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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귀환 후 유대교의 변질

LNCK 2019. 12. 26. 08:24

포로 귀환 후 유대교의 변질                          감찬이 님의 글 06.10.17.

 

바벨론 포로 이전에 유대인이 망한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유대인이 망한 것은... 말씀대로 살려다가 망했다.

 

 

1. 포로 귀환 이후, 초창기 랍비들의 노력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나라와 신앙을 재건할 시대적 사명을 가진 랍비

(서기관)들은, 다시는 조상들이 했던 것과 같은 비참한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왕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정체제를 구축한 것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헬레니즘과 버금가는 헤브라이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예언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랍비들의 활동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는 세계사의 기적을 일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와 신앙을 재건하자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바벨론에서 귀환하였지만,

주변상황의 어려움에 부딪혀 망연자실해있는 유대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느헤미야와 에스라였다.


특히 에스라의 성경공부(모세오경) 열정에 힘입어 유대인들은 신앙이 회복되었고,

하시딤이라는 유대교 영성운동이 출범하였으며,

특히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했다.

 

에스라의 뒤를 이은 초창기 랍비들의 헌신과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유대인들은 독특한 헤브라이즘을 고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2. 다음 세대 랍비들의 변질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 세대의 랍비들은

이전 세대가 구축해 놓은 전통에 안주해서

그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전통(유전)을 지키기 위하여 형식을 더 강화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소극적인 자세는 무서운 비극을 만들어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않고 옛 부대(전통)에 담음으로써

부대도 터지고 술도 버리고 말았다.


물려받은 신앙의 전통과 유산들은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물이 고여 있으면 썩는 이치와 같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전통)을 보존하고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스승의 가르침을 재해석,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제부터 다루는 문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다.

 

바벨론포로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진정한 노력 자체가 없어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책망을 받았고, 그래도 돌이키지 않다가 파국을 맞았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A.D. 70년 예루살렘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면서 망해버린 역사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계약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실패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다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망한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랍비 종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런 결과는 초창기 랍비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40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일어난 일이다.

 

1. 의인과 죄인으로 양분

에스라는 희랍문화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율법의 형식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세대 랍비들은 이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 전통과 형식을 더 강화시킨 나머지... 그 원래 정신이 질식해버리고 말았다.

 

형식을 강조하는 규정들은 계속 늘어갔고 또 복잡해졌다.

 

형식을 중요시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인과응보 교리다.

역대기의 주요 신학인 인과응보 교리는 결과를 중요시 한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죄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즉 죄 때문에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다고 단정 지었다.

 

율법의 형식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발맞추어 인과응보교리가 부상했고,

이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한 결과

사회구성원은 의인과 죄인그룹으로 양분되었다.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사람과 외적 결과가 좋은 사람은 의인이고,

형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외적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의인죄인이라는 두 계층이 있었다.

 

2. 죄인 대량생산체제

율법의 형식과 인과응보교리를 적용한 결과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의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율법의 형식을 철저히 지키면서 결과가 좋은 사람은 많을 수가 없었으므로

유대교 체제는 죄인 대량생산체제가 되고 말았다.

대표적인 죄인 그룹들은 다음과 같다.

 

이방인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만이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

강조한 결과,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은 죄인의 표본이며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들과 결혼은 물론이고 접촉도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이방인을 집에 들여놓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혈통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유대인의 순수성을 강조하였으므로

그 이후 혈통이 중요시되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시는데, 이들은 자꾸 형식적인 담을 쌓아갔다.

 

율법을 버린 사람들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잘 알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다.

세리와 창기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목동이었다.

양떼를 이끌고 풀밭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안식일 법 234가지를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통유대인 여자들은 외출도 금지되다시피 했고,

길에 나간다고 해도 길에서는 가족인 경우라도 남자들과 대화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울려 일했다.

그들은 이런 법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부들은 결국 죄인이 되고 말았다.

