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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지도자 14.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

LNCK 2017. 9. 14. 19:21

영적지도자 14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 잭 푸닌 - YouTube

◈영적지도자 14.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    히6:20-7:7, 창14:14~24      출처

 

The Priesthood Of Melchizedek by Zac Poonen 영적지도자 시리즈 #14

 

▲영적 지도자는, 멜기세덱 계열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히6:20~7:7

멜기세덱은, 영적으로 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자적으로, 실제 제사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은, 레위 계열의 제사장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히7장.

레위 계열의 제사장직은, 그 주 임무가, 많은 의식을 집행하며,

주로 외적인 형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아론의 아들, 즉 대제사장은, 제사장의 의복을 입었는데,

그것은 심지어 속옷 규정까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레6:10, 16:4

 

그러나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은,

제사장의 예복을 입지도 않고, 또 무슨 제사 의식을 집례하지도 않습니다.

 

▲제사장 멜기세덱은, 전 성경에 단 세 군데만 나옵니다.

그렇게 드물게 나오지만, 의외로 성경은 우리 주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증거함으로써,

그 멜기세덱 제사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5:10, 6:2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도대체, 창세기에 짧게 언급된 멜기세덱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기에,

예수님을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예수님은,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도 되십니다. 둘 다 되십니다.)

 

이 설교는, 바로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당면한 위험 2가지.

아브라함이 갈대아의 4왕을 무찌르고,

포로로 잡혀갔던 롯과 그 가족도 구해내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318인의 작고 볼 품 없는 군사를 이끌고,

큰 왕들의 4개국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자랑과 교만을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편에는, 의례히 전리품 획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당시 습관은, 전쟁에 승리한 자들은, 거기서 획득한 전리품을 나눠 가지며,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을 따랐던 318인도, 전리품을 나눠가질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은, 육체적으로 몹시 피곤한 가운데,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야 했는데, - 그것은 바로 교만과 탐심이었습니다.

즉 pride 와 covetousness의 위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주변에는, 아무도 그 위험성을 경고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전쟁 영웅으로 칭송해 주고, 떠받들어줄 사람들은 가득했겠지만,

 

교만과 탐심이라는.. 더 무서운 대적이 있음을 주의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직설적으로 경고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바로

멜기세덱 제사장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아브라함처럼 ‘외로운 영웅’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계와 사회를 막론하고,

그들은 피라미드 조직의 맨꼭대기, 정점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들의 주위에는 오직 ‘예스 맨’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정직한 지적을 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당면한 위험을, 말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지도자들이, 사탄의 주요 공격목표요, 먹잇감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한 명씩 차례로, 지도자들을 무너뜨려 갑니다.

이것은 사탄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이런 위험에 직면한 아브라함에게, 그를 도와줄 목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 어떻게 아브라함을 도왔나요?> ←문제 제기

하나님이 멜기세덱을 통해, 위기에 처한 아브라함을 어떻게 도우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제사장 멜기세덱은 너무 신령한 나머지,

전쟁에서 막 돌아와 지쳐있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지금 교만과 탐심의 위험에 직면에 있으니, 기도하고 금식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먼저 식사부터 하라고 하면서,

자기가 준비해 온 음식부터 내밀었습니다.

 

창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오랜 후에, 하나님이 지친 선지자 엘리야를 대하실 때에도, 똑같았습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탈진하고 낙담해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서 먼저 음식부터 먹이신 것입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19:5~8

 

우리는 이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먼저 음식을 주든지, 쉬게 해야 합니다.

 

지쳐있거나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설교’부터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훈시’부터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영혼만 가진 게 아닙니다. 육체와 마음도 갖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는 긴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영혼의 양식인, 교훈부터 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지쳐있는 아브라함에게 음식을 제공한 후에,

비로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영적으로 도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9~20

 

멜기세덱은, 단 15초밖에 안 걸리는 위 본문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아마 아브라함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족히 두 시간은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의 짧은 찬양의 말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

 

 

◑2. 탐심으로부터 구원 받은 아브라함

 

▲먼저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늘과 땅을 소유하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의 전리품에, 잠시 눈이 어두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되찾아온 물품들은, 적의 소유물도 포함되었겠지만,

대부분은 소돔 성에서, 탈취를 당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소돔성은, 아주 앞선 문명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싸구려 물품을, 소돔왕에게 돌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돌려주기 아까운, 값비싸고 탐나는 물품들을, 되돌려준 것이었습니다.

 

사람인지라, 누구든지 값비싼 물품을 보면, 탐이 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별안간, 멜기세덱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14;19

 

아브라함이 정신이 퍼뜩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 나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지?

그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지, 이 따위 세상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지?’

 

사실 하나님의 부요함에 비교하면,

소돔의 재화가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그건 비교도 안 되는 고물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찬송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명확히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멜기세덱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찬양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서,

아브라함이 스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물론, 멜기세덱은 아무 의도가 없이, 그런 찬양을 했겠지만,

그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설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소.

아브라함 당신은 지금 점점 탐심에 물들어가고 있소.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보내어서, 당신에게 경고하시는 것이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은,

너무 형식적이고, 직업적인 제사장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4:18

 

여러분 항상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 권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대단한 종교인이요, 대단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런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일상의 시간에는,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보통 사람으로 사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도, 자기를 스스로 권위적으로 내세우신 적은 없었습니다.

