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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사회의 단면

LNCK 2019. 12. 25. 19:01

예수님 당시 사회의 단면                 3:1~2                   설교스크랩

 

 

이스라엘을 살린 하시딤, 바리새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는 원래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래는 뼈대 있고, 명문가 가문들이다. 우리로 친다면 독립운동가 가문들이다.

 

하시딤이라는 뜻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게 살아가자, 구별되게 살아가자,

그런 특심한 신앙인이 하시딤이었다.

 

팔레스틴을 통치하던 이방세력(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믿으면 죽인다!” 그러니까

대부분 유대인들은 믿음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변절했다.

 

우리도 일제시대 때, 6.25, 예수 믿으면 핍박 받고 죽이고 그랬을 때

믿음 지키는 사람들 보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않았는가!

 

당시에 이스라엘도 여호와 신앙을 지키면 죽이고, 끓는 물에 집어넣고,

자식들 한명씩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면서

자식 살리고 싶으면 여호와를 부인해라, 그렇게 괴롭혔다.

 

이러면 대부분,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신앙을 포기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내가 죽으면 죽었지, 신앙 포기 못한다.

우리 식구 다 죽어도, 우리는 신앙 포기할 수 없다.

믿음을 지키다 그렇게 죽어가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하시딤이었다.

 

이 사람들 때문에 믿음을 지키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유대 나라를 살린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가문의 조상인 하시딤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도 그렇지 않은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던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 때문에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올바로 설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개혁하지 않으면 그 좋은 것도 망하고 부패한다.

아무리 하시딤이 좋았고, 바리새파가 그 정신을 승계했어도

그 내부에서 다시 새롭게 개혁하지 않으면, 속에서 다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독립투쟁 하다가, 나라가 자유를 얻으면서 이들이 권력을 얻게 되었다.

손에 돈이 들어오고, 권력이 생기고, 힘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바뀐다.

 

바리새파가 하시딤이 지켜온 율법은 지키는데

그 속에는 사랑의 정신이 하나도 없고, 겉은 번지르한데 속은 다 부패했다.

그러니 그 법도 부패하도록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자기들은 얻은 권력으로 엄청나게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다.

안식일이 사실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날이다.

그런데 날품팔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을 못해서 굶는 날이 되었다.

그 복된 날을 사람 죽이는 날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 못하면 굶는데 일해야 하고, 그러면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었다.

안식일 규범에 의하면 불 피우는 것, 800m이상 걷는 것,

글자 두개 이상 쓰는 것, 곡식 단을 묶는 것,

이런 것 전부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자식이 굶어서 울고 있는데 이걸 보고 그냥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는가!

멀리 가서 칡이라도 캐서 먹일 것이다. 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류층은 일 안해도 살지만, 극빈층은 하루라도 일 안하면 죽는다.

그날 배 쫄쫄 굶는데 무슨 기도가 나오고, 예배가 나오겠는가! 원망만 나온다.

 

그래서 날품팔이 일도 몰래 하고,

낟알도 줍기 위해 다니니까 안식일 못 지키지,

당연히 그러면 완전 죄인 취급 당하고, 사람 취급 못 받았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은 세금이니, 이자니 뭐니 하면서 다 착취했던 것이다.

자기들은 먹고 사는 게 어렵지 않으니까 쉽게 지킬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은 법을 지킬 수 없었다.

다 걸리게 해 놓았더니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하면 몸이라도 건강해야 되는데,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이 다 누구였는가?

문둥병자, 귀머거리, 장님, 불구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집에서 내 쳐진 자들이다.

 

문둥병자, 혈루병 걸린 여인 보시라.

12년 동안 병에 걸리니까 나중에 아무도 없고, 외면당한 자였다.

그런 외면도, 모세의 법에 의한 것이었다.

 

원래 병을 옮기지 말라는 좋은 의도의 법이

사회의 소외계층을 무조건 따돌림 시키는 나쁜 의도로 남용되었다.

 

그런 문둥병자, 혈루병자는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그들의 병을 치료하기 이전에,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먼저 치료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에는 중간계층이 없었다.

대부분 극빈층 가난뱅이들, 병자들만 있는 완전 엉터리 세상이 되었다.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진 사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종으로 팔아야 했고,

그것도 안 되면, 나사로처럼 개와 식탁 다툼을 벌여야 했는데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고 있었다.

 

어떤 과부는 동전 두 닢이 자기 전 재산이었는데,

부자는 큰 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했다.

 

그리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성전에서 저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며 기도했다.

 

늘 신앙을 운운했지만, 사실은 회칠한 무덤이었던 것이었다.

 

간음을 하면 힘없는 여자들만 잡아들였다.

그런데 누가 간음한 여자랑 잣겠는가? 아마 부자들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고, 빠져나갈 수 있는 빽이 있는 집안이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남자도 같이 잡혀 왔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들은 쉽게 이혼 할 수 있었다.

이혼 당하면 친정에서 안 받아준다.

이혼당한 여자들이 사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창녀이외에 살아갈 수 없었다.

 

원래 이스라엘은 가난할 수가 없는 나라다.

법적으로 희년제도, 안식년제도, 대 잇기 제도 등 수많은 제도를 통해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나라였다.

가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50년 지나면 땅 다 찾고,

아무리 고생해도, 친척이 내 어려움 다 돌봐주게 되어 있었다.

 

율법에 의하면 자기 친척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땅을 찾아주고,

친척이 나서서 팔아버린 땅값 대신 지불해줘서 살리도록 해야 했다.(룻기)

 

땅을 개인이 많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부자들은) 이런 율법은 하나도 안 지켰다.

