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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낭독 <가슴 찢는 회개> 10편
◑통증이 사라지다
우리 내외가 가장 많이 설교 초대를 받은 곳이 남양주에 있는 동부광성교회(김호권 목사님)다.
김호권 목사님은 1979년 후반 카투사로 군 복무하던 시절에 만나서
늘 은혜를 베풀어 준 친구 목사님이다.
동부광성교회의 양시영 집사님이 허 선교사에게 자신의 병원에 한번 오라고 초대했다.
당시 허 선교사는 임상실험용 항암약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용하던 항암제에 내성이 생기면 암 크기가 다시 커졌다.
항암약을 바꿀 때마다 완치를 기대했다.
2011년 1월 경기도 덕소에 위치한 양시영 내과를 방문했다.
김호권 목사님의 배려로 목사님 집에 머물면서 집중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양시영 내과에서 광양자 치료를 받고 나서 칼로 살을 베는 것 같은 통증이 줄어들더니
세 번째 받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허 선교사는 통증이 없으니 너무 좋다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다.
말기암 환자에게 통증이 없다면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허 선교사가 주님 나라에 갈 때까지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양시영 집사님,
김호권 목사님 내외, 그리고 동부광성교회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에겐 생명의 은인처럼 감사한 분들이다.
그렇게 통증이 사라지고 항암약도 하루 한 알 먹는 걸로 교체되자,
허 선교사가 아마존에 가고 싶다고 했다.
2010년 암이 재발되면 서 오래 비운 아마존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2011년에 아마존을 두 차례 다녀갈 수 있었다.
허 선교사가 아마존에 돌아와 약 두 달간 머물게 되었을 때,
나는 허 선교사에게 신학교와 교회를 맡기고 일주일간 선교 여행을 떠났다.
우리 교인 중에 신문기자가 있는데 그 자매와 같이 선교 여행을 떠나면
브라질 전역에 우리가 벌이는 선교 사역을 소개할 수 있 겠다 싶어서였다.
치과 환자와 일반 환자 400명에게 도움을 준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허 선교사가 주일날 아침 저녁 두 번이나 설교단에 선 것이 무리가 됐는지
울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내 욕심을 채우자고 암환자에게, 그것도 재발한 암환자에게
그렇게 무리한 짐을 지웠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회개가 안 되었던 것이다.
◑아마존에서 맞은 겨울
15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잔느 귀용은 인생에는 내면의 겨울과 외면의 겨울이 있다고 했다.
그 해 우리는 내면의 겨울과 외면의 겨울을 함께 맞았다.
허 선교사의 말기암 투병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교회와 신학교, 그리고 나 개인에게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11년이나 우리를 돕던 가정부가 우리를 노동법을 관리하는 판사에게 고소했다.
그 가정부의 아들도 우리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 사역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로 그 아들도 신학교를 나갔다. 사람들은 “집 안에 독사를 키웠다”고 수군거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족처럼 사랑했는데 그 모자의 배신은 커다란 아픔이 되었다.
얼마 후 또 다른 사역자가 우리를 크게 낙심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음악을 아주 잘하고 머리가 영민하여 신학교 졸업 후 결혼을 시키고
사역자로 양육하던 제자가 신학교의 독신 사역자를 임신시킨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학교 명예에 커다란 손실을 입었고, 인디오 형제들이 크게 낙심했다.
한편, 교회에 큰일이 생기면 언제나 발 벗고 나서서 헌신하고
새벽예배에도 절대 빠지지 않던 여성도가 남편과 이혼을 했다.
이 사건은 우리 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도시에서 이만한 사건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노력하고 헌신하여 쌓아 온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와 인디오 형제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신학교와 교회, 가정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모욕을 받아야 했다.
그때 우리는 알았다. '주님이 우리의 옷을 벗기시는구나,
나뭇잎을 모두 떨구어 가지만 앙상한 겨울나무로 만드시는구나...'
우리는 묵묵히 이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다.
내가 주님을 사역으로 오해하고 우상으로 섬기는 것을 까발려서 보여 주셨으니
마땅히 모욕 받으며 회개하였다.
부족한 선교비로 인해 내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지 밝혀 주셨다.
