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해서 고전12:1, 14:1 출처 *방언 모음
◑ ‘신령한 것’이 키워드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들에게
고전 12, 13, 14장, 이 세 장을 가지고
방언에 대해서 말씀 드릴 텐데
고전12, 13, 14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는데
그 키워드가 뭐냐면
‘신령한 것’, 또는 ‘신령한’ 이란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
헬라어로는 퓨뉴마티콘
고전12: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은 몰라라는 말이 아니라, 알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
그러면 고전12:1에서 말하는 ‘신령한 것’이 뭐냐?
그것을 이해하려면 고전 12장을 쭈욱 읽어보면 됩니다
거기서 ‘신령한’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콘인데 형용사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는 반드시 형용사가 있으면,
그 형용사가 수식하는 명사가 있기 마련이고
헬라어는 성, 수, 격은 그 명사에 의해서 결정이 되고
반드시 그 명사와 일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신령한’ 단어가 형용사만 달랑 있고 그 뒤에 따라오는
명사가 원문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용사 다음에 명사가 없으니까
임의로 집어 넣었는데
주로 ‘gift’라는 단어를 집어 넣었어요, 원어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에 영어성경에 보면
gift가 이탤릭체로 되어 있었어요
원어에는 없는데, 번역자가 임의로 집어넣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과연 정말 이 신령한 것이
gift를 가리키냐, 즉 은사를 가리키냐?
그것은 그 다음 문장을 쭉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계속해서 읽어보면 ‘은사’, ‘직임’, ‘역사’ 세 가지가 나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diversities of gifts, but the same Spirit.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differences of administrations, but the same Lord.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diversities of operations, but it is the same God
사실 spiritual 은 은사, 직임, 역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걸 한 단어로 ‘성령의 나타나심 manifestation’ 이라 그럽니다 :7
그러니까 여러분은 고전 12:1을 읽어보면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여기서 ‘신령한’은 은사, 직임, 역사
이 세 가지를 말하고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통털어서
‘성령의 나타나심’ 이라 말합니다 *고전12:7
그러니까 지금 고전12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면
신령한 것에 관한 것이다 :1
신령한 것은 한 단어로 하면 ‘성령의 나타나심’ :7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누면 은사, 직임, 역사입니다
이게 신령한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 :4
신령한 직임 :5
신령한 역사 :6
한 단어로 성령의 나타나심 :7
▲고전14:1에 보면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자 여기서 많은 분들이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 ‘사랑’은 바로 그 앞 13장에서 설명한 ‘사랑’입니다
13장에서 말한 ‘그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14:1
그러나 여기서 ‘신령한 것’이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분명하죠
여기 14:1의 ‘신령한 것’은 12:1에서 말했습니다
12:1 ‘신령한 것에 대해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13장은, 그러나 아무리 신령한 것을 우리가 소유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사랑을 구하고,
사랑 안에서 이 사랑을 가지고
14:1 ‘신령한 것을 사모해라..’ 그 말입니다
이렇게 12, 13, 14장이 일관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다음에 14:1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여기서 ‘신령한 것’은 14:1에서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
그러니 예언은 신령한 것에 포함됩니다
14:1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러므로 14:1에서 ‘신령한 것’은
12:1의 ‘신령한 것’과 같습니다
14장의 신령한 것은 12장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신령한 것’이 키워드 이고
◑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컨텍스트(본문의 배경, 상황)입니다
이 컨텍스트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컨텍스트가 아닙니다
제가 이걸 강조하고 싶어요
왜냐면 14장의 방언을, 행2장의 방언과 똑같은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Context가 중요합니다
행2장의 컨텍스트는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기나라 말로 알아듣는, 쉽게 말해서 그것은 전도의 컨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나중에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그것도 하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전 12장, 13장, 14장
특별히 14장의 컨텍스트는, ‘전도’의 컨텍스트가 아닙니다
‘교회’의 컨텍스트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교회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고전14;12 ‘그러므로 너희도 신령한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12:1, 14:1, 14:12절에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프뉴마티콘’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2b
신령한 것을 풍성하기를 구하라는데
그 컨텍스트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 말은 ‘교회를 집짓듯이 세우기 위하여’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이유는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뭘 위해서요? 교회를 세우기위해서!
그러므로 신령한 것의 문맥context은 어디에요?
교회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너희가 모일 때’ .. 컨텍스트가 교회입니다
:26b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교회로 모여있는데 이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방언이, 행2장 복음전도를 위한 방언이라는 게
왜 문맥에 안 맞느냐면
그럼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면
같은 교인들이니까 같은 나라 말, 아람어로 하면 되고, 히브리, 헬라어로 하면 되지
뭣하러 못 알아듣는 외국말로 해서 통역을 붙입니까?
일례로, 제가 오늘 여러분께 복음을 전하는데
제가 아프리카 스와힐리 어로 하고, 누가 통역을 합니다
뭣하러 그렇게 합니까, 제가 한국말 할 줄 아는데!