 

가축을 돌보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 즉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율법으로 정죄된 죄인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 -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결과가 좋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의 교리이다.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은 죄라고 보았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우선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므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땅과 집을 팔고

남에게 몸을 의탁하여 사는 노예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인과응보의 논리에 의하면 가난한자 뿐만 아니라, 불치병자들, 불구자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 모두가 죄인이 되고 말았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불치병에 걸리고, 불구자가 되며, 사업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병자들 중에서도 문둥병자 같은 경우는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저주를 내려서 그런 흉한 질병에 걸렸다고 했다.

문둥병자들은 하나님께서 저주한 사람이므로

그들을 돌보거나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된다고 해서

동네에서 내 쫓았다.

 

전염의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문둥병자는 내다 버려야 했고,

돌을 던져 맞출 수 있는 거리에 접근하면 반드시 돌을 던져 때려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

 

부정한 사람들

하나님처럼 거룩해져야 한다.”는 순수한 열정이 형식으로 굳어져 버리면서

온갖 부정한 것들을 규정해 놓았다.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접촉을 하거나, 시체, 무덤 등을 만진 사람도

부정해졌으므로 죄인들이었다.

특히 시체를 부정하게 여겨서 특별히 취급을 했다.

 

식사를 할 때 손을 씻는 청결례를 지키지 않은 사람, 율법에 명시된 먹거리를

구별하지 않은 사람 등도 부정한 죄인들이 되었다.

 

직업이 안 좋은 사람

오물을 취급하는 사람, 무두질하는 사람, 여자들과 섞여서 일하는 사람

(예를 들면 직조공), 목동, 짐을 운반하는 사람 등도 모두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오물을 취급하는 사람과 무두질하는 사람의 경우는 배우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언제든지 무조건 이혼이 허락되었다.

여자가 이혼을 요청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성경을 필사하는 필경사들도 죄인이라고 했다.

성경을 필사하는 거룩한 일을 돈 받고 한다는 이유에서다.

 

목동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축을 돌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의 것을 돌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정직하게 관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새끼를 낳거나 양털을 깎는 경우 부정하게 보고하고 착복하는 일이 있었다.

짐을 운반하는 사람들도 중도에 물건을 빼돌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죄인으로 매도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직업상 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게 된다.

유대교 율법은 죄인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체제는 한 마디로 죄인 대량생산체제라고 할 수 있다.

 

 

3. 예수님은 이런 유대교와 정면으로 충돌하시게 된다.

 

복음서는 예수님과 유대교 당국자와의 갈등이 배경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이해가 복음서 해석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구약의 역사 마지막 부분을 다루어 보자.

바벨론 포로의 쓴 잔을 맛보고 포로로 귀환한 후에도

왜 이스라엘은 또 다시 주후 70년에 다시 망했는가?

 

구약에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성시켰으나,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내셨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그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결국 망하고 말았다.

그 책임의 소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1. 지도자 - 랍비들

구약 이스라엘 역사 2천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교사의 중요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며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시대의 생사가 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무식하면, 또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겪이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랍비라고 불린 서기관들이었다.

이들의 오류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룩함에 대한 오해

랍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거룩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기까지는 정확했다. 문제는 거룩해지는 방법에 있었다.

 

희랍과 로마의 문화적인 거센 물결을 막아내기 위하여 시내산 율법의 형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까지도 현실적인 적응이라는 면에서 볼 때 옳았다.

그릇이 없이는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랍비 1세대들은 알맹이를 위하여 껍질(형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들은 앞 세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껍질을 강화하는 데만

신경을 쓴 결과, 알맹이를 질식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외식하는 자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 되었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질식시키는 데에서 더 나아가

껍데기가 알맹이를 대신하고 보니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일은 서서히 수 백 년을 두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 참여한 랍비들은 전통의 굴레에 갇혀서

전혀 이런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는 역사의 소경이 되고 말았다.

 

안식일제도가 율법의 핵심이라는 것 까지는 파악했는데,

안식제도의 정신은 사라지고 말았다.

안식일을 무노동의 개념으로만 파악하여 234가지의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 규정을 지키면 안식제도는 물론 율법 전체를 지킨다고 생각했다.

