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믿고 계십니까?
데이빗 윌커슨 January 4, 1993
최근 몇 주 동안, 성령님께서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간구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4장 16절을 읽을 후, 저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1 4:16).
저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신학적으로만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사랑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배웠고, 설교들을 들어 왔지만,
그들의 이해는 주일학교 아이들의 찬양의 한 구절;
"예수 사랑하심은 ... 성경에 써있네"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상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심을 믿고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매우 적은 수의 기독교인들만이 담대함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 나는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압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거든요.
나는 '그 사랑'을 이해하고, 그 안에 살고 있으며,
'그분의 사랑'이야말로 저의 매일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의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죄책감, 두려움, 정죄함의
시커먼 구름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껏 자유함을 느낀 적도 없으며,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찾아본 경험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 앉아서 손을 들고 즐거운 척하지만,
사실 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짐을 늘 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들은 자신에게 말하곤 합니다.
"뭔가 부족해, 난 자격 미달이야,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2).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큰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 명의 '아주 오래된 크리스천'으로부터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이들은 30년 혹은 4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쁨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같이 보였지만,
그들의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항상 의심과 두려움의 무거운 짐을 끌고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형제 자매들이 단순히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 깊숙이 깨닫지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져다주는 그 참 평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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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두려움과 죄책감, 정죄함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해 정돈되지 않은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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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당신이 잠에서 깨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수는 없어!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정죄 의식, 그리고 좌절감을 가지고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의 죄들이 용서받았는데,
왜 나는 아직 이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지?"
사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죄의식과 정죄감으로 살아가도록 하려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정죄함
(condemnation/ 개역성경: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에 '정죄함'이라는 말의 뜻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가지 않고
'그분의 진노'로부터 벗어 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죄함'은 또한 '우리가 결코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절대로 이런 느낌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롬 8:1,4).
모든 죄책감과 정죄 의식은 분명히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 직분에 대해 설명하면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라고 말하고,
정죄함에 대해 철저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정죄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에 빠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의 피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 안전함에서부터 멀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지만 결코 정죄하시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치유를 위한 것,
즉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시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지
심판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누가 너희를 정죄 한다는 말이냐?
너희들의 구세주가 내 옆에서 너를 위해 간청하는데, 왜 너희는 정죄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느냐?"
오직 복음의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만은 정죄함이 남아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 3:19).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들추어내도록 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정죄함이란 오직 자신의 죄를 숨기고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빛을 사랑하시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정죄함이 여러분가운데 들어오도록 용납하십니까?
여러분들 혹시 떨쳐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유혹에 공격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여러분들이 결코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도대체 자격이 없을 것 같은 기분,
다시 말하면 마귀가 여러분들을 넘어 뜨리고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바로 오늘이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읽는 중에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마음속 깊숙한 부분을 흔들고,
여러분들은 무릎을 치면서 "맞습니다. 윌커슨 목사님, 바로 제 예기를 하시고 계시군요.
저도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죄책감과 두려움과 정죄함에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사랑위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이 뭘까요?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함의 깊고 안정된 기초아래 세워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가장 기초적인 진리요,
그 위에 모든 다른 진리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여러분들에게 벌을 주실 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란 그분의 거역할 수 없는 거룩하심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한 빛보다는 어두움을 사랑했던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죄와 약함을 위해서 그분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죽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여러분의 신앙은 결코 안정되고 영원한 기초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너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엡3:18).
여기서 "알아 (comprehend)"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간절히 붙들다"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에게 이 진리를 붙들고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의 기초로 삼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영적인 손을 뻗어서 '난 이 진리를 붙들겠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성령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주제가 여러분들의 눈을 뜨이게 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기쁨과 평화의
새로운 세상으로 여러분들을 안내하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이 귀한 하나님의 진리를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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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광 안에 있는 보화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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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광 안에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는 "넘치는 부요하심"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여호와 이레"로 필요를 채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항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저는 몇 주간을 이렇게 기도해왔습니다. "주님,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서재의 수많은 책들을 들추어보아도 당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고,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봐도 소용없습니다.
