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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의 목회와 경건

LNCK 2019. 12. 26. 13:46

손양원 목사의 목회와 경건                                      출처 : 애양원

 

서론 및 세 자료

 

이곳에 계신 여러 신앙의 동지들께선 손양원 목사님을 혹시 잘모르시더라도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이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이종윤목사님께서 저에게 "손양원의 목회와 경건"이라는 강연 주제를 맡기신 것은,

제(아마 손봉호박사) 가 예전에 손양원목사님이 소속해 있던 고신파의 장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손양원목사에 관한 세 자료

손양원목사님에 관한 자료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랑의 원자탄 전편과 후편이 있습니다.

 

전편은 여순사건때 그의 두 아들이 희생된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서,

손목사님의 신앙 경력과,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라는 사람을 양아들로 삼는 얘기가 주를 이룹니다.

 

후편은 6. 25때 이북에서 내려온 공산주의 자들에 의해서

손목사님이 순교를 당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 있지만

전편에서 다 이야기하지 못했던 목사님의 생애에 관한 얘기를 곁들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자료로는 설교집, 마지막으로는 옥중서신이 있습니다.

 

그의 신앙의 배경과 성품

손양원목사님이 두 아들을 잃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시무했던 여수 "애양원"즉 한센병자들의 요양소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천여명의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님이 되시는 손종일 장로님의 돌아가실 때까지의 기도와

그의 부인의 끝없는 기도 또한 그 배경이 되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은 어릴 때부터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유교에서 말하는 효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성품으로 인해 목사님은

1939년부터 6년동안 신사참배 반대투쟁으로 옥고를 치렀고,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 두 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희생되었을 때,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데 가담한 청년을 살려주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를 양아들로 맞아들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6. 25사변이 일어났을 때 "부산으로 피난하라, 제주도로 피난하라"는 여러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양떼를 두고 피난할 수 없다"는 초지일관된 신념을 가지고 뒷날 후퇴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손양원목사의 연보와 지역적, 교파적 배경

먼저 손양원 목사님의 연보를 잠깐 살펴보고 오늘 강의 제목에 맞추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연보에, 1919년까지 즉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할 때까지의 기간이 그의 신앙 생애의 제1기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 때는 한말(韓末), 일제 초기의 민족 수난기였습니다. 즉 민족이 수난당하는 슬픔속에서 그가 아버지의 신앙인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고, 주일학교부터 시작해서 공부하게 되는 기간이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조금 이해하기 위해서 손양원목사가 태어나서 자랐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는 교회사적으로 본다면 호주 장로교회가 선교했던 지역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외국의 여러 교파들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크게 미국 남. 북감리교와 남. 북장로,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 다음에 들어온 군소 교단들이 있지만, 대체로 1898년까지 이 6개교단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이 교단들은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을 각각 분할해서 선교했습니다.


경상남도, 부산은 원래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훗날 호주 장로교의 선교 지역으로 넘겨 주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북장로교의 선교 지역은 우선 남쪽 지방으로는 경상북도 전지역이 되겠습니다. 대구, 안동이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이었는데, 그들은 대구, 안동을 거점으로 학교, 병원, 교회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충청북도 남부 지역은 청주에 선교 거점이 있었고, 서울을 포함해서 경기도 남부와 중부 이천, 양평, 광주, 용인, 고양, 김포 지역이 또한 그들의 선교 지역이었으며, 황해도 중북부 지역과 평안도 대부분의 지역이 역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 지역에 속했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 지역은 호남지역과 충청남도 서해안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나다 장로교는 원산을 비롯하여 함경도를 선교 지역으로 삼았고 뒷날 간도 지역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호주 장로교는 1889년에 서울로 처음 들어왔지만 1892년에 선교사를 보낼 때는 서울로 보내지 않고 그로부터 2년 전 데이비스목사가 돌아가신 부산으로 보내어 부산과 마산, 통영, 거창, 진주 지역을 선교거점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미국 북감리교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 평안도 영변, 진남포 일대, 해주를 비롯한 황해도 남부 지역 그리고 수원, 평택을 비록한 서해안 지역,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북부 그리고 강원도 원주를 비롯한 강원도 남부 지역 등을 선교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미국 남감리교는 물론 서울을 포함해서 경기도 북부와 개성, 강원도 북부 지역을 근거지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원산을 비롯해서 강원도 춘천 이북지역 역시 미국 남감리교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상남도 함안군 지역은 호주 장로교회가 1889년부터 일찍이 선교를 지작한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부친 손종일 장로

