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알아가기 에베소서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엡3:18
알리스터 맥그래스 Alister McGrath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훈련」 Knowing Christ 부분 발췌.
현대인들은 초, 중, 고, 대학교에서 배운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자신도 모르게 받고 있다. 그 결과 이성reason이 지나치게 발달해서
기독교 신앙을 ‘매 마른 지식’으로 몰고 갈 위성험이 높다는 주제의 글.
특히 신학생 시절에, 영성이 빠진 ‘지식’만 강조, 숭상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기독교란 본질상 개념의 문제?
내가, 대다수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처럼,
<기독교란 본질상 개념의 문제>라는 생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계몽주의 사상이 빚은 서구 문화 속에서 자랐다.
계몽주의란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18세기에 시작된 거대한 문화 운동이다. 그것이 내가 호흡한 공기였다.
나는 내가 수용해 왔던 인생에 대한 시각이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는 줄 모른 채 살아왔다.
(개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이성적으로 바른 신학 추구에 너무 치우치며 살았다.
올바로 아는 것이=올바로 믿는 것인 줄 알았다.)
▲이성만 최고인줄 알고 살았다.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은 상당했다. 1970년대의 많은 기독학생들처럼
나도 신학적 정확성에 집착하게 됐다.
중요한 것은 개념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고,
흔히 그 일은 일부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복음이란 존재의 모든 차원에,
그러니까 생각하는 방식만 아니라 느끼는 방식과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역할만 옹호한 채 감정이나 상상의 개입은 일체 거부했다.
영국의 많은 영향력 있는 목사들은 틀림없이 영국의 명문사립 학교 시절에서
비롯됐을 ‘무표정 일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채
감정의 개입이라면 무조건 업신여겼다.
감정에 영향을 받는 신앙이란 마치 여자수상이 뽑히는 것처럼
엉뚱한 개념으로 일축되었다.
그러나 c. s. 루이스 같은 저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로 그 부분,
마땅히 더 잘 알았어야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멸했던 그 부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내 믿음이 너무 이론적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솔직히 내 신앙은 메마른 땅 같았다.
▲성경지식은 해박한데(이성), 예수는 깊이 몰랐다(감성).
큰 대학부가 있는 옥스퍼드 교회들의 설교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성경을 아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성경 지식의 진보가 목표 자체로 통했고 학생들은 표준구절들을 암송해야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꾸는 것은
왠지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네 성경을 알라’가 그 교회들의 지상목표로 보였다.
그런 교회의 학생들은 과연 성경 지식이 해박했다.
그러나 몇몇 신학적 주장의 근거로 가장 난해한 성경구절까지 인용할줄 아는
많은 학생들이 사랑의 그리스도의 따뜻한 품을 전혀 몰랐고
그분의 보호 안에 편히 쉰 적도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단이 목표가 됐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 회심과 심령의 변화를 주어야 할 성경 본문이
그 자체로 목표가 되어 버렸다.
성경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대치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약화된
나약하고 무력한 신앙, 빈약한 신앙을 사는 위험하고 서글픈 상황이었다.
▲교리(틀, 지식)는 있었는데, 예수(알맹이, 뜨거움)는 없었다.
나는 개념을 바로 정립할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있어 성경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도 맞다.
그러나 교리란
그리스도의 살아 계신 임재를 바로 이해하게 해 주는 틀과 같은 것이다.
교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애매모호하지 않게 해 주며,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적 임재를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그러나 나 같은 옥스퍼드 학생들은 임재와 인격 없이
틀과 개념만 있는 듯 보일 때가 많았다.
교리란 믿는 자의 영혼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확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건만, 교리의 틀만 있고 내용물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울타리는 있었으나 그 안에 살아서 울부짖는 사자는 없었다.
신앙에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가 그랬다.
틀린 것은 아니나 뭔가 부족했다.
▲물론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분치 않아 파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종교체험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결국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초기 실수 두 가지
신앙생활 초기에 내가 범했던 실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나는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몸”(고전12:12-31)의 의미를
충분히 몰랐다.
그 비유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분명히 들어 있다. 내 신앙에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남한테서 아무것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듯 구는 영적 독불장군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으면서 돌파구가 열렸다.
내 주변에서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과
이미 그 길을 마친 사람들이 내게 그들의 통찰과 지혜를 전해 주었다.
둘째, 내 안에는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이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일부만 사용했다.
내가 배운 길, 그러니까 인간의 지성만을 사용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길은
신약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계몽주의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지성을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나는 “이 세대의 신”에 마음이 어두워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했다(고후4:4).
나는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알아 가기 위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모든 자원(지, 정, 의)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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