

당신은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와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이

구원을 견고히 한다고 굳게 믿지만, 저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 누구도 그럴 수 없는데, 당신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결단해야하고

반드시 회개하고 반드시 믿어야하고 반드시 이러한 말씀들을 행해야만 합니다.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않고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요.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누구든지,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오면 그분은 그를 내쫓지 않으십니다.

20.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방식을 상상해보시면

이런 상황을 예시합니다.

 

여러분이 집에 있는데 방금 집이 파괴되어 아수라장이 되고

마치 죽음과 파멸의 공간이 되어버려 인내심은 바닥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 상황 이해했어요.”

, 여러분이 문만 열면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럼 제가 상황을 좀 바꿔보죠.

여러분은 난장판이 된 집을 치워야겠다 생각하는데 이제 주님이 오셨으니

인생 폈고 모든게 대박이니 얼른 문 열어야지 하고요.

 

그런데, 당신이 문을 열려는 직전에 문 밖 예수님의 헛기침 소리를 듣습니다.

... 손잡이를 만지기 전에 알아둘게 있다. 그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는데

네 주인으로 말이다. 들어가서 저것, 저것, 저것, 집도 내 것이고

너와 모든 것이 내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내가 들어가면 너의 주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 인생에 예수님이 오신 증거는 그가 당신과, 당신이 그분과 먹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정말로 영접했다는 증거는

당신이 그분과의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설교자들은 매번 그 점을 빠뜨릴 수가 있나요?

기억하시나요?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나는 너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함께 걸은 적도, 아무런 유대관계도 없었다.”

내게서 떠나가라. 스스로 내 제자라 일컬으며 내가 따르라 한 적이 없는 것들을 따르며 살아온 자들아

 

아시겠나요? 이 본문을 삽화처럼 쓰셔도 됩니다.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요.

설령 그렇다 해도 조심하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본문은 교회에게 쓴 글입니다.

 

수신자가 교회라는 것을 인지하세요.

하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본문을 발췌해 성경을 왜곡하지만 바르게 설명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1.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선 것이라

이런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과

오직 복음의 말씀 때문이며 또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의 말씀을 믿고 큰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서 있는데 그분의 복음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와 넌지시라도 참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넌지시 자신이 천국 가는 것이 자신이 행한 선행 때문이라 말한다면

그는 구역질나고 역겨운 자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아닙니다.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나의 선행과 공로가 아닌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갈 것은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 주장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니라, 영광 받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가지,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서 나와 확신한 한 가지는

구원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인데,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고서는

그가 고래의 뱃속에서 나올 길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 말하며 그가 자랑할 것이 없는

유일한 종교인데 그가 천국에 가는 것은 타인의 노력 때문인데,

바로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를 구원한 이는 그의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자랑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적절한 말이 없죠.

 

그저 그분이라고, 예수님이라고, 그리스도를 높여드리고 싶지만 걸맞는 말이 없죠.

그 어떤 말도 충분치 않죠.

 

누군가 당신도 그럴만하다는 언급만 해도 그를 내쫓습니다. 아니요.

저는 제 아이들을 보면 축복을 느끼는데, 때때로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있잖아요, 아빠. 오늘 진짜 즐거웠고 너무 멋졌어요. 이렇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 기쁜데, “얘야, 예수님을 알기 전 아빠는

못난 짓만 골라 하는 사람이었단다.

하지만 아빠가 이처럼 변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아빠를 대신해 피 흘려주셨기 때문이란다.

모든 것이 그분의 공로란다.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은 그분이란다.”

 

고린도전서 151-2.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질문 하나 하죠. TV에 출연하는 대다수의 현대 복음주의 설교자들께 묻고 싶은데

언제부터 구원이 충분치 않게 된 건가요?

 

제가 만약 잃어버린 영혼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들 중 하나가 제게 와서는 번영,

긍정의 힘, 치유 등 온갖 것들을 약속을 하기 시작할 텐데

그럼 저는 그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당신의 예수님은 꽤 보잘 것 없나보군요. 이런 하찮은 것들을 더해 제게

확신을 주려하다니요. 그분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지 않나요?

예수 외에 축복이나 기타 다른 것들을 더해야만 제가 올 것 같은가요?”

측은하지 않나요?