 

이걸 누가 해야하느냐?

땅 다 차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해야 하는 건데 안 했다.

자기가 희생하는 것은 절대 안 했다.

그러니까 세상의 권력구조가 비대해져가지고,

빈민과 권력층만 있는, 중산층이 없는, 기형적인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빈민국가도 모두 이런 구조다. 상위 5%이내와 나머지 모두 빈민)

 

그래서 예수님 시대는 엉망진창이었다.

원래 이러면 안 되었는데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천지가 다 가난한 사람이었다.

사두개인 과 바리새인 등 상류층은 있는데 중간계급이 없는 것이었다.

 

전부 하루하루 먹고 살 것이 걱정이었다. 하루 2끼나 제대로 해결할까?

이런 생각할 정도로 아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면 절대 이럴 수도 없고 이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율법만 지켰는지 이스라엘이 엉망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그날 일해서 그날 먹는 날품팔이부터,

(포도원 비유에 보면, 그것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놀고 있었다.)

남의 땅에 농사짓고 하루를 연명하는 소작농들,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어부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수님은 엉망으로 된 세상을 하나씩 바로잡기 시작하셨다.

귀신이 다스리고, 질병이 다스리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니까 다 손들고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보면 전반부에는 인간 이외의 세력들과 갈등이 벌어진다.

귀신이나, 마귀나 질병이나, 자연(풍랑)까지 다 꺾이고, 손들고 나왔다.

 

그런데 후반부에 끝까지 안 바뀌고, 안 물러서는 것이 있는데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종교가 돈줄이 되다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

뭔가를 깨닫고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으로 만들었구나!’

그렇게 깨닫고 돌아서야 했는데, 그런데 절대 안 물러섰다.

 

이 성전이 돈줄이 되는데, 이걸 포기하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하는데

그러기 싫었다.

유월절 같은 날은 2주 동안 몇 백만 명이 성전에 몰려드는데

이 사람들한테서 (요즘 돈으로) 만원씩만 거둬들여도 얼마인가!

몇 십 억이 그냥 들어오는 것이다. 엄청났다.


양한마리, 소한마리 적어도 몇 십 만원이라고 가정하면

몇 백 억이 해마다 그냥 들어오는 사업이었다.

(사람들은 소나 양을 멀리서 끌고 오기 힘들어서, 성전에서 그냥 샀다)

자기 경계선을 딱 그어놓고 거길 건드리면 못 참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끝까지 가서 망했다.

이 사람들의 고집 때문에 40년 후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가!

 

바리새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공격했다.

왜 율법 어겼냐? 왜 죄인들하고 지내냐? 너 정결법 어겼다. 그러면서 화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바뀌고, 즐거움을 얻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두워진 세상이 밝아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물고 늘어졌다.

이런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또 시비를 걸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면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안식일 법 위반은,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였다.

 

율법, 안식일법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그 정신을 외면하고

저들은, 예수님과 교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구분의 척도가 된다.

 

기독교는, 예수님 당시 + 2천년 역사상 항상 사회적 강자 편에 섰다.

그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내는 헌금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점점 본질과 멀어져 갔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본질적 기독교와

피상적 기독교를 구분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본다.

 

아무리 기독교의 본질이 구제가 아니고 영혼구원이라 하지만

(돈만 있으면 하는 쉬운) 구제도 못하면서

(정말 어려운) 영혼구원은 어떻게 하겠는가!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의 차이에서

2천년 전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태도의 차이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3:1~2

 

사랑의 마음은 사회적 약자를 보는 눈을 준다.

오늘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시자, 두 가지 눈빛을 보시게 되었다.

하나는 장애인의 눈이고, 하나는 바리새인의 경계의 눈빛이었다.

하나는 살고 싶다는 눈이고, 하나는 넘어뜨리고 싶다는 눈이었다.

 

예수님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장애인의 눈이었다.

살리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손 오그라든 사람이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있으니까, 병자가 눈에 보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똑같은 거리를 걸어가도, 사람에 따라서 보이는 게 다르다.

아이들에게는 어딜 가도 과자점만 보이고, 술꾼들은 어딜 가도 술집만 보인다.

모범생은 학원만 보이고, 춤꾼들에게는 디스코텍만 보이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 거기에 따라서 보이는 게 달리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눈에 이 환자가 눈에 띄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사랑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살 속에서 세월의 아픔이

말라비틀어진 손만큼이나 위축되어 있었다.

옷은 남루하고, 무엇인가 예수를 보면서 하염없이 호소하고 있는 눈망울은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그런 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마자 예수님은 당장 이 사람을 고쳐야지.. 그 마음이 간절했다.

 

오늘도 사회적 약자가 눈에 안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또 다른 눈빛을 발견하셨다.

거기에 바리새파의 차가운 눈빛을 보셨다.

날카로운 눈매로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고소할 듯한 태세였다.

 

이 손 마른 병자의 눈에서 흐르는 애환이나

지금까지 겪었을 아픔 등은 헤아리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오직 종교적 권력다툼... 그런 것밖에 안중에 없었다.

이런 심보로 이 병자와 예수를 번갈아 보면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프랑스 대혁명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당시에도

대다수의 농노(노예와 다름없는 자유인)들과 소수의 귀족

그리고 귀족 편에 서는 교회가 있었다.

 

교회가 모든 계층을 끌어안아야 하지만

항상 시대가 타락하고 교회가 부패했을 때는

그 사회의 하층민들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하고

교회는 가진 자의 논리를 대변했다.(고 본다)

 

오늘날 끊임없이 하층민들을 제대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이 시대가, 교회가 정상이라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