 

자연히 권위가 따라오는 것은.. 정상적이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스스로 권위를 연출해서 보여주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찬송을 듣고, 아브라함은 즉시로 돌이켰습니다.

소돔의 재물에 있었던 자기 관심을, 즉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이 세상의 화려하게 보이던 것들이

점점 빛을 잃고, 어두워져’ 갔습니다.

그게 정상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멜기세덱이 사역하는 방식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데..

옆에서 아브라함이, 그걸 보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자기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서 있으니까,

주변에 있던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메시지를 전해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계열의)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3. 교만으로부터 구원 받은 아브라함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20

▲멜기세덱의 찬송을 통해, 또 한 가지 더,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전쟁에서 승리가, 자기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

 

짧은 시간이나마, 스스로 우쭐하고 교만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찬송을 듣는 즉시,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찬송이, 아브라함을, 그의 교만으로부터 구원해 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관심을,

자기의 능력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훌륭한 영적 지도자,

‘멜기세덱 계열의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세상적인 것에서, 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영원한 천국으로.. 관심을 돌려놓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자기가 성공해도,

온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거둔 승리를, 깊이 오래도록 묵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설교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습니다.

짧은 세상의 성공과 육신적 것들로부터, 영원한 천국으로.. 관심을 되돌려 놓습니다.

 

▲저는 멜기세덱의 본문을 읽으면서,

그는, 욥기에 나오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 같은 설교자들과 비교됨을 느낍니다.

 

이 세 명의 자기 의로 충만한 설교자들은,

욥에게 설교하면서, 설교로, 욥을 괴롭혔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늘날에도, 의로운(?) 설교로,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이 욥의 세 친구들은, 구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신약의 바리새인들의 원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 교계에 필요한 지도자는,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뭐 설교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변화되고, 그로부터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4. 멜기세덱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제가 이 설교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 단락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후에, 조용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창14장 이후에, 성경에, 멜기세덱 제사장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신약의 히브리서는,

그를 그리스도의 예표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히6:20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만나서,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떤 보상이나, 어떤 대접을 바라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았습니다.

축복만 하고.. 음식만 먹이고.. 사라진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지,

사람을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아브라함)에게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빌붙어서, 이익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리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감사를 받으려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만족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키신 일을 다 수행한 것’에서 찾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축복한 후에, 홀연히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은, 하나님이 대언하라고 하신 말씀을 다 전한 후에,

사람들이 당신을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칭송해 주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내가 하나님의 종인가, 사람의 종인가?’ .. 분변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과, 사람의 종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키신 그 일, 그 사명,

그것을 수행하고, 순종하는데서.. 자기 만족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칭송, 인정, 영광, 대접을 바라지 않습니다.

자기가 벌써 만족해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한 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신 후에, 뭔가 대가를 바라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가 ‘신유사역자’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유명해지려고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왕처럼 대우를 받고자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만족은,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순종해서 수행하는 것 - 그것에 있었습니다.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양식’이란 말은, 다른 말로 ‘만족’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만족이 있으니까,

다른 세상 만족을 구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종들은,

그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수행하는데서.. 자기 만족을 찾습니다.

다른 세상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찾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만족한 상태이니까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다 내어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셨습니다.

뭘 얻으려 하는 데서가 아니라요!

 

오늘날 여러분들은,

뭘 내어줌으로써.. 스스로 만족을 얻으십니까?

아니면 뭘 자꾸 가지려 하심으로써..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 하십니까?

 

예수님은 헤롯, 빌라도, 안나스, 가야바, 바리새인 같은 당시 종교권력자 등

당대의 유력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그것을 과시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오늘날에, 혹시나 누가 미혹을 받아서,

정/재계의 유력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기 바라고,

그것을 과시하는 주의 종이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종’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유력 인사들에게, 인정을 받으시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부활 후에도, 그런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 멜기세덱도, 아브라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쓴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의 일부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지요?

 

멜기세덱 계열의 하나님의 종은, 예수님 계열이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인정만 바랍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수행하고,

그것으로 자기 양식과 만족을 삼습니다.

사람들, 특히 유력 인사들, 종교 지도자들의 인정..

그런 것에 스스로 목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해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10:38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이것이 주의 종의 가장 큰 축복이고, 그의 영적 권위의 토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영적 권위가 있으니까,

병자를 고치고, 말씀을 전파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종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스스로 종된 자는, ‘세상 권력자들의 함께 함’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하나님의 종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자기에게 나타나서, 영적 권위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모여와서, 마치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로 모여든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이 스며 나오기 (발사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멜기세덱 같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뭐 일일이 붙잡고 축복할 필요 없습니다. (그게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열심히 찬송하고 섬기면

-주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은혜를 받고, 메시지를 듣습니다.

 

자기 몸에서, 영적인 축복과 영적인 권위가 스며나오기 때문에,

-그 주위에서, 사람들이 그 축복에 ‘감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는, 식사를 같이 해도.. 축복이고,

옆자리에서 버스를 같이 타도.. 축복이고,

옆자리에서 같이 기도를 해도.. 내게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그런 ‘복의 근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