그의 아버님 되는 손종일씨는 1909년 삭발(단발)을 하고 190952일 기독교에 입교해서 1910년에 세례를 받고, 1914년에는 영수가 되고, 1919년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5년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해서 평생동안 계속했다는 신앙경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양원목사의 출생과 유년시절의 신앙생애 1

 

손양원목사는 190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고, 동방요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곤혹을 치렀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9193. 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그 지역에서 주모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1년간 체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아들 손양원은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해서 야간에는 만두장사등을 하면서 고학을 했습니다. 고학을 하면서 성수주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니까 자연히 가게 주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쫓겨나서도 그는 십일조를 엄수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아버지의 3. 1운동 관여 때문에 중동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가서 스가모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그는 기도와 전도와 성경읽기에 힘썼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생애의 제2

1920-458월까지 손양원목사의 제2기의 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경남성경학원을 입학해서 졸업하고, 원동교회를 개척했으며, 1935년에는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해서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신학교 졸업후에는 부산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순회 전도를 했고, 1939년부터 여수 애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에는 말세신앙과 신사참배 거부, 일본의 악정과 우상숭배 비판등으로 여수 경찰서에 수감되었으며, 그후 햇수로 6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 투쟁으로 인한 재판에서 그가 정식으로 언도받은 형량은 16개월이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재판이 있기까지의 구금상태가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면 차라리 나은데 경찰서에 구치되어 있을 때가 그렇게 괴로웠다고 합니다. 16개월을 살고 난뒤에도 그는 계속 전향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사참배에 대해서 조금 융통성을 보였으면 내보내려고 했는데 전혀 융통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검사 앞에 불려갔는데, 당시는 물론 전도사 시절이었습니다만, 손목사를 가리키며 검사가 입회한 서기에게 물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입회한 서기가 대답했습니다. "요즘 심사참배에 대해서 융통성을 가지고 국체에 협력하려고 합니다"서기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대충 얼버무려서 손목사를 내보려는 의도 때문이었겠죠. 그러나 손목사는 즉각 서기의 말을 받아서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하고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결국 해방될 때까지 감호소 생활을 했던 거죠. , 공산주의자가 형을 마치고 난 뒤에도 사상전향 하지 않으면 보호감호 처분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해방될 때까지 나오지 못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방후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제시대의 검사나 경찰들이 남긴 기록에는 모두 손양원"전도사"가 한결같이 "목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전도사나 목사의 구분을 이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목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의 여러 보고서라든지 그에 대한 일화나 기록 가운데 목사라고 되어 있는 부분들이 상당히 나오는데, 이 때는 아직 정식으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필요가 있습니다.

 

194810,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반란군에게 총살당했습니다. 그후 아들을 죽인 여러 청년들 중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자가 어떻게 해서 잡히게 되었습니다. 안재선은 그 당시 계엄하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손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해 달라, 절대 구타도 하지 말라, 그 사람을 내 아들로 삼겠다고 하는 뜻을 전달해서 그는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해방후에 우리나라에서 국기배례 문제가 났을 때, 교계는 신사참배 투쟁으로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던 터라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했습니다. 여러 기독교 대표자들과 함께 면담한 것이지만, 요즘 우리가 국기배례시 절을 하지 않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게 된 것이 다 이분들의 공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6. 25사변때 즉, 92849세 나이로 여수 근처 미평 과수원에서 도주하는 공산주의 자들에게 총살되었습니다. 1029일 남대문 교회에서 손양원목사 추모예배가 있었는데 참석자중 박형룡박사께서 추모사의 제일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경건인이요, 전도자요, 신앙의 용사요, 나환자의 친구요, 원수를 사랑한자요, 순교자요, 성자이다. 그의 일생은 기도로 호흡을 삼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아 영적 만족과 감사, 충만함으로 찬송을 끊지 않은 위대한 경건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 사경회를 통한 감옥에서의 전도 등으로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해방후 그는 부흥회를 5년 남짓하여, 60여회를 인도했다. 그리고 그는 또 위대한 신앙의 용사로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수년간 옥고를 치른분이다. 한센병자의 위대한 친구로 부산 한센병원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 이래 여수 애양원 한센병자 교회에서 남은 여생을 헌신했다. 또 그는 원수를 사랑한 위대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오히려 자식으로 삼아회개시켰다. 그는 양떼를 위해 의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신 위대한 순교자이다"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경건 생활

