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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지도자 9. 하나님이 주시는 자격으로 섬김

LNCK 2017. 9. 14. 19:17

www.youtube.com/watch?v=fkbamvkF6vY

◈하나님이 주시는 자격으로 섬김           고후3:5~6, 마15:12~13                출처보기   

 

Zac Poonen / Serving By God's Power 대강 번역, 편집                                    中國語

 

<새언약의 일꾼>, <새언약의 특징 자율, 인격적 관계> 와 아래 설교를, 연속적으로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일꾼을 쓰실 때, 하나님이 자격을 갖추게 하십니다.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또는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영어로 adaquacy 인데, 무슨 뜻인지, 상당히 애매한 구절입니다.

한글성경은 ‘만족’ 대신에 ‘자격’이란 단어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 구절은, 내 삶에 만족을 누린다.. 그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는 뜻이 아니고,

 

‘내가 종으로서의 충분한 자격, 내가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만족스런 자격요건’은

내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다음 구절 6절 서두에도, 같은 단어가 한 번 더 쓰입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만족스런 자격요건을 갖추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로

새언약의 일꾼, 신약의 종이 되는

충분한 자격을 주신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도 각기 다른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5절의 ‘만족’이란 단어를,

our competence, sufficiency, adequacy로 각각 다르게 번역합니다.

ability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나의 유능함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나의 충분함(자격 만족)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나의 적절한 자격 요건은, 하나님이 갖추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났느니라” :5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일례로, 지금 제가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집에서 구운 케이크를 가져와서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한 조각씩 나눠드린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모두 즐거워하며 기쁘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잭 형제님, 정말 맛있는 케이크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때 제 어깨가 우쭐해 질수는 있으나,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가 만든 케이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기 집에서 케이크를 만드는 수고를 했고,

제가 한 일은, 그것을 가져와서 여러분께 한 조각씩 나눠드린 것일 뿐입니다.

 

만약 그 케이크를 제가 직접 구웠다면, 칭찬을 들을 때 약간 우쭐할 수는 있겠으나,

남이 구운 케이크를 가지고, 제가 칭찬을 듣고, 존중을 받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설교자, 목회자를 비유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새언약의 일꾼의 자격요건, 일꾼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이나 업무수행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그 케이크는, 하나님이 구워주시는 것이고, 일꾼은 배달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다 이루신 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케이크 나눠 주듯이, 그저 패스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 유익에 참여할 수 있도록

나눠주는 일 뿐입니다.

 

    그 일을 하는 충분하고도 적절한 자격요건도, 업무수행능력도

    내 스스로가 갖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혹자는,

자기가 대단한 사역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자고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게요.. 따지고 보면, 그저 사람들에게 케이크 돌린 수고에 불과합니다.

케이크를 만드신 분이 없다면, 어찌 그런 성공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역자는, 아무리 자기가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늘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겸손에서, 자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었다’ 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은 점점 자기를 떠나버리실 것입니다. 주1)

 

▲여러분 5병2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2~3만 명이나, 배불리 식사를 했는데

제자들이 한 일은, 그저 빵과 물고기를, 나눠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2제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심지어 5병2어의 도시락을 드린

그 주인공 소년도, 자기를 드러내거나 스스로 높인 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이미 준비된 식사를, 나눠준 역할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수 백, 수 천, 수 만 명을 먹인다 해도.. 스스로 자고할 수는 없습니다.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요,

자기는, 그저 전달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역할을 할 때.. 능력이 계속, 자기를 통해 공급됩니다.

만약 능력이, 자기가 대단해서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착각)한다면,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아무도 배불리 먹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생산자가 아니고, 그저 공급자 (배급자, distributor)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때, 저 푸닌은, 사역에 많은 자유함을 느낍니다.

 

제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사역이 약간 힘이 들거나, 버벅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스스로 힘을 뺍니다.

안 되는 것을, 잘 되게 하려고, 억지로 밀고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저 공급자(배달 심부름꾼)에 불과하고,

원래 생산자(또는 주인)께서, 그 문제를 직접 책임지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급, 배달, 나눠주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안달복달 하면서, 마치 내 모든 명예가 다 걸린 것처럼,

용을 쓰면서 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 갖춤/ 종의로서의 유능함/ 종으로서의 적절한 능력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우리 각자의 자격, 능력, 적절함과 유능함도.. 하나님께로 나왔으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구원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니

그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절대로 교만할 수 없으며, 절대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자격을 공급받아 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자격: competence, sufficiency, adequacy, ability

 

▲그 ‘새 언약의 일꾼’되는 자격을 <성령으로 가능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고후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만족,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신약의 종이 되는데 필요한, 능력, 자격, 적절함 등을

구비해 주십니다. 장착해 주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성령의 사람이어야 하며, 성령의 인도를 늘 받아야 합니다.

아니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간혹 상태가 좋지 못할 때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 가운데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일’은.. 결국은 막대한 손실을 끼치며,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끝날 것입니다.