그런데 고전14:26의 이 모든 것,
찬송,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이 모든 것을 무엇을 위해서 하라고요?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 14:26
그 말은 ‘교회의 덕을’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라!
교회를 세우라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14장의 컨텍스트는 교회입니다
즉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고전12~14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중략)
12장에 신령한 것을 여러 가지 얘기한 다음에
14장에서는 다른 것을 얘기하지 않고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만 얘기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지금 12, 13, 14장에서
<은사론>을 말하는 게 아니고
<교회론>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너희가 <교회>를 세우려면=교회의 덕을 세우려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적으로
(긍정과 아울러)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방언과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은사는, 다른 신령한 것은
교회를 세우는 데 그렇게 치명적인 영향을 안 줍니다
그런데 무엇이 치명적 영향을 주느냐 하면,
방언, 그리고 예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개인방언과 회중방언 둘 다 말합니다
이 컨텍스트가 중요한데
바울이 이 고린도교회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쟁 가운데 이슈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방언과 통역’이었습니다
그래서 14장 전체는 방언과 예언만 얘기합니다
방언과 예언을 비교해 놓았습니다
방언과 예언을 계속 비교하는 그 기준은
‘방언이 교회에 유익을 세우냐? 예언이 교회의 유익을 세우느냐?’
‘방언이 교회를 세우느냐? 예언이 교회를 세우느냐?’
무엇이 교회를 세웁니까?
예언이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럼 방언은요?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 있고,
세우지 못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은
통역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때
모든 교인들에게 덕이 된다.. 왜냐면 그 내용을 아니까요
그러나 통역이 안 되면
못 알아 들으니까
덕이 안 된다(=건축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개인에게만 유익하다
그러면 혼자 가서 방언기도 해라!
교회로 모였을 때는
통역이 따르는 방언, 이어지는 예언을 통해서
모두가 알아듣고, 거기에서 유익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해라! .. 이게 결론입니다
◑그러면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말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을 못 알아 듣는 것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다
당연히 못 알아 듣는 것이 정상입니다
방언은 못 알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비밀을 말해야 되니까!
그게 다 알아들으면 비밀이에요, 아녜요? (No)
이런 방언을 ‘개인 방언’
그래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말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아듣는 자가 없다!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데
그 비교의 컨텍스트는 교회의 덕을 세우느냐, 개인의 덕을 세우느냐?
3)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보다 못하다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방언을 못 알아들으면 교회 전체에는 유익이 없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는 통역해야 되고
통역을 못할 경우에는, 그것은 예언만 못 하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예언만 못합니다!
4)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된다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5)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6)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통역 없이 1만 마디 방언하는 것보다 낫다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왜요? 못 알아 듣기 때문에!
그런데 만약에 이 1만 마디 방언이 통역이 되어서 알아 들으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상황이 달라집니다 (방언이 더 낫습니다)
▲자 여기까지 보면서 여러분의 느낌을 제가 물어볼게요
지금 바울이 방언을 하라는 얘기입니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그런 문제들을 피해서 방언을) 하라는 얘기입니다!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방언을 하라는 얘기입니다!
▲제가 굉장한 게 컨텍스트 라 그랬습니다
지금 고전14장의 컨텍스트는 교회입니다 ‘너희가 모일 때에’ 14:26
‘너희’는 여기서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예배드릴 때
찬송 시도 있고, 말씀도 있고..
그 가운데 방언도 있고, 통역도 있고, 예언도 있고.. 14:26
모임 가운데 신령한 것이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서 방언은 통역을 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교회 전체에 도움이 안 되니까
그 사람은 조용히 집에 가서 혼자 기도할 때만 방언하고
전체가 모였을 때는 모든 교회가
세움을 받기 위해서는
예언하기를 사모해라..
바울의 <결론>은
“신령한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회중방언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럼 교회 안에서
방언을 어떻게 쓰라고 했는지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14장 후반부에 “회중방언”을 말합니다
혼자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그 개인방언이 아니라
온 교회가 모였을 때, 통역이 뒤다르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알아듣고 함께 세움을 받을 수 있는
그 회중방언의 사용지침에 대해 말합니다
1)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라.. 가 아니라
분쟁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다툼을 위해서 하라.. 가 아니라
자기 자랑을 위해서 하라..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라!
2) 회중방언 할 때는 모두 앞을 다퉈서 경쟁하듯 하지 말고
순서대로 해라! 순서대로 한 명씩!
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왜냐면 세 사람이 동시에 방언하면 못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씩!
3)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잠잠하라
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방언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방언기도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방언기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못 해서 문제입니다
결론은, 방언을 해라 or 하지 말라?
해라, 마음껏 해라!
그러나 교회에서 방언할 때는 조건이 하나 있다
교회에서 통역이 있으면 마음껏 해라
통역이 없으면 조용히 집에 가서 하나님께 혼자 말해라
결론은 방언을 해라!입니다
‘방언하지 말라’ 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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