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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여

LNCK 2018. 7. 21. 21:35

◈이 아이여               눅1:6~80                             유관지 목사, 출처보기 

  


▲오늘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한 말입니다.

성경은 이 말이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한 예언이라고 6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사가랴의 이 말은 예언이면서 동시에 찬양이며

또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대해 지녀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찬양입니다.

-둘째는 기대입니다.

-셋째는 겸손입니다.

 

76절에 나오는 "이 아이여"하는 말은 감사, 기대, 겸손을 함축하고 있는 호칭입니다.

 

◑첫째, 감사입니다.

 

사가랴의 예언은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하는 감사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을 바라보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말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무자식 상팔자", 또 "자식이 원수"도 기독교 신앙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모르고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기는 하겠지만 이 말에는 자식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들어 있지요,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가져서도 안 될 생각입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사가랴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더구나 이 찬양, 이 감사는 사가랴가 오랫동안 말을 못하다가, 벙어리 생활을 하다가

말을 하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사가랴가 벙어리 생활을 했습니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우리는 장님이라든가 귀머거리라든가 하는 말을 써서는 안됩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이렇게 말해야합니다.

 

사가랴는 벙어리 생활을 하다가 혀가 풀렸는데

벙어리는 무슨 장애인이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장애인 전문가에게 물어보니까

농아인(聾啞人)이라고 하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리고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닙니다. 비장애인입니다.

장애인의 반대말이 정상인이라고 하면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라는 뜻이 되는데

장애인은 비정상인이 아닙니다. 그저 조금 불편한 사람일뿐입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네 아내 엘레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음을 요한이라 하라"했을 때(13절) 사가랴는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나이다"했습니다(18절).

천사 가브리엘은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20절).

불신앙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태어났을 때 이웃과 친족들이 모여 이름을 정할 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네 친족 중에

그런 이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최종 판결을 아버지 사가랴가 해야 할 형편이 되었는데

말 못하는 아버지는 서판(書板)을 달라고 해서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에 따랐습니다. 그 순간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불신앙으로 입이 닫혔고 신앙으로 순종함으로 입이 열렸습니다.

 

▲우리도 신앙이 약해지면, 불순종하게 되면 ‘영적인 농아인’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기도가 막힙니다. 세상에 대해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이 회복될 때 기도의 문이 열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하게 됩니다.

영적인 비장애인이 됩니다.

 

사가랴는 오랫동안 농아인 생활을 하다가 비로소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는데

첫 마디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많은 교훈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맞이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해야합니다.

 

아까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기독교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것이 많다고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서 "지긋지긋해!" 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비신앙적인 말입니다.

일어나서 첫마디를 그렇게 하면 그 하루는 정말 지긋지긋한 하루가 됩니다.

 

"새로운 하루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

감사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 하루가 됩니다.

 

하루를 끝낼 때도 감사로 끝내야 합니다.

 

▲어떤 분이 혀 암에 걸려 혀를 절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이제 잠시 후면 말을 못하게 될 터인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십시오"라고 하자 이 환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고 합니다.

 

본받고 싶은 믿음입니다.

 

사가랴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감사 찬양 가운데 태어난 세례 요한이 큰 일을 했습니다.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눅7:28).

 

여러분, 자녀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 자녀가 크게 될 것입니다. 성공할 것입니다.

 

 

◑둘째, 기대입니다.

 

76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너는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백성들에게 구원을 알게 할 것이다"

 

자기 아들 요한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기대한 대로 되었습니다.

아니 기대한 것 이상으로 되었습니다.

 

▲말라기 이후에는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없었습니다.

이때를 신약과 구약의 중간 시대라고 하는데 이 때는 선지자들이 없었습니다.

말씀의 공백상태였습니다.

 

그 사이에 정치적인 형편은 좋은 때가 있었습니다.

마카비 왕국이라고 독립왕국 시절이 있었습니다.

 

노예생활, 포로생활, 식민지 생활,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독립왕국 시절이 있었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언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의 역사는 각광을 받지 못합니다.