 

▲목회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없이 하는 일, 성령의 인도함 없이 하는 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물질의 힘으로, 숫자의 힘으로 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지위와 능력만 믿고서 추진하는 모든 일들은

 

처음에는 뭐가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루아침에, 폭삭하게 될 것입니다.

불이 그 공력을 시험할 때,

나무나 짚처럼 다 타버리고.. 허무하게 재만 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감정이입의 귀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얼마나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을 하는지..

그의 말을 듣고, 설득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그 태생적 은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잘 사용되면 좋은데,

성령의 인도, 하나님의 자격 부여를 받지 못하고,

자기 인간적 은사(장끼)로서만, 그 설득력이 발휘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뭐가 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물거품만 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록 뮤직 가수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몰입시킵니다.

그들은 그런 은사를,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은사로,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들뜨게 할 수는 있으나,

그 감정은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싸늘하게 다시 식어버립니다.

결국 허무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인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의 강의를 듣노라면, 몇 시간 동안은 그의 탁월한 지식과 언변에

홀딱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런 자기 지식에서 오는 능력,

역시 ‘새언약의 일꾼의 자격 요건’은 아닙니다.

 

‘새언약의 일꾼의 자격요건’은, 오직 하나님이 그에게 장착시키십니다.

그가 종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모든 능력/만족/충분성/적절함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자격요건, 능력ability’으로 일을 할 때,

그의 사역은, 결코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이 그 공력을 시험할 때도, 금 은 보석처럼..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신학 보다는 생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대단한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에 대해서 약간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데 반면,

바리새인들은, 구약에 대해서 대단히 보수근본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의 그런 상태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치는 바를, 무엇이든지 지키되’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마23:3

 

당시에 그들 바리새인들은, 성경적 보수 신학교의

저명한 성경박사, 교수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말리엘은, 그 보수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그래서 다소의 바울도, 그에게 성경을 배우러, 젊은 시절에

고향인 다소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갔을 정도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바리새인들은 해외선교에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를 얻기 위해서, 먼 땅으로 가고, 바다를 건넌다’고 하셨습니다. 마23:15

정말 보통 열심과 헌신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새언약적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구약성경 지식에 박식한 신학자들이었고,

또한 이방 땅에까지 나가서, 개종자를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이었던

명실상부, 유대교에 가장 충실했던 아브라함의 자손(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가장 맹공을 퍼부으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정말 의아하게 만들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이 시간에 그 이유를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정면으로 반박하셨느냐...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오늘날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이,

오늘날 해외선교에 가장 열심이라는,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께 심하게 질책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항상 따지고 들었습니다.

‘당신과 제자들은, 왜

율법에서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또한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들은, 하느냐! .. 는 따짐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이라고 말한 것들은

사실은 율법(의 본래 정신)이기보다는,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전통을 어긴다고

늘 감시하고,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오늘날에도 우리 신자들이, 이렇게 서로를 비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바리새인들과 똑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율법에서 규정하는 것은

남을 비방하고, 거짓 증거하고, 형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더 큰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 위해서

자기 눈에 들보가 깔리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습니다. 아니 깨닫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교단적 배경이 다르고, 신학적 배경이 각자 다릅니다.

예수님은 완벽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분만 알고, 부분만 볼 뿐’입니다.

 

저 푸닌의 견해인데, 정통 신학을 정립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사명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의) 생명력’이라고 봅니다.

 

저는, 죽은 시신이 완벽하게 열 손가락과, 열 손톱을 다 갖추고 있는 것보다는

(외국에는 시신을 공개하잖아요)

손가락 하나가 마비되고, 손톱이 몇 개 빠져버린 상태에 있더라도

살아있는 손이.. 보기가 더 좋습니다. ‘생명력’ 때문입니다.

 

손가락이 한 개 마비되고, 손톱이 몇 개 빠져 있어도, 움직이는 팔이

손톱까지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지만, 못 움직이는 죽은 팔보다는.. 더 낫습니다.

 

신학적 완전성 (세상에 100% 완벽한 신학은 없다고 보지만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완전한 신학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도,

거기에 생명력이 빠져 있으면... 옛언약은 될지 몰라도, 적어도 새언약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언약의 특징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 또는 성령님이 주시는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신학자들, 혹은 일부 성경에 능통한 목회자들은

항상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를 따지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죽은 상태로’ .. 아무리 옳은 정통 신학을 주장해 봤자..

그는 ‘새 언약의 일꾼’은 아닌 것입니다.

 

저는 ‘성령론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고도 죽은 신자’보다는

‘성령론에 대해 약간 모호하지만, 자기 심령이 살아있는’ 그런 새언약의 일꾼들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교리나 신학을 우습게 여기거나,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저도 성경과 신학을, 일평생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 지식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성경적인 삶, 예수의 생명, 성령의 생기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습니다.

