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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6장. 일상생활 속의 겸손

LNCK 2017. 11. 13. 09:55

◈겸손   Humility                                        English                도서 스크랩, 정리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겸손 6. 일상생활 속의 겸손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대인관계와

그 관계속에 드러내는 사랑으로 가늠됩니다.

 

이는 엄숙한 사실입니다.

 

이웃과의 일상적인 삶에서

이웃사랑의 시험에서

나의 그 진실성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거짓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실제로 겸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이런 겸손만이 본성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같이 실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진정한 겸손의 증거가 됩니다.

즉 겸손이 내 속에서 마치 우리 본성의 일부분처럼

언제나 바탕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가누데 소유한 마음의 겸손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취하는 자세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정신 그 자체가 될 때

그 겸손은 형제를 대하는 모든 관계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에서 명예를 얻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때

우리 마음의 겸손은, 우리가 그 앞에서 인위적으로 취하는 자세도 아니요,
우리가 기도로 겸손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차원을 뛰어넘어, 겸손이 되어진다니까요. 겸손하게 되어집니다.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겸손으로 굳어져 버리는 것이죠.

 

그러므로 종종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은

사람 앞에서도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굳어진 겸손이, 현실 생활 속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겸손은

기도시간에 하나님께 애써 자기가 나타내 보이려는 자세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가운데 나타나고 실행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은

겸손하게 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변화된 그는, 거기서 갖게 된 겸손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 보이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들은

정말 사소한 일들이 아니라

정말 그가 영생을 가졌는지, 그걸 보여주는 하나의 시험대가 됩니다.

 

즉 일상의 삶에서 겸손한 사람은

영생을 가졌고, 구원 받은 사람의 증거이고,

그게 없는 사람은, 아직 영생을 가지지 못했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심하고 사는 일상의 모습에서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그 실상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우리 주위에 누가 겸손한 사람을 알고자 하고,

그가 진실로 영생을 가진 겸손한 자임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소소한 삶의 태도와 행동들을 따라가서 보면 됩니다.

 

진정 하나님을 만나서 겸손해진 제자는

그 삶에서 겸손의 자기 본성을

반드시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예수님이 겸손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신 때는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크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을 때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잔치의 높은 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셨을 때,

 

그리고 발을 씻기는 본보기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을 때입니다.

 

즉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겸손을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아니라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가르침에도 동일한 교훈이 나타납니다.

그는 로마 교인들에게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2:10,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12:16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고전 13:4-5)라고 말했습니다.

 

겸손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5:26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천국의 삶을 말하는 내용을

1~3장에 걸쳐 놀랍게 이야기한 직후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4:2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0-21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말했습니다. 2:3~8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2-13

 

이렇게 사도바울도, 예수님처럼,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제자들의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다른 그 어떤 교훈보다도, 겸손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했습니다.

성도의 겸손은

이웃에게 예수님의 겸손을 드러내는 길이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항상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서로 종노릇하고,

-피차 복종하면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기꺼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가 지식이나 거룩한 삶에 있어서

나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그를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실제로 마음을 낮추는 것(겸손)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우리가 이르게 되는데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도록

그래서 내가 자신과 결별하고 자신에 대해서 죽을 때..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는 가운데 자아가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포기했으며,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이웃들을 만나며,

자신을 위해서는 명예나 존경 등, 아무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영혼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신실한 종(하급자)은 주인(상급자)보다 지혜로울 수 있으나

(하급자)으로서의 참된 정신과 자세를 여전히 가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왕의 아들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바라보고,

그를 높이고, 귀하게 여깁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의 영이

우리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게 하고,

가장 낮은 자가 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겸손한 사람은 질투나 시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그를 더 좋아하고

그가 자기보다 더 큰 복을 받을 때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칭송과 높임을 받고

자신의 존재는 거의 잊어버리는 듯한 말을 들어도,

기꺼이 견딥니다. 겸손하니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바울과 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고후12:11

 

평소에 “I am nothing”이라는 말을

평소에 늘 입에 되뇌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의 겸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자신의 영예를 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동료 신자들이 실패하고 범죄했을 때

그때 냉혹한 생각이나 날카로운 말들이 나갈 수 있지만


이런 때도 겸손한 사람은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라는 명령을 되새기고 자기 가슴속에 지니면서

함부로 그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입는 것이

곧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 옷 입는 것임을 배운 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취하셨으므로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겸손은 단순히 자기비하의 생각이나 말이 아닙니다.


겸손은, 긍휼과 자비,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채워진 겸손의 마음인데,

즉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과 태도처럼

감미롭고 겸손하며 온유한 태도와 자세입니다.


남들보다 고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더 인간적이고, 더 도덕적인 덕목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기뻐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담대하게 살기, 기쁘게 살기,

세상을 무시하기(세상에 목숨걸지 않음),

열심있게 살기, 희생적으로 살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과거 스토아 금욕주의 철학자들이 가르치고 실천했던 내용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도덕적으로 고상하게 살려고 합니다만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

그런 도덕주의, 율법주의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영적인 가난, 온유함, 겸손, 낮아짐 등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영생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를 믿은 후에

더욱 도덕적으로 고상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는데

그렇게 해서 스스로 고상하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결국은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 덧입어야 합니다.

즉 겸손의 가치를 고귀하게 여기고, 내 삶으로 살아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고

그리스도와 같이 서로를 오래 참고 용납하면서

모든 사람 앞에서,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겸손한 사람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공부해야 합니다.

겸손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묘사하는 내용과 닮은 모습을

우리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겸손을 이야기하는 성경 본문들을 볼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똑같은 겸손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겸손)을 똑같이 주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와 단점들을 볼 때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께

겸손하고 온유하게 돌이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우리 마음에 좌정하시고

거기로부터 그분의 겸손과 온유함의 생수가

내게 흐르게 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앞서 했던 말이지만,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왜냐면 제가 이 사실을 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겸손의 부족으로

우리들의 교회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만한 공간(겸손)

우리가 전혀 내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다양한 사회에 속한 몇몇 선교기지를 잘 알고 있는

겸손하고도 남을 사랑하는 영혼을 가진 한 그리스도인이 깊은 통탄을 표현했습니다.

 

어떤 공동체의 경우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슬플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공동체에서, 신자들은 자신의 또래집단만 택하여 교제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참고, 사랑하기가 어렵고,

평안의 끈 안에서 하나됨을 지키기가 힘들어 합니다.

 

서로의 기쁨을 위한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장애물과 피곤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장 작은 자가 되고,

그렇게 여김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종과 조력자이자 위로자가 되며


심지어는 가장 낮고, 가장 부족한 자가 되기만을 구하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포기했던 사람들이

형제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허물이 아닐까요?

 

사실 교회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겸손>

첫째 되는 신앙생활의 덕목이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가장 좋은 것임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닮은 겸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겸손을 최우선의 자리에 놓고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족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를 자극해

더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겸손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고 고통을 주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즉 나를 겸손케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수단으로 여기고,

 

그들을 통해 내가

예수님이 주시는 겸손을 갖게 되고,

나를 정결케 하는 도구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고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기만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