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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참 뜻을 알라 / 존 비비어

LNCK 2018. 5. 16. 18:51

 

은혜의 참 뜻을 알라                      고후 6:17                 스크랩

 

 존 비비어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후 6:17)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을 성결케 하라고 명하셨다.

그분을 위해 구별될 때 그들이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똑같은 명령이 주어졌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건졌다. 이제 너희 속의 세상을 떨쳐내라!"

 

순종이 곧 그분의 영광을 보기 위한 준비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옷을 빨라"고 명해야 했다.

그들은 애굽의 오물을 씻어내야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고후 7:1).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를 씻어 주실 것"이라든가 "예수의 피가 너희를 씻어 줄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원어를 보면 더 확실하다.

 

'온전히 이룬다'는 헬라어 사전에는 "책임지고 끝내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수행하다, 마무리짓다"로 풀이돼 있다.

 

자신을 깨끗케 하는 일은 시작부터 실천까지 우리 책임이라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그 일을 할 수 없다.

 

은혜란,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힘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뭔가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은 그 잠재력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분이 거룩함을 통해 이 세상의 덫에서 벗어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율법은 외적 구속이지만 은혜는 내적 변화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덮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은혜는 덮는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살아갈 힘과 능력을 준다.

 

요한은 말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7)

 

예수님은 은혜를 도입하신 분이다.

은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어

율법의 죽은 공식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

 

율법은 외적 구속이지만 은혜는 내적 변화다. 

은혜를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더 느슨해진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실은 반대다. 은혜 아래 그분의 기준이 더 높아졌다! 

율법 아래서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은혜의 새 언약 아래서는 '행동을 원하기만 해도' 해당된다?

- 지금껏 현대 교회가 가르치고 경험해 온 은혜가 정말 이런 것이던가?

이 은혜가 무조건 덮는 것처럼 들리는가?

아니면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은혜로 도우심, 즉 은혜는 도우시는 힘)으로 들리는가?

 

은혜가 그저 덮는 것이라면, 예수님 자신이 주고자 하신 바로 그 은혜에 상치되는 셈이다. 

하지만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2:11-12)

    

은혜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욕심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의 진수다.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12:28)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부정한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심령에

아무런 변화(앞 장에서 '고통'이라고 말함)도 없다.

 

거룩함의 열매는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다.

 

"하나님이 제 마음을 아십니다!"

일전에 나는 기도 중 주님의 말씀을 받았는데 우리 교회들에서 가르쳐 온 것과

너무 상반되어 깜짝 놀랐다. 사실 그것이 정말 그분의 음성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들려주신 음성을 성경에서 확인했다.

주님이 기도중에 내게 (내적 음성, 내적 감동으로) 말씀하신 첫마디는 이것이다.

 

",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모두에게 내가 처음 말한 것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임을 유의해 보았느냐?"

 

첫째 교회: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2:1-2)

둘째, 셋째, 넷째, 다 마찬가지 

일곱째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3:14-15)

    

'어쩌다가 우리는, 그분이 이토록 강조하시고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일까?' 

그 때 주님의 두번째 음성이 나를 사로잡았다.

      

", 내가 어느 교회에게도 '내가 네 마음을 아노라'고 말하지 않은 점을 유의해 보았느냐?"

      

단정치 못한 세상적 삶을 살면서도 자기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확신에 가득차

"하나님이 제 마음을 아십니다!" 라고 말하는 신자들을,

나는 상담실에서 알마나 자주 만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좋은 의도나 소원이나 옳은 길에 대한 지식을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 행위를 보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되었느니라" (2:22)

 

 

"주여, 주여" 하면서도 복종치 않는 사람들 

1980년대 말, 나는 기도 중에 섬뜩한 환상을 받았다. 

너무 많이 숫자를 해아릴 수 없는 허다한 무리가 보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큰 무리였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 모여 "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5:34) 는 주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입성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들려온 주님의 말씀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기노스코 - 헬라어:친밀하게 알지)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였다.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어떻게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할 수 있었는가?

 

대답은, 이 사람들이 단지 구원의 이득을 위해 예수님 편에 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처럼 그들도 구원 받으려고 그분을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그분의 공급을 받는 선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그분을 구한다.

그들의 섬김의 동기는 사랑이 아니라 사욕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친밀하게 아신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14:24)

 

 

유다의 동기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듯 보였다.

 

유다는 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곁에 남았고,

다른 제자들이 떠날 때도 떠나지 않았다 (6: 66).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고 복음을 전파했다 (9:1-2).

열한 제자라고 하지 않았다. 열두 제자에 유다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유다의 동기는 처음부터 옳지 않았다. 

그는 이기적인 삶을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3년 반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도 그분을 전혀 몰랐다! 

오늘날에도 유다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사역을 위해 희생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성령의 은사에 따라 봉사하지만  

그분을 친밀히 알지 못한다. 

그들의 수고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싹튼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8:35)"

      

내 목숨을 잃기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부자 청년은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감정적 갈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잘못된 은혜 교리로 하나님의 불을 꺼뜨리지 말라 

오늘날의 은혜 메세지는 이렇게 예찬할 때가 많다.

 

"예수를 믿고 영접 기도를 드리고 구분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라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자아와 세상을 부인하라는 얘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일단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거룩한 삶을 위해 은혜가 가져다 주는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회심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불순종하고 거룩하지 않게 살아도

하나님의 백지 은혜로 다 덮어질 줄로 생각한다.

 

우리 교회들에 하나님의 불과 능력이 없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불이 없어 미지근한 상태에 젖어 든 수많은 교인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진다.

경고와 격려가 함께 있다.

 

경고는, 잘못된 은혜 교리로 인해 은혜를 헛되이 받아 실격하지 말라는 것이다.

격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아갈 힘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당신에게 함께하기 바란다.

 

 

기꺼이 성화되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한 차가운 자들과 뜨거운 자들은

자신에게 속고있지 않으나 미지근한 자들은 속고 있다.

 

그들은 자기 상태를 실제와 다르게 알고 있다.

자기들이 예수님께 속한 줄로 착각하고 있다.

 

노골적인 죄인들보다 그들이 더 나쁜 상태일 수 있는 이유가 거기 있다.

죄인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음을 알며, 따라서 그들에게 다가가기는 훨씬 쉽다.

 

미지근한 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줄 안다.

그들은 은혜로 인한 구원을 고백하지만 정작 자기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했다.

 

자기가 구원 받은 줄 아는 자들은 구원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3: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9:12)

      

이것이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게 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구할 때,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불순물들을 제하실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과 의중을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제련하면, 좋은 부분은 더 강해지고 약하거나 더러운 부분은 깨끗해지거나 제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 불로 연단한 금을 그분한테 사서

부요해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아닌 영원한 부다.

    

"성의 길은 맑은 (투명한 ) 유리같은 정금이더라" (21:21) 

불 시험으로 제련될 때 우리는 투명해진다! 

투명한 그릇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고 담겨진 내용물에 영광을 돌린다. 

우리가 제련될수록 세상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더 뚜렷이 볼 수 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