 

성경지식과 신학은, 정통성을 추구하면서도,

성경적인 삶, 예수의 생명, 성령의 생기에 무지하거나, 강조가 없는 교회는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많으니,

그런 곳은, 빨리 떠나는 것이, 어쩌면 자기 영혼에 더 유익할 것입니다.

 

그들은 ‘새언약의 일꾼’이 아니라,

아직 ‘옛언약’ 아래에 묶여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겠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고, 교정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하며

걱정스런 투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소경된 자로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걱정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것은, 다 뽑히고 말 것이다.’ 마15:12~13

 

여러분,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새언약의 일꾼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언약의 일꾼’이 되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옛언약만 붙잡고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결국은 다 뽑히고 말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새언약의 씨를 뿌리지 못하고,

그저 옛언약의 말씀만 설교하고 있다면.. 그건 열매도 못 맺을뿐더러, 다 뽑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새언약의 일꾼’들이 가르치는, 또한 자기 삶으로 직접 증인처럼 보여주는

새언약(복음)과, 새언약적인 삶의 증거는,

영원히 그 열매가 지속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까지,

어거스틴, 성 프랜시스, 루터, 칼빈, 휘필드, 에드워즈, 스펄전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뿌린 ‘새언약의 씨앗’이, 지금까지 계속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가만히 보니까,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역을 확장하는 일이,

 

복음의 능력, 새언약의 능력, 하나님이 입히시는 능력(고후3:5)으로 하기보다는

자본의 능력, 행정 및 경영적 능력으로

무슨 사역이 되어지고 있고, 그렇게 추진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뭐가 되는 것 같습니다.

큰 자본으로 건물도 세우고, 여러 장비나 시설도 잘 갖춰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는 것들은, 다 뽑히고 말 것입니다.’ 마15:12

 

요즘 인도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부” 세미나, 컨퍼런스 등을 보면,

행정력 능력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숙소 배정하고, 식사 스케쥴 잡고, 방송 및 녹화 장비 다 마련하고

진행 책자에 주차 배정 등

세상 세미나, 세상 컨퍼런스와 똑같이, 호텔이나 컨벤션 센터에서 멋있게 진행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령이 인도하시는 말씀 사역’은 ... 있기는 있겠지만, 아주 희귀합니다.

 

그러니까 세미나, 컨퍼런스가

‘성령 인도’가 아니라, 결국은 ‘행정력’에 의해서, 주도되고,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 원활한 행사진행을 위해서,

그런 일에 경험이 많은, 불신자를 초빙한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일례를 든 것이지만, 이런 것들은 다 ‘새언약의 일꾼, 새언약의 사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것들은, 결국은 다 뽑히고 말 것입니다.

 

제가 ‘행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당연히 필요하지요.

그러나 ‘성령 인도’는 거의 희박하고, ‘행정력 인도’를 받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 행사의 세태를.. 제가 탄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성령의 인도함과 성령의 구비시키시는 자격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내 지식으로,

‘지식적 전달’ 위주의 설교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물질을 모아서, 물질의 힘으로 뭘 해보려고 시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바른 교리, 바른 신학만 외치면서, 그래서 남들을 공격하면서

실제로는 내 삶에서, 성령의 생명력이 소멸되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그렇게 ‘새언약의 일꾼’으로 살면서, ‘옛언약의 일꾼’들로부터

반대와 핍박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내가 ‘옛언약의 일꾼’으로서, ‘새언약의 일꾼’들을 반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주1) 관련 예화

 

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는 자리에서 행했던 배우 황정민씨의 수상 소감이

 

아직까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수상 소감은 이렇습니다.

 

 

 

“우선 매번 마음속으로 감사드리고 표현 못했는데, 하나님께 제일 먼저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저는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하면 60여명 정도 되는 스텝들과 배우들이 이렇게 멋진 밥상을 이렇게 차려놔요.

 

그럼 저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스포트라이트는 저한테 혼자 다 받아요. 그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제가 한 거는 이 여자 보면(트로피) 아마 발가락 몇 개만 띠어 가면 제거 같아요.

 

스텝들한테 그리고 감독님한테 너무너무 감사드리고요 ……

 

 

 

그리고 항상 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를 설레게 하고 현장에서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준

 

전도연 씨 한테 너무 감사드려요.

 

‘도연아 너랑 같이 연기하게 된 건 나한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 고마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희 가족들과 사랑하는 동생과 조카와

 

지금 지방에서 열심히 공연하고 있는 황정민의 운명인 집사람한테 바치겠습니다.”

 

 

 

감동이 있지요?

 

소감 속에 담긴 감격과 감사의 마음이 아주 독특하고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일개 배우 나부랭이가 이렇다 하게 한 것이라고는 별거 없다는 겁니다.

 

그저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올려놓고 맛있게 먹기만 했을 뿐인데

 

모든 영광이 자기한테만 돌아 왔다는 것이지요.

 

 

 

잘 차려진 밥상에 자기 숟가락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맛있게 먹었다고 상까지 주니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