역사는 반드시 외형적인 번성과 화려함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침묵을 깨고, 이 공백상태를 마감하면서

다시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선지자 가운데 선지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대한 대로 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나 학교에서는 엉뚱한 아이로 알려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들에게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어머니가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아인슈타인, 에디슨, 기대한 대로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대 속에 자라는 자녀가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도로우 로우 홀트라는 사람이 쓴 시입니다.

 

만일 어린이가 꾸지람을 받으며 자란다면.. 그는 나무라는 것을 배우며

만일 어린이가 적대감을 느끼고 자란다면.. 그는 싸움을 배우며

만일 어린이가 어리석다고 느끼고 자란다면.. 그는 부끄러움을 배운다.

 

그러나 만일 어린이가 관용을 느끼고 자란다면.. 그는 인내를 배우게 되며

만일 어린이가 용기를 느끼고 자란다면.. 그는 확신을 배우게 되며

만일 어린이가 공정한 평가를 받고 자란다면.. 그는 정의를 배우게 되며

만일 어린이가 인정을 받고 친절을 느끼고 자란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자녀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원로목사님인 김찬국(金燦國) 목사님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동창회 회지 편집을 여러 해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 두 번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관례인데

저는 넘겨주지 못하고 유난히 오래 맡아 고생을 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15, 6년 전의 일인데 한번은 김찬국 목사님이 동창회 고문의 자격으로

동창회의 일을 여러 가지로 점검한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동문들 간의 연락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피면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아나갑니다.

 

하나하나 살펴 나가다가 "동창회 회지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했습니다.

동창회장이 "그건 유 아무개 동문이 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까

"그래요? 그러면 그것은 그냥 넘어 갑시다"하셨습니다.

 

'네가 맡고 있으니까 다른 소리하지 않겠다. 믿는다. 기대한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은사가 믿고 인정하고 기대하고 있다는데,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기가 쉽지 않았고

또 대강 대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기대하고 신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시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겸손입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너는 주가 아니다,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했습니다.

 

▲사가랴의 이 예언에는 사적인 관심사가 없습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까,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할까,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적인 욕심은 볼 수 없고, 하나님께 대한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가랴의 부인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 간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려주면서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지요(눅1:36~37).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 가서 석 달쯤 함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이 때 천사가 한 말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아니 알려주기 전에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미 알고 찬양한 일이

누가복음 1장 40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주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친족 간인데 나이로 보아서 엘리사벳이 웃 항렬입니다.

 

또 사가랴는 제사장이고 엘리사벳도 제사장 족속인 아론의 자손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입니다. 메시아라면 제사장의 가문에서 나는 것이

아무래도 더 어울립니다.

 

그러나 요셉은 "네가 주가 되어야 한다, 메시아가 되어야한다"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주 앞에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했습니다.

 

▲사가랴의 예언 가운데 많은 부분은 사실 요한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69절에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구원의 뿔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78절 이하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돋는 해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이제 해가 돋습니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힘차게 우는 닭에 그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가랴는 요한에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는 오히려 자녀를 잘못되게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의 기대였습니다. 겸손한 기대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겸손함이 있어야겠습니다.

 

▲본문은 요한이 태어나서 팔 일이 되어서 할례 받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59절).

예수님도 태어나서 팔 일이 되어서 할례를 받고 이름을 예수라고 했지요.

이 날, 그러니까 1월 1일을 교회력에서는 명명절(命名節)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이 주일에는 유아세례를 주는데 꼭 일치하지 않지만

할례와 세례나 의미는 같습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어린이들의 부모님들, 감사와 기대와 겸손함을 담아서

"이 아이여" 하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여"는 "아가야!"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라면서 심령이 강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세속화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아버지의 집에서 평범하게 자랐다면

그는 평범한 제사장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유대의 제사는 대단히 형식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빈들에서 자랐기 때문에,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와 기대와 겸손 속에서 양육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심령이 강해지고 세속에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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