주님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 염려하는 것들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가지는 우상들임을 가르쳐 주셨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면 또 껍질이 나오듯이 계속해서
우리의 문제들을 계시하여 회개하게 하시고 그것들에 대하여 죽게 하셨다.
“주님, 우리가 가졌던 내가 한 일이라는 모든 선함의 옷을 벗기소서. 그리고 당신께로 가게 하소서.”
◑언더우드 선교상을 받다
언더우드상이 제정된 첫해부터 신촌교회 오창학 목사님이 내게 언더우드상을 권했다.
오 목사님이 서류를 보내서 어쩔 수 없이 작성했다. 그런데 수상이 거절되었다.
선교한 지 10년도 안 된 데다 여러 면에서 자격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여러 분들이 언더우드상에 추천하겠다고 했으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2012년 허 선교사의 영적 아버지인 음동성 목사님(동교동교회 원로목사)이 강권하기에
서류를 준비했다.
심사를 거쳐 수상자로 발표되고 얼마 후 학교 측에서 시상식 전에
사진을 찍자고 하여 허 선교사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지금도 어쩌다 그 사진을 볼 때면 부끄러워서 숨고만 싶다.
어째서 그토록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수상 소감도 겸손하게 잘했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나는 너무나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입술로는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한국이 어두운 밤이었을 때,
아무 소망이 없을 때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님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이고 헌신적으로 산 언더우드 선교사님을 기리는
그 귀한 상에 누를 끼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죄를 먹고 마시는 속물이었다.
아들 지훈이는 한국과 브라질, 콜롬비아, 미국을 전전하며 공부했다.
딸 수산나도 여러 나라를 거치며 공부했다. 수산나는 언제나
우리 사역을 돕거나 동생 지훈이를 돌봐 주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지훈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아들은 나이가 들면서 입을 닫았다. 오직 나와 단둘이 있을 때만 겨우 입을 뗐다.
그때를 이용해 이러저러한 질문을 했지만, 아들은 좀체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들은
“내가 너무 힘들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제는 제발 좀 쉬게 해 달라”
고 했으나 허 선교사의 설득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단과대학에 들어갔다.
1년쯤 다니다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한 뒤 2년제 성서대학에 가겠다고 해서 다시 입학을 했다.
하지만 3개월도 못 다니고 그만두 더니 집을 나가서 연락을 끊어 버렸다.
우리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주님 이 아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고 서원을 했다.
하지만 아들은 아무리 기도해도 어긋나기만 했고
우리 부부를 십자가로 더 가까이 데리고 갈 뿐이었다.
그런 아들이 허 선교사가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주님께 돌아왔다.
국제기도학교(International House of Pray, IHOP)에 들어간 뒤 회개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다.
지금은 전도사로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그날 평생 아이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평생 아이들에게 빚을 졌다고 서로 고백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 것은 죄가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 부부의 높은 윤리적 잣대로 아이들을 다룬 것이다.
율법의 종노릇을 하며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필요할 때 우리는 그들 곁에 있지 못했다.
사역에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배려하지 못했다.
아들은 요즘도 때때로 말한다.
“아빠가 필요할 때 아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나는 “맞다, 미안하다. 아들아, 평생을 사과하마” 하고 말한다.
나는 아내에게 욥의 친구처럼 굴었다
욥의 친구들이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왔다.
실상을 보니 너무 참 담해 그들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7일 동안 침묵하며 욥의 곁을 지켰다.
욥은 친구들이 7일간이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욥 4:7)라고 말한다.
즉 네가 죄가 있으니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화살을 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에 욥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걸까?
엘리바스가 욥의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주님이 욥을 대하는 방식을 몰랐을 뿐이다.
나도 투병하는 허 선교사에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여러 가지 충고를 했다.
“당신도 나처럼 살려 달라고 기도 좀 해. 나는 손이 발이 되고,
발이 손이 되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데
왜 당신은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지? 나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기도해”
라고 조르고 졸랐다.
그러다 “당신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니야?
제발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용서해”라고 다그쳤다.
나는 고통 중에 있는 허 선교사의 위대한 정결함을 보지 못했다.
나는 허 선교사가 안식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엘리바스처럼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쏘아 대는 정죄의 화살 때문에 허 선교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
하지만 당시는 내가 잘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죄인인 내가 의인인 허 선교사를 핍박한 것이다.
