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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러운 이웃 신22:1~4 2017.5.17. 출처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신22:1
이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남의 일에 불필요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참된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웃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오가는 길에 늘 이웃 집을 들여다보고
‘오늘은 이웃 집에 손님이 찾아왔네’
‘오늘은 빨래를 일찍 널었네’
‘오늘은 저 색시가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하네’
이런 식으로 이웃집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건 흉을 볼 구실을 찾는 것이고
남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건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이웃에게 관심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것은
프라이버시의 존중입니다
파파라치처럼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간섭하는 것은
그건 오늘날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남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 적절한 범위 안에서 이웃을 돕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렵습니다
신사숙녀이면서 이웃이 되어주는 것!
본문은 4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날도 새로운 말씀입니다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느냐?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이에요
내가 남의 인격을 침해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간섭하지 않고
남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갖지 않고
남이 상처를 입든가, 불편하게 느끼게 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형제 자매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이것은 어려운 것이고
상당한 지혜와 절제와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성숙함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께서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자에게
길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가 좋던?’
‘외로웠니?’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시간을 많이 요구하지 않으셨고
(가급적 빨리) 보내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우리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만 기억하는데
예수님은 그 여성을 곧 보내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붙잡아 놓고 꼬치꼬치 질문하지 않았고
그의 사생활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이웃의 역할, 형제 자매의 역할을 할 때는 해야 되는데
하고 난 다음에는 잊어버려야 됩니다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끈적끈적하게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을 침해하고
사생활을 침해하게 되어
다시는 본인의 고민을 우리에게 고백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보내야 됩니다
내 참견의 영역으로부터
내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으로부터 보내야 됩니다
더 이상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닌 때가 옵니다
비록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누구의 이웃이 되게 하셨더라도
내가 이웃의 역할을 다 했으면
나는 내 길을 가야 되고, 그는 자기 길을 가야 됩니다
그게 아니고 ‘너는 이제 내게 빚졌어!’
뭐 이런 식으로 끈적끈적하게 한다든지
개인적인 요구를 한다든지 간섭을 하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이웃의 역할도 아니고, 형제 자매의 역할도 아니고
그것은 인간의 육신적인 미련일 뿐입니다
▲‘거룩하다’ 라는 말에는
건강하다 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대 언어가 처음 계발될 때
거룩하다 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가 ‘상투스’입니다
‘상투스’ 라는 라틴어로 거룩하다 인데
불어로 가서는 ‘상떼’, 건강이란 말로 발전합니다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거룩하다 라는 단어에서 시작했는데
그것이 건강하다 라는 단어로 발전한 것을 보면
과거 사람들은 인간의 거룩함 속에는
건강함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생각이 건강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심리가 건강합니다
어떤 심리가 건강한 것입니까?
열등의식을 가졌다든가,
애정결핍에 시달린다든가,
보상심리를 갖고 있다든가,
남의 아픔을 통하여 위로를 얻으려고 한다든가,
이런 것은 다 건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그런 속성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죄 많은 인간의 이웃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심리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죄의 현장을 볼 때
한 편으로는 죄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죄에 대한 호기심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래서 ‘어머 어머머 쟤 좀봐! 어머 어머!’
그 말은 한 편으로는 거부하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가진다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인간에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을 건지려고 하는 것이 위험할 때가 많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겠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사람의 죄의 삶에 넘어가서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자기가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처럼 동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건강했던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거룩하고
죄가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의 역할을 하려면,
이웃의 잃은 양을 찾아주지만
그 이상으로 이웃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이 구절(신22:1~4)에서
이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어떻게 이 구절에서.. 아마 여러분이 이 구절을 읽을 때
‘목사님이 남의 양을 찾아주라고 하시는 구나!’
그러나 이게 남의 양이라고 알아볼 줄 안다면
서로 상당히 가까운 이웃입니다 (남의 속 사정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에 누가 양과 소를 가졌습니까
그러니까 남의 집 개라든가,
잃어버릴 게 개나 고양이,
누가 주차장에 자기 물건을 놓고 갔는데
그걸 보고 ‘어 저것은 이웃집 여자 거야’ 알 정도면
평소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걸 찾아주지만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 한 잔 대접해 주셔야 되지 않아요?’
‘찾아 준 사람에게 보상 좀 해야 되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그건 이웃의 역할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선한 이웃의 역할을 벗어나서
내 요구를 하는 것이죠
불필요한 간섭!
‘이게 저 집 강아지야!’ 라고 알아볼 수 있다면
평소에 무심하지 않다는 얘기지만
찾아주고 난 다음에는 내 역할은 끝난 것입니다
그 이외로 ‘왜 강아지를 잃어버렸는지,
그 집 식구들이 그 개를 다 좋아하는지,
가족들이 다 화목한지..’ 그건 not my business
그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에요
▲내게 상담을 하기 위해서 왔다면 좀 다르겠죠
그게 아니라면
남의 양이나 소를 찾아준 다음에는
나는 내 길을 가면 되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을 가면 됩니다!
이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런 사고방식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때로는 ‘너는 너고 나는 나지!’
끈적끈적 해가지고 ‘너도 나고 나도 너고!’
그게 사랑이 아니에요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얼마나 많은 문제 있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문제를 도와주고 병을 고쳐주는 그 일만 하셨지,
그 이후에 그들의 사생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으시고
다 보내셨습니다
‘네 집으로 돌아가라’
‘네 친족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 베풀어 주셨는지를 증거하라’
‘제사장에게 증거하라’
이런 식으로 다 집으로 보내셨지,
예수님은 그 일을 엮어서 뭐 당신의 사람을 만들려고 했다든가,
뭐 (사생활을) 참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건 각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해결해야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8년된 병자가 있었죠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 주셨어요
그 사람이 나은 다음에 예수께서 한 번 더 가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더 큰 일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러나 그 죄가 무슨 죄였는지,
뭐 너의 사연이 어떠했는지 일절 물어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는 그런 면이 있었고
그것이 거룩한, 그리고 올바른 이웃에 대한 의무입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방과 후 체육시간이 끝나고
학교 탈의실에 샤워실이 있었습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집에 가기 위하여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 저를 보더니
‘어 얼굴에 비누가 묻었다’고 말했습니다
근데 그게 비누가 아니고 코가 묻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도 그게 코 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비누가 묻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놀랐습니다
처음 본 학생인데, 그 학생이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도저히 전혀 모릅니다
처음 보았고 그 이후에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얼굴에 코가 묻었다’고 지적하면
민망할까봐 ‘비누가 묻었다’ 라고.. 그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이 학생이 어디서 그런 예절을 배웠을까?
남을 배려하는 예절을 어디서 배웠을까?’
저는 그때 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친구가 참 대단했다.. 참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 참 이웃이 귀합니다
참 형제자매가 귀합니다
여러분은 그 역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양을 이웃이 잃었으면 찾아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으로 물어볼 필요 없고,
내가 양을 잃어버렸을 때
그 이웃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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