주님, 오직 당신만이 그 사랑을 주실 수 있음을 압니다.
제게도 저를 향한 당신의 그 직접적인 사랑을 보여주시옵소서.
그 사랑이 나의 신앙생활 방식을 바꾸고
또 나의 목회 방향을 바꾸도록 분명하게 보여주시옵소서".
사실 제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 기도할 때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영화로운 홍수처럼 갑자기 내 영혼에 밀려들까?
아니면, 어떤 기가 막힐 정도의 굉장한 통찰로서 나타날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바로 내 옆자리에 계신 것처럼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저, 내가 하나님께 정말 특별한 존재이구나 라는 느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느껴져서
나를 그냥 영원히 바꿔버릴 그런 경험일 찌도 몰라..."
"그런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께서는 짧고 간단한 이 구절을 통해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의 그 부요함,
즉 우리의 필요를 넘치게 채우시는 그 풍성함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드러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주심(giving)"을 통해서 증명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이 되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우리가 세상을 능히 이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에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게 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가 공급되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우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소유한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구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소유하지도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보물이 저 하늘 위에 '수취인 불명'의 영화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는 줄 아십니까?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지만
우리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 엄청난 풍요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와 같은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풍성하심,
또 공급하심과 아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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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의지하는
모든 인간적인 자원(human resources)들을 끊어버리고,
이제 하나님의 넘치는 보화를 구하고 누릴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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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에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은 그 자신의 모든 자원을 소진해 버렸고,
또 한 아들은 그 아버지의 그 엄청난 자원을 한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와서 말합니다.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 15:12).
여기 작은아들이 받아서 탕진해버린 물질은 그의 개인적인 관심과 재능, 능력,
그의 삶에서 맞게 되는 모든 일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문제들을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지식도 있고, 재치에다가 든든한 빽도 있으니 나가서 내 사업을 벌일 수 있을 거야!"
이런 행위는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빨리 우리 자원이 바닥이 납니까?
얼마나 쉽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써버립니까? 하기야 몇몇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 할 수 있고,
어떤 시험들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도 견뎌 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가뭄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 우리 인생에 닥칠 때는 어찌할까요?
자, 그때는 여러분들 자신의 능력의 끝이 오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피할 수 없고,
친구들조차도 등을 돌립니다. 이젠 빈 털털이에 상처투성이,
우리 안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지쳤고 손써볼 마지막 힘조차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두려움과 실망과 공허감, 그리고 완전히 무너져버린 꿈밖엔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직도 사탄의 돼지우리에 기웃거리고 계십니까?
거기서 상실감과 배고픔에 뒹굴고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이 탕자의 인생 모습입니다.
정말 이제는 자신의 자원이라곤 하나도 없이 다 써버리고, 밑바닥을 드러낸 것입니다.
자, 이제서야 탕자는 자기 능력과 힘을 믿고 살아왔던 인생의 종국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 탕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까.
도대체 어느 순간에 그가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가 '아버지 집의 그 풍요로움'을 기억할 때가 아니었습니까!
탕자가 말합니다. "내가 여기서 굶어 죽다니...
아버지 집에는 배불리 먹고도 남을 음식이 있는데..."(참조: 눅 15:17).
그는 다시금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그 풍성한 공급하심을 누리리라고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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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그의 풍성한 잔치에 와서
즐기라는 초청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의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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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에서 "탕자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탕자를 돌아오게 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탕자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외칩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제가 아버지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집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는 놈입니다".
탕자는 절대로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돌아왔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는 조건이 붙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와 관계가 없습니다.
실제로는 우리의 마음이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죄목들을 들춰내었던가요?
그는 절대로, "너 이제까지 어디 있었니? 도대체 몇 명의 여자들과 놀아난거야?
어디 네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남았나 보자. 어디다 썼는지 다 말해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그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목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자 살찐 송아지를 잡아 상을 차려라.
그리고 내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그의 손가락에는 반지를 발에는 새 신을 신겨라.
잔치를 벌이자꾸나.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자, 이 장면 중 어디에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납니까? 아버지의 '즉각적인 용서'에서 드러납니까?