 

안식제도의 정신은 하비루(노예 같은 천민)4를 보호하자는 데에 있었음에도

안식제도가 하비루를 얽어매는 멍에가 되고 말았다.

안식일이 사람(하비루)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하비루)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안식제도 중 안식일만 중요시할 뿐

안식년, 희년에 있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도외시 했다.

종들을 풀어주고 채무를 면제하며, 땅과 집을 되돌려 주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유대교의 안식일 법은 가진 자를 위한 법으로 전락했다.

      

계약대로 살기만 하면 형통하리라, 그러나 계약을 버리면 저주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큰 뜻, 즉 선교적인 사명을 도외시 했다.

이스라엘의 존재이유가, 가나안 땅을 되찾은 이유가

이방인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는 큰 사명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자신들만의 하나님이요, 자신들만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계약대로 살기만 하면 온 세상을 구원할 것이요,

온 나라를 움직이는 주도권을 가지게 되리라는 선교적인 깊은 의미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인과응보의 교리를 만들어 냈다.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방법이 안식일을 지키고 청결례, 먹거리 구별 등의

형식을 지키는 것으로 굳어진 것

유대교가 잘못 간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비루(출애굽 당시 히브리 노예 같은 천민) 의식의 실종

인과응보의 교리를 모든 불행한 일에 확대 적용한 결과

수많은 죄인들이 생겨났고, 이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으로 취급하여

하비루보다 더 비참한 죄인 계층을 만들어 냈다.

 

이는 시내산 계약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유대교 율법은 결국 가진 자를 위한 법이 되고 말았다.

 

선교의식의 실종

편협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결과 이방인들을 배려할 여지는 전무해지고 말았다.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들이므로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여길지 않았다.

이방인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신구약 중간기에 서서히 진행된 유대교의 왜곡은

전적으로 신앙의 교사들인 서기관-바리새인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은 약 6천여 명 되었다고 한다.

유대교의 신앙은 이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2. 지도자 - 제사장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 왕정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율법중심의 신정체제를 구축한 결과 대제사장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장 그룹들은 정치인으로 변모해갔다.

 

특히 셀류쿠스 왕조시대에는 제사장직을 차지하기 위하여

비열한 정치적인 술수가 모두 동원되었다.

서로 대제사장직을 차지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세금을 더 걷어 내거나

성전 금고를 털어 바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스스로 대제사장의 자리를 돈을 주고 사는 자리로 만들어버렸다.

 

희랍의 스포츠문화가 몰려왔을 때에는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휩쓸려 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마카비 반란이 성공하여 하스몬 왕조가 자리잡은 뒤에도

왕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대제사장이 왕의 역할을 대신했었다.

 

하스몬 왕조 후기로 접어들면서 대제사장들은 세속 정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스라엘 종파 중 사두개인이 제사장이 되었으며, 이들은 바리새인처럼

신앙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인에 불과했다.

 

포로 전 왕조시대의 제사장들은, 왕의 봉신이 되어 사제귀족의 지위를 누리면서

왕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스스로 만족해버렸다.

제사의 의식을 집행하는 왕의 참모였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이후에는 제사장들이 최고위의 정치가들이었다.

대제사장이 왕의 역할을 했다.

정치가로 변모해버린 제사장들은 세속권력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시내산 계약에 근거한 제사장의 역할에 대하여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두개인들은 신앙적인 견해에서도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난다.

그들은 내세나 부활, 심판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지금 이 세상만 보였고, 세상의 권력만이 관심사였다.

신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서기관-바리새인들이었다.

 

3. 백성들의 세속화

희랍물결이 몰려오자 무분별한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했다.

안식일에 경기를 보러 가거나 경기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나체와 다름없이 진행되는 경기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할례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성형수술을 받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이런 분별없는 행동 때문에 랍비들은

율법의 형식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유대교가 지나치게 형식으로 치우친 것은

백성들의 급속한 세속화와 비신앙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출처 : 다음카페 > 창골산 봉서방 > 믿음의 좋은글 > #28053 “누구의 책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