허 선교사는 암 투병 중에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었다.
허 선교사가 이 완전한 연합에 대하여 간증했을 때,
나는 율법에 매인 소경이라서 그 말을 듣지도 못했고 은혜 받지도 못했다.
가장 가까운 내게 전해 주고 싶었을 체험과 간증을 들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
허 선교사는 평생 자기 목숨보다 인디오 형제들을 더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암 투병이 시작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빛이
더 찬란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허 선교사는 주님과 연합을 이루었기에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떠난 상태였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미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허 선교사도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간곡히 사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허 선교사는 자기가 떠나면 이 땅에 남겨질 나와 두 자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병원 치료를 받았다.
사랑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 주고 떠났다.
우리가 그 사랑을 기억하고 붙들고 살아가라고 그렇게 한 것이다.
누가 허 선교사를 찾아오면 주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통증이 심해서 밤새 잠을 자지 못해도 전화로 상담을 요청하면
전혀 괜찮은 사람처럼 몇 시간에 걸쳐 마음을 다해 격려하고 위로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암이 더 진전되고 악화된 상황을 알릴 때도 나와 아이들이 걱정할까 봐
마치 다른 사람 얘기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모질고 힘에 겨운 고통을 당하면서도 허 선교사는
하나님 아버지가 행하시는 최선의 사랑을 신뢰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기도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 53:10-12
허 선교사는 주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셨다고 믿었다.
그리고 본인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포도주가 되고 떡이 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잘 통과하면 그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을 바라보았다.
그 믿음은 나를 변화시키고 아들과 딸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만 길을 찾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켰다.
허 선교사가 세상을 떠난 뒤 내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허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인생이 변했다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허 선교사는 암이 전이되고 복수가 차서 흉관을 통해 복수를 뽑아 낼 때도
설교 초대를 받으면 긴 치마에 고무 주머니를 다리에 달고 가서 설교를 했다.
말기암 통증이 너무 커서 모르핀이 든 진통제 를 24알씩 복용하면서도
본인이 십자가의 복음을 삶으로 살아 내고
소유한 증거들을 전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설교가 끝나면 먹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구토를 수없이 하고 자동차 좌석에 앉을 수도 없어서 뒷좌석에 누워서 집으로 돌아갔다.
허 선교사의 설교는 가장 진실하게 쏟아 낸 유언과 같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한국 교회를 향한 선지자의 호소였다.
이렇게 허 선교사가 선포한 설교 18편이 유투브에 올랐고,
그것을 모아 《내가 왕바리새인입니다》와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라는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나도 당신한테는 여자예요”
든든한 아내가 있고 가냘픈 아내가 있다고 한다.
허 선교사는 든든한 아내였다.
무슨 일이든 맡기면 탁월하게 잘했다. 설교도 나보다 뛰어났다.
육아와 살림, 음식도 잘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도와주는 손도 컸다.
눈썰미도 좋아서 우리 교회 예배당은 물론 신학교 채플과 사택의 밑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무엇을 하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생활을 편리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그녀는 없지만 신학교와 교회, 병원선 등 모든 곳에 허 선교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워낙 출중하다 보니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항상 허 선교사에게 질투를 느끼곤 했다.
허 선교사는 운전도 나보다 훨씬 잘했다.
투병 중이어서 내가 운전하면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타박했는데
그러면 나는 속으로 내 약점을 꼭 이렇게 건드려야 하나 싶어 화가 났다.
허 선교사가 주님께로 돌아간 다음에야 나는 운전이라도
편하게 못해 준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
허 선교사는 나와 헤어지고 만날 때 눈물을 보이는 가냘픈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 선교사를 두고 “여장군 같다”
“여걸이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허 선교사를 필요로 할망정 허 선교사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암이 재발하고 나서 뜻밖의 말을 듣고 나는 몹시 놀랐다.
“나도 당신이 그립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그랬다. 세상의 모든 아내처럼 허 선교사도 나의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아니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데 약해지지 않게 하려고.”
나는 허 선교사가 아내로서 그런 희생을 감내했는지 몰랐다.
내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사역에만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아픔과 희생을 몰랐다.
허 선교사가 떠난 후 비로소 나는 가슴 찢는 회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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