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의 기쁨 스크랩, 출처
A. W. 토저 <하나님을 향한 열정> Delighting God 中
하나님을 아는 일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인생은 하찮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중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 마음에 힘이 됩니다.
인생이 진지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까?
-어떻게 하면 난파선 같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구해낼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영혼을 재앙에서 구할까?
하는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라고 권했습니다.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했으므로, 나 Tozer 같은 사람도
오늘날 비록 작은 소리이지만,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구해내려고 한다면
날마다의 삶에서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문제 제기
◑1. 첫 번째는, 우리의 하나님의 인식이
성경의 하나님에 부합해야 합니다.
내가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기도하며 관찰한 바에 의하면,
오늘 날 종교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의 뿌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인식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하나님이 충분히 크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아무리 자주 언급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능력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그 분의 모습을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나 토저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이 워낙 방대한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 구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는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에 기초이십니다.
그 분이 전부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분을 ‘크신 하나님’으로 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더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이 시대는 잘났다는 ‘사람’들이 크게 보이는 시대입니다.
그들이 크게 보이면, 하나님은 자꾸 작은 분이 되십니다.
교회에서 각종 집회를 열어도
그곳에 그 분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 분의 종(사람)들만 보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영웅 숭배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메시지 전달자를 자꾸 크게 만드니까
메시지가 작아집니다.
원래는 메시지의 그늘에 가려서,
메시지 전달자(메신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목적에 따라 일하시고
그 분의 계획들을 집행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을 제한하고, 그 분에게 지시하며
그 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놀랍고 강력한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면
다른 잡다한 말들은 필요 없어집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분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영이십니다.
그 분의 위엄을 깊이 묵상하면
인간의 모든 달변은, 깊은 침묵으로 빠져듭니다.
우리가 ‘두려운 신비’라고 부르는 그 분께
합당한 찬양을 드리기에는 인간의 달변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아주 유창하게 말하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내 기도가 유창할 때, 그 기도에서 얻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나의 달변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소통하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경배의 불충분함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경배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 분의 존전에 나아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엎드려 그분을 경배할 때
거룩한 분 앞에서 나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나같이 불완전하고 제한된 존재가
거룩하고 무한한 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을
그 분께 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
그 분께 합당한 것을 내 경배를 통해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육신입니다.
그 분은 육신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어느 부분을 읽어보아도
육신이 항상 하나님의 뜻과 충돌한다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육신을 처리해야 합니다.
육신의 그 어떤 부분도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육신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연예 오락입니다.
세상은 연예 오락을 갈고 닦아서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문화의 구석구석까지 퍼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 없이 아무 것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연예 오락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연으로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연을 보시고
즐거워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특히 육신으로는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즐겁게 해 주시지 않으며
나를 통해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라고 여겨지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예배가 아닙니다.
연예 오락은 기껏해야 육신의 표현일 뿐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지니까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부분은
단순히 종교적 연예 오락일 뿐입니다.
예배가 연예 오락이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연예 오락이 동의어가 아니지만
현재 복음주의 교회에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주일 아침은
종교음악을 통해서 즐기는 오락 시간이 되어버렸고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연예 오락은, 그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은
그분의 조권에 따라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 분을 경배하려고 한다면
그 분의 조건에 따라 경배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은
지금의 교회에서 ‘육신’을 제거하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안에 있는 육신적인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면
교회들은 육신의 족쇄에서 풀려나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도 간단하게나마 언급하자면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예배는
오직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의 재능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부족합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분을 경배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나는 그 분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어떤 것이고
그렇지 못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진짜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정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2. 내 육신이 처리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합당한 예배와 사역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내 행위의 모든 부분에서 그 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육신은 그 분을 높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활에 모든 부분에서 그 분을 높이려면, 육신을 처리해야 합니다.
육신을 처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이 처리되어야 내가 그 분께 합당한 방법으로 그 분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그 분의 거룩함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의 삶에서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크신 분이 되십니다.
만일 우리 삶에 어떤 부분이, 그 분보다 크다면
단언하건데 그 분이 우리 삶 안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목표는,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자기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와 관련되어 사용되어지는 단어는, ‘육신을 억제하다’ 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육신에게 등을 돌리고, 우리의 육신을 죽은 것처럼 간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갈2:20
이것은 내 삶에 모든 것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나는 주일 아침에 이런 모습이었다가
월요일 아침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릴 때는 이런 사람이었다가
다른 이들 틈에 섞여 있을 때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을 억제했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분을 품고 있고,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여전히 화를 잘 냅니다.
우리가 육신을 억제하지 않으면, 육신이 우리를 파괴할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증언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참석했던 집회 중에 기쁨이 넘쳤던 집회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이로운 능력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에,
참석자들이 두려워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때로 그 분의 임재가 너무 강하게 참석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속삭이는 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이 정말 그 장소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자주하는 교회들이 더 많이 생긴다면
연예오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신속히 사라질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 임재의 나타남에 필적하는 연예오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숙해지면,
종교의 장난감들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급진적이라고 비판한 적이 여러번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비판에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약간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급진적인 사람이 되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체험하기 원하는가요?
그렇다면 나의 몇 가지 조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집으로 가서 연예오락을 즐기기 위한 온갖 기기들의 전원코드를 한 번 뽑아보십시오.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것 말입니다. 어쩌면 전화기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전화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남으시도록,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는 때도 필요합니다.
나는 내게 그 분만이 계신 상황을 오히려 좋아합니다.
이런 저런 잡다한 것들을 많이 알 필요도 없고,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잔뜩 갖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붙들면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 힘을 쏟으려는 사람에게는, 생활필수품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3. 이제까지 다뤄온 주제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섬기는 정신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세대를 섬긴 후에 잠들었습니다.
자기 세대를 섬기는 일을 다 마치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원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주변 세상이 내 봉사 때문에 내게 빚을 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슴에 품고
임종을 맞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소원입니다.
신앙의 전당에 들어가, 믿음의 위인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세상에 올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온 세상이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요?
그들에게는 섬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신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생깁니다.
당신이 지난 세대를 섬길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다음 세대를 간접적으로만 섬길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대는 얼마든지 당신이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스펀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흡수하고 흡수하고 또 흡수합니다.
그들의 삶은 빨아들이기만 하고, 내놓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도록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삶을 단순화하고
-섬기는 정신을 키워 나간다면
지금 이 세대와 앞으로 올 세대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게 될 것입니다.
*출처 https://soundcloud.com/hwshin
'분류 없음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자 / A. W. 토저 (0) | 2017.06.26 |
---|---|
배부른 자인가 굶주린 자인가? / A. W. 토저 (0) | 2017.06.25 |
하나님의 임재 안에 해답이 있다 / 토저 (0) | 2017.06.21 |
A.W. 토저 - 짧은 일대기 (0) | 2017.06.20 |
현대 복음주의, 진정 거듭남인가? / 토저 (0) | 2017.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