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들이 일 냈다 왕하7:3~10 박신 목사
아람의 포위 공격으로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 성에 먹을 것이 동이 났다.
먹지도 못하는 나귀 머리가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았고
그 돈도 없는 사람은 서로 자기 자녀를 서로 잡아먹었다. 왕하6:25~30
이런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 상황 앞에서
뜻밖에 해결사 노릇을 한 사람은... 어이없게도 4명의 문둥이들이었다.
◑1. 문둥이들의 약한 점
(한센병 환자님들을 격하하는 뜻 없음. 그냥 성경에 나온 용어로 사용)
①멸시받는 사람들
그들은 성문어귀에 있었다고 했다. 왕하7:3
그러니까 성 안에 못 들어온 것이다.
감염의 우려가 있다고, 성 밖에 쫓겨난 천대와 멸시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삶을 거의 포기하고,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로 절망적으로 살았다.
혹시 그들은, 자기나 부모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병으로 아픈 것도 괴로운데, 남들의 차가운 시선은 더욱 괴로웠으리라.
②배신자들, 비겁자들
그 와중에 성 밖의 네 문둥이는 대적 아람에게 제 발로 항복하러 갔다.
성중에 들어가나 성 밖에 있어나 굶어죽기는 마찬가지, 이판사판이었다.
그들은 현실적 방도로 항복하는 것을 택했다. 왕하7:3~4
세상 윤리로는, 아무리 굶어 죽게 생겼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어야 했다.
성중에는 아이들을 삶아 먹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국가가 전쟁나면, 자기 한 몸 살겠다고 도망가는 것도 비겁한데,
하필이면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적에게 항복해서 살겠다는 것은
이적행위(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요, 반역죄다. 註1)
③개인주의, 이기주의자들
그들이 이판사판으로 아람 진영에 도착해 보니,
적군들은 모두 혼비백산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즉시, 이 놀라운 사실을 굶주린 백성에게로 달려와 알려야 했다.
같은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아기를 잡아먹는 판국에
그들은 처음에 자기들끼리만 실컷 먹고, 금과 은을 탈취하기에 바빴다. 왕하7:8
◑2. 문둥이들이 잘한 점
①생명을 걸었음
이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한 일(적진으로 나아감)을 했다.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서, 목숨을 더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에게 남다른 담대함을 주었다. 이판사판?
②잠잠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된 소식을 자기들만 알고 숨기는, ‘정보 독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다음날 아침이 밝기까지 밤새도록 탈취할 수도 있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所爲)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왕하7:9
한참 탈취와 감추기에 정신이 팔린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은 즉시, 그 복된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자기들을 무시하고 천대하던 원수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복된 소식을 (약간 늦었지만) 부지런히 돌아와서 알렸다.
③문둥병의 경험이 소중했다
그들은 성 중의 사람들을 복수하기 위해, 다른 길로 떠날 수도 있었다.
왜 그들은 성으로 다시 돌아갔을까?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죽음의 문턱에 가본 자만이 절실하게 깨닫는다.
나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드나들어본 경험이 있던 문둥이들은,
지금 기근으로 죽음의 문턱에 드나들고 있던 ‘성 중 백성들’을 생각해 냈다.
감옥 전도를 가시는 분들은, 감옥의 아픔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들이 많다.
병원 전도를 하시는 분들은, 질병의 아픔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분들이 많다.
‘문둥병’이 아무 쓸데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과 절망과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놀라운 섭리를 갖고 계신다.
*관련글 클릭 : 체스의 고수이신 하나님
◑3. 교 훈
▲1.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주일 아침에 어떤 상가 교회에 계단에 누가 변을 보고 간 것이 발견되었다.
성도들이 그 변을 지나서 교회당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아마 급하신 분이 상가로 뛰어 들어왔는데, 화장실 문이 잠겨 있으니까
급한 나머지 그 앞에서 큰일을 보고는... 치우지도 않고(못하고) 떠난 것이다.
그 냄새나는 것을 치운 사람은, 직업이 청소부인 집사님이었다.
평소에 그 집사님은, 자기 직업이 남의 건물 청소해 주는 것이라서
별로 교회 사람들에게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남들이 모두 피하는 그 변을,
그 집사님은 별로 어렵지 않게 치웠다.
