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종말론 해석의 키 계1:9 도서 스크랩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1:9
◑종말의 시기
공관복음의 종말론에 있어서, 그 시간(시기)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G. E. 래드)
①임박성 -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 마10:23
②지연성 -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으나 끝은 아직 아니라 막13:7
③불확실성 -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막13:33
이 세 가지를 항상 동시에 봐야 한다.
종말은 오늘밤에 당장 임할 수 있고(임박성),
먼 훗날 일어날 수도 있으며(지연성),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불확실성).
셋 중에서 어느 것 한 가지만 집착해서 강조하다보면 잘못된 데로 빠진다.
◑과거주의 와 미래주의의 융합
신약 종말론 해석의 가장 큰 논쟁은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의 대립이다.
이것을 둘 다 맞다고 보고,
두 안경을 동시에 끼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요즘 2중렌즈 안경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과거주의 적 해석
복음서와 계시록의 예언이 AD70년 로마에 의한 유대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며,
그것은 이미 과거 2천년 전에 디도 장군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 미래 지구 종말적 예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과거에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달이 변하여 피가 되고 별들이 떨어지리라... 지상 왕권이 몰락하는 것에 대한 상징
으로 본다.
일일이 성경구절을 다 인용 못 하겠지만
과거주의를 지지하는 성경구절이 성경에 수두룩하게 나온다.
(자세한 근거 구절은 직접 종말론 또는 계시록 해석 책을 읽어보시기 바람)
이스라엘을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 마10:23
는 말씀도 그런 과거주의를 지지하는 구절이다.
그래서 과거주의는, 신약의 종말 예언이 2천년 전 당시의 일이며,
그것은 이미 성취되었고, 지구종말적 미래적 예언이 아니라고 본다.
주로 (진보적)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렇게 결론 내리게 되어있다.
영 형편없는 해석은 아니고, 책을 읽어 보면 상당히 일리가 있다.
▲미래주의 적 해석
복음서와 계시록의 모든 예언은 지구 종말적 사건을 예언한 것으로
아직 그 사태가 우리에게 닥치지 않았으니 ‘미래주의’라 부른다.
주로 보수주의 신학에서 변치 않고 주장하는 종말론적 입장이다.
여기서도, 하루에 지구 인구 1/3, 1/4이 죽는다는 해석을 놓고
또한 아마겟돈 전쟁의 해석, 천년왕국의 실재를 놓고
‘문자적 해석’과 ‘영적(상징적)해석’으로 나뉠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이 장차 미래에 닥칠 일이라는 견해에는 일치한다.
굳이 지지하는 성경구절을 들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미래주의적 관점을 갖게 되어 있다.
▲과거주의 와 미래주의 가 융합된 이중 예언
예를 들면, 구약의 스가랴서도 일종의 묵시문학적 형식을 취하는데
그것이 당시 시대, 즉 구약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리스도 초림을 예언한 것인가?
아니면 미래 지구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것인가? 볼 때
어떤 신학자들은 ‘둘 다 예언한 이중 예언’으로 본다.
그러나 신약의 종말적 예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과거주의 와 미래주의가 서로 대립해서 싸우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 책에서는 상반된 두 견해를 모두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주의 와 미래주의 가 융합된 이중 예언>이라는 근거를
계시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AD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동시에, 지구 종말의 예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1:9
위 구절을 헬라어 구(句)의 수식하는 관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 네가 보는 것(계시록의 모든 환상)은
이제 있는 일(주후 70년, 과거주의)이요,
동시에 장차 될 일(지구 종말, 미래주의)이다.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나침반에서 나온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아직 공인받지 못한 ‘새로운 해석, 이론’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 예루살렘 멸망, 즉 주후 70년 전후의 그 당시 일이다.)
▲결론
과거주의냐 미래주의냐 서로 싸우지 말고,
그냥 둘 다 동시에 보면서 해석하면 된다.
왜냐면 성경에 둘 다 근거 구절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계1:9절의 새로운 해석이다.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 (0) | 2019.12.26 |
---|---|
미국 독립과 기독교 / 알리스터 맥그래스 (0) | 2019.12.26 |
포로 귀환 후 유대교의 변질 (0) | 2019.12.26 |
실패를 방치하시는 주님 (0) | 2019.12.26 |
21세기 교회의 전망 / 하워드 스나이더 (0) | 2019.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