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방치하시는 주님 행5:39, 왕상12:15 인터넷설교정리
*관련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이 마음을 강퍅케 하신다. 언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려 할 때
바로 왕은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에 6번 나온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한편으로는 출애굽 하라고 도우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출애굽을 저지하시고...
여호와는 한 손으로 도우시나, 다른 손으로 방해하셨다. 어찌된 일인가?
바로를 멸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멸하실 때, 먼저 그의 마음을 강퍅케 만드신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사람은, 그 마음을 은혜로 부드럽게 하시지만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 마음이 강퍅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질 때, 하나님은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고 허락하셨다.
성도들도 (아예 안 지으면 좋지만) 죄를 약간 지으면... 회개할 마음을 주신다.
그런데도 죄를 계속 누적시키면, 도가 지나치면, 너무 먼데까지 가면
바로처럼 그 마음을 어둡게 하시고, 강퍅케 하신다.
그래서 10번이나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하며, 뉘우치고도 다시 잘못을 계속해도
(바로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출9:27
하나님은 방관하시며 계속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불행을 주신다. 언제?
솔로몬을 이은 르호보암 왕은 노인들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따르다가... 결국 남북 이스라엘로 분열하게 된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왕상12:15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왕상12:24
르호보암이 강퍅하게 되어 좋은 조언을 듣지 않고, 나쁜 조언에 솔깃한 것도
여호와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으로 분열해 나갔을 때
하나님은 남북간에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분열이 여호와께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부친 솔로몬 때의 실정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왕상11:12
우리는 주변에 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동이 일어날 때,
그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는지 아닌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도전이면
‘만일 (이 일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행5:39
▲3. 하나님이 실패를 방치하신다. 왜?
모세의 실패, 다윗의 실패, 베드로의 실패는 ‘잘되게 하는 실패’라고 본다.
하나님이 애써서 막으실 수도 있었으나, 실패하도록 그냥 방관하셨다.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나, 속에는 말할 수 없이 시커먼 부패함이 있는데
그것을 잘 숨기고도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전적 타락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후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잠시도 지탱할 수 없는 인생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들은 그 죄와 허물 때문에 더 겸손해 졌고, 더 낮아졌다.
결과적으로 넘어진 것도 은혜가 되었던 것이다.
△적용
이와 같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행한 일을 경험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일이 직간접적으로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런데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 일을 계기로
-완전히 망할 수도 있고
-더 겸손케 되어 나중에 더 잘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하지만
모든 경우에 그렇지는 않다.
보통은 죄가 더한 곳에 멸망이 더한 경우가 더 많다.
△북한의 핵 실험을 보는 시각
신기한 것은 미국, 소련, 일본, 중국, 한국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예상하지도 못했는데도,
북한은 불장난을 덜컹 저질렀다.
이것은 어쨌거나 주님이 그러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이것은 북쪽 김정일 정권의 심판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남쪽 사람들의 교만, 안일, 나태함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일 수도 있다.
이것은 남과 북을 모두 망할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우리를 겸손케 하여 돌이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실패와 고난 가운데서도 그것을 당하는 자세에 따라서...
<인터넷 설교 듣고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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