그 날 목사님과 온 성도들은 철저히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쓸모(은사)가 있다는 것을...
▲2. 그러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
인간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더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전도서3:11
▲3. 낮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신다.
하나님은 버린 돌, 집 나간 아들, 도망간 선지자, 배반한 제자, 겁쟁이 사사,
문둥병자 등 이런 자들을 종종 들어 쓰신다.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8:2
주님은 어린 사무엘을, 어린 다윗을, 청년 요셉을 쓰셨다.
낮고 겸손한 자들이다. 이들도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
註1) 교회 조직은 세상 조직과 다르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무조건 개인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뜻.
▲세상 윤리는 공동체의 존속과 유익만을 목적으로 인간이 제정한 것이다.
따라서 세상 윤리가 적용되는 한계는 민족과 국가이다.
그 한계를 넘어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 윤리는 없다.
쉽게 말해 도덕을 잘 실천하다가도 나라 간에 이익 다툼이 생기면
도덕보다 나라가 우선된다.
그래서 나라끼리 전쟁이 발생하면 그 동기와 과정 등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국민 된 도리로서 무조건 참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을 선으로 본다.
회사 간, 단체간도 마찬가지다.
그 조직에 대한 충성과 (맹목적) 헌신이 미덕으로 꼽힌다.
(그것이 죄와 잘못이라도) 상대 회사의 약점을 캐내어 공개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 윤리, 세상 조직의 특성이다. 조직지상주의다.
▲반면 하나님의 윤리는
단체(직장), 민족, 국가를 초월한다.(넘어선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조직이다. 조직이 절대적이지 않다.
결국 인간의 윤리가 가시적 공동체(조직)의 존속과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윤리는 비가시적인 영적 공동체의 존속과 유익을 위한 것이다.
▲종교가 조직을 내세워 사람을 속박하면 안 됨
(근본주의) 유대교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위해,
(근본주의) 이슬람은 전 지구적인 회교제국 설립을 위해
개인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자살폭탄테러도 감행하라고 신도들을 내 몬다.
신의 뜻이라며 너무 자기 공동체(조직)의 유익만 우선해서
개인을 강제적으로 희생시키는 집단을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아무리 겉으로 의로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기들이 소속한 공동체의 보존과 유익을 위해
개인이 반강제로 희생해야 하는 인간적 윤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반면, 기독교의 희생은 자발적, 그 은혜에 감격해서이다.)
▲개인 생명은 소중하다
따라서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면
개인을 살리기 위해 공동체가 함께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윤리다.
개인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개인주의를 표방하거나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직접 순교로 인도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한 생명이 끝까지 살아남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소중한 일은 없다.
지금 네 문둥이도 죽음 대신에 항복을 택했다.
다윗은 자기와 시종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안식일에 거룩한 떡을 먹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생명을 그것도 가축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생명 보존을 위해 하는 일이 인간 윤리와 저촉된다고
하나님의 윤리까지 벗어난다는 법은 없다.
개인이 살아야 공동체가 살지, 공동체를 살린다고 반드시 개인이 살지는 않는다.
▲교회 조직은 주님을 섬기는 수단이다. 목적이 아님.
하나님은 인간더러, 자기가 속한 종교, 교파,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걸라고 명한 적은 결코 없다.
종교, 교파, 교회라는 조직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은 주님께 충성하기 쉽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종종 조직에는 충성하는데, 주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조직에 충성하고 주님께 불충한 자들이 중세 교황권을 타락시켰다.
그리고 교황에 충성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백성들을 호도했다.
우리는 교회 조직을 존중하고 거기에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교권주의에 충성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세상 윤리가 슬그머니 교회로 들어와서
교회 조직이 너무 잘 되어서(?) 그 조직에 충성하다가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서 과거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에게 충성’ 대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을 외쳤다.
추석이다.
아무도 선물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난한 교인, 섭섭한 이웃들이 많은데,
이번 기회에 교회의 윗분에게 인사를 잘 하려고 며칠째 (과도하게) 머리 굴리는 분은,
심호흡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을 외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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