그의 '자애로운 입맞춤'에서 입니까? '살찐 송아지'인가요? 새 옷, 반지, 새 신발?
사실 이것들 모두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도 아버지의 사랑 전부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1 4:10).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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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자리에 아들과 함께 앉아
한없이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에게 진정한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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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his banner over me is love)"(아 2:4).
아버지의 기쁨은 그의 아들이 돌아와 잔치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그 순간까지
결코 완전하여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으며,
그가 지은 모든 죄는 잊어 버렸노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식탁에 앉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어린양의 잔치"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그날 그 잔치 집의 창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면,
여러분들은 그날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어느 한 젊은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진 행복이 넘치는 잔치 집,
그리고 그 안에 아들은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진정한 즐거움에 겨워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것입니다.
탕자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의 그늘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 봐야, 넌 곧바로 돼지우리로 쫓겨나는 꼴이 될껄. 그런 사랑은 바라지도 말라구".
그 옛날 귓가에 들려오던 거짓말도 이젠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용서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이젠 "이리 들어와서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을 취하거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얘야, 이젠 더 이상 배고플 필요도, 외로워할 필요도 없단다. 넌 이제 거지가 아니란다.
그리고, 내 재산을 떼어 가질 필요도 없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 그분 사랑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장 힘이든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받아주실 뿐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 상을 내어와라, 우리가 같이 먹고 즐기자!"
이 잔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넘치고 풍성한 축제의 자리니라."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넘치고 풍성한 완전한 축복을 주리라, 모든 위기의 순간마다 공급하여 주며,
너의 전 생애를 걸쳐서 기쁨을 주며, 너는 내 창고에 가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한편, 밭에 나가서 아버지의 밭을 일구며 열심히 일하던 큰아들은,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풍악 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춤과 노랫소리를 듣게 됩니다.
집 가까이 와서야 그는 이 잔치가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흥청망청 날려버린
그의 배은망덕한 동생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 본 큰아들은 그의 돌아온 동생을 얼싸안고 기쁨에 겨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아니, 어쩌면 이 짧은 시간에 그의 못된 동생이 자유를 얻어,
행복해 하고, 축복 받을 수 있을까' 그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눅 15:28)이라고
그의 불편한 심기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같이 들어가자고 권하지요. 그때 큰아들이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따지고 듭니다.
"아니, 아버지 이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잘 섬겨 왔습니까.
언제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은 적이라도 있던가요?"
자, 큰아들의 모습을 보세요. 우리와 얼마나 비슷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 왔습니까.
올바른 일들만 해야겠다고 결단하고 이를 악물고 이를 지키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이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
저야말로 늘 보여지는 외적 행위에만 사로잡혀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저를 한번 보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을 알아왔습니다.
저는 세상에 빠진 적도 없어요. 담배를 피워 본 적도, 마약을 한 적도, 간음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야말로 주님 위해서 평생을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 '죄인 된 삶을 살다가 예수께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신자'를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새 신자는 예수를 믿자마자 춤추고 기뻐하며
즐거움에 겨워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기도 하더라구요.
아마 그 사람이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께 나와서 죄책감과 정죄함 또는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해방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웃는 낯을 보이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저는 앉아, 그를 바라보면서 생각하기를,
"아니, 이 사람이 노래부르고 찬양하고 있쟎아?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거룩해서 이러는 걸까?
나는 그래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무척 노력했는데.... 난 벌써 몇 년째 하나님을 섬겨왔잖아.
그래도 난 아직 부담과 걱정이 있어. 어쩔 때는 죄책감에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
근데 이 사람은 오자마자 춤을 추는 군.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단순히 믿어버리고 나보다 더 잘나가는군. 주님, 이건 말도 안됩니다.
이 친구는 이렇게 자유한데, 난 왜 이리 복잡해야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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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은 수년 동안 아버지를 위해 일했건만
진정한 기쁨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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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큰아들은 바로 초라한 목장 오두막에 돌아가서 언제나
그가 자신의 분깃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참자. 언젠가, 내가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거야.