 

아무 것도 아닌 그런 하찮은 것들로 저를 꾀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때로 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 안가서 행복하지 않으세요? 그걸로도 부족한가요?”

 

난 지옥 안간다구요. 지옥에 가야 할 내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구요.

그분이 내 일생과 영원에 이르도록 다른 어떠한 일도 내게 행치 않는다 해도

기뻐 어쩔 줄 몰라야 하는데 지옥에 안가니까요.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행복하세요?” “전 구원받았거든요.”

, 그렇지만 당신은 고난 중에 있고 이런 저런 문제도 있고

몸은 고통에 시달리고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도 많은데 왜 행복한 거죠?”

 

전 구원받았거든요. 제가 구원 받았다구요.

얽매였던 예전 죄악에서 벗어나 구원되었고

괴물 같던 저를 사람 만들어 구원해 주셨어요. 그게 이유에요.

 

죄의 감옥에서 끝날 것만 같던 우리 인생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을 하루 종일 경배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여기 계신 많은 분들 사이에서도 믿는 자의 타락, 구원의 상실에 대한

이런 저런 논쟁이 있다는 걸 아는데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는 자가 타락할 수 있다고 믿는 분들은 믿는 자를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크신 약속을 때때로 들을 필요가 있고

하나님이 믿는 자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 분들도

이것을 들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만약 당신이 인생에 한번 예수를 마음에 모시기로 결단하여

그분이 당신을 구원해주셨다 생각하고

몇 년 후 약간의 관심 외에는 그리스도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완전히 멀어져 명목상 그리스도인이지만 구원받았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 마십시오.

 

이유는 당신만 빼고 우리 모두가 아는 한 가지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성도의 견인입니다.

 

당신은 믿음의 여정을 지속하고 당신은 계속해서 회개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제 말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여러해 전 회개하고 구원받은 증거는

오늘도 당신이 여전히 회개한다는 것이고

오래전 한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증거는 오늘도 당신이 여전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전 한번 당신이 회개하고 믿고 난 후

이 모든 것에서 완전히 멀어져 한 번도 열매 맺은 적도

믿음 안에 계속 거하지도 않는다면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자신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요.

자신이 성경을 신뢰하고 말씀 위에 서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칭의의 증거는 진행 중인 성화로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15:3. “내가 맡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내일은 복음에 대해 심도있게 살펴볼 예정이며

앞으로 며칠간도 그러하길 희망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은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저는 설교 당일에는 쉬지 않는데 전혀 쉼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무 생각않고 모든 걸 멈추고 푹 쉬시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날은 다른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됩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고 그 짐을 벗을 때까지요.

 

저는 해산을 합니다. 그 정도로 중대합니다.

제가 말씀을 분명히 전달하지 못하면 부담을 느끼고 힘겨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입니다.

복음보다 더 크고 힘든 메시지는 없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바울이 누군가가 알기 원했던 첫 번째는 복음 안에 그들이 서 있다는 것이었고,

바울이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했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으며,

바울이 누군가에게 계속 가르치고 싶어 했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나요?

강대상이나 TV, 다른 모든 곳에서 너무나도 많은 설교들이

실제로 몇 달의 시간이 흘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심, 우리의 죄를 장사함,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심,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겪으심, 죽음에서 부활하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심, 믿음으로 회개하라는 부르심은 거의 듣기 힘든 말씀이죠.

 

노르웨이가 복음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노르웨이도 미국처럼 복음에 무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의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를 마치 제 조국처럼 둘러봅니다.

노르웨이의 몇몇 설교자들이 여전히 복음을 전한다고 들었습니다. 강대상에서, 거리에서.

 

하지만 노르웨이도 미국과 같은 복음이 선포됩니다. 너무나도 많이요.

부분적으로는 미국에서 흘러온 너무나도 많은 시온의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들을 배운 것인데

그들은 많은 회중들에게 설교를 하지만 복음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여, 이 집회에서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이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곳에서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복음에

더욱 선명한 빛을 비추는 일을 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르는 분이 이곳에 계시다면 지체하거나 미루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믿어 이 시간이 그들의 구원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 당신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고 있는

헛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피로 소멸하여 주옵소서.

 

가치 없는 값싼 것들을 버리고 그들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음에서 부활하신 일에 고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타자 : L.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