난 엄청난 축복을 받고 엄청난 보물창고도 소유하게 된다구..."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축복들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천국만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나와 그 동안 수년간을 같이 있었지 않았니, 그리고 네가 구하기만 했다면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네 것이었지 않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지 못하겠느냐?
그런데 너는 와서 한 번도 그 것들을 구한 적이 없었지 않느냐"
자, 제가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그래 몇 해 동안이나 밖에 계셨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엄청난 보화를 쌓아 놓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 보화를 수취인 불명으로 놓아두십니까?
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탕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먼저 '들어가서, 거기 있는 아버지의 보물들을 누리는 것'이죠.
탕자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에게 주어진 엄청난 용서와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모두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그가 세상에서 이미 경험했던 축복들을 하늘에서 또다시 완벽하게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더 큰 죄는 집에 살면서, 순종하며, 결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던
그의 큰형이 지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물질을 노는데 써버리고,
아버지를 떠났던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커다란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더 커다란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엄청난 값을 치루어 가면서
우리에게 주신 그 풍성한 자원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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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제 실패와 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풍성함에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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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도망갔던 아들은 벌도 받지 않았고, 꾸짖음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죄에 대해 추궁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회복하심은
죄에 그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탕자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있었고,
경건한 눈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랑의 잔치 자리,
축제의 자리로 들어갈 때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합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이 이제 집에 돌아왔고, 그는 용서받았다.
이젠,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시간이란다."
자, 여러분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난뱅이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의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자신들의 약점과 실패들과 과거의 잘못들에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볼 때마다, 실망만 하게되지요.
이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 안에 죄책감이 침투하도록 허락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의 믿음의 창조자요,
종결자(the Author and Finisher of your faith)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탄이 와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약점을 지적할 때,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도 이미 모두 알고 계시지, 하지만 그분은 나를 아직 사랑하시고,
내가 승리하고, 또 계속해서 그 승리 안에 거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어".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1 3:20). 하나님은 아직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와서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가거라. 나의 창고는 늘 열려 있단다."
실제로 하나님의 창고문은 넓게 열려 있고, 그분의 풍성함은 차고 넘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 강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6).
자, 여기에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는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서 여러분들이 모든 시험과 어려움을 이기도록,
필요한 은혜와 자비를 크게 구하십시오. 자, 그러면 아마 사탄이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여러분들을 죄책감과 두려움과 정죄함으로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탄이 말할 것입니다.
"거봐라, 네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네 안에 온갖 더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야!"
여러분, 저는 오래 전에 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시커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것이 언제나 새하얗습니다.
왜냐구요? 제 마음은 어린양의 보혈로 덮여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느끼는 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깨끗이 잊어버리셨습니다.
둘째,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그 분의 계획임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아버지, 저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원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어서 와서 이것들을 누려라!"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초청하십니다.
셋째, 말씀으로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믿음으로, "주 예수님, 당신의 평안이 넘치게 해주세요,
당신께서 평안을 저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니, 제 영혼에 안식을 주세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것을 맘대로 이용하거나, 무시해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러분들이 각자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고 누리고 있을 때만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 집에는 풍성한 양식이 있다"
넷째, 말씀을 붙들고 두려움과 죄책감과 정죄함을 깨끗이 제해버리십시오.
그냥, 철저히 무시해 버리세요.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마귀보고 나에게 거짓말을 해보라고 해!
나의 아버지께서 이미 나를 알고 계시고, 용서해 주셨으니, 나는 이제 깨끗해 졌어.
이젠 내게 죄책감이나 정죄함이 없지. 나는 자유하다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성령님께 이 진리를 확실히 붙들도록,
또 그 안에 거하도록 도움을 구한다면, 앞으로의 날들은 정말 여러분들이 경험했던 것 이상의
축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자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주 예수님, 저는 제가 실수할 거라는 것 압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저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내가 승리의 삶을 살고 누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분의 창고로 나아 오십시오. 그리고 그 자상한 아버지께 여러분들의 것을
담대하게 구하십시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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