 

지금부터 그의 생애와 경건생활에 대해서 제가 아는대로 조금씩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특별한 자료를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일상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얘기하는 겁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분에 관한 자료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가 남긴 사랑의 원자탄 전편과 후편, 설교집, 옥중서신이 그 세 자료가 되겠습니다. 안용준목사님이 편찬한 설교집이 있고, 1950년대 고려신학교에서 나온 "파숫꾼"이라는 잡지에서 손양원목사의 옥중서신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옥중서신은 김승태씨라고 하는 분이 편찬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증언"이라는 책속에 있던 것인데 안용준 목사님이 발췌해서 "파수꾼"에 쉽게 풀이, 소개했습니다. 이 세 자료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가정적인 배경과 효심

그는 우선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자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한문 서당에 다녀(물론 보통학교도 다녔습니다만), 한문에 아주 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편지나 글 가운데 7언구로된 한자시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한문을 배우고,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아주 지극했습니다. 그가 애양원에 들어가서 거의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한센병 환우 노인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경로잔치를 시작한 것도 자기 부모님을 생각해서였다고 합니다.

 

그의 부친을 향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하나있습니다. 그는 옥중서신에서 부모의 백수, 즉 흰머리의 원인은 "소자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친의 기일을 당한 나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어머님의 은공자애를 추억해 마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녀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가르쳐 달라고 부인에게 부탁한 부분이 있습니다.

 

효행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혼정신성昏定晨省", 즉 저녁때 부모님 자리를 펴드리고, 신 새벽에 나와서 살피라는 거죠. 그리고, 더 극진한 효는 부모님께 새벽에 옷 입을 때 추울 테니까 그것을 자기가 껴입거나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해서 어른들이 춥지 않게 입히는 것입니다. 이 혼정신성을 철저히 하도록 하라고 그의 자녀, 동인, 동신, 동희에게 부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효행이야말로 "인자지도"즉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그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 경우, 어머니께서 9년 전에 8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가 어려운 위치에 있어서 효도를 잘못했습니다만 지금 아이들에게 제가 한 것 이상으로 요구를 못합니다. 여기에 보면 "무릇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출필고(出必告)하고 반필면(反必面)하라. 출필고, 집을 나설 땐 반드시 부모님께 '어디 다녀오겠습니다'고하면, 반필면, 돌와왔을땐 반드시 얼굴을 대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부모가 오늘 내 자식이 어디에 가는지 알게되고, 돌아와서 얼굴을 대해야만 이 아이가 오늘 무사했구나, 이 아이가 오늘 근심이 있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 한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것을 꼭요구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너희가 부모님에게 얼굴을 보이라" 그러니까 자연히 부모에게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너무 늦게 들어올 수는 없겠죠. 아버지가 자면 곤란하니까요.

 

지금 한국교회에 가정문제, 자녀문제가 심각합니다. 자녀문제가 심각한 이유가 무엇이냐?동양은 동양대로 예절과 질서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어릴 때 보니까, 물론 교육적으로 열악한 한경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교역자 자녀들 중 참 불효한 사람들이 많았고, 제대로 학교 교육을 안 받으려고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통계를 내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날 역시, 기독교 신자의 가정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다른 가정의 아이들보다 원만한 인격교육을 받는다는 통계를 본적이 없습니다. 자녀교육에 관한 한 지금은 크리스천이나 비크리스천이나 다 같습니다. 이게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크리스쳔 가정에서 부부관계나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가 좀더 나아지는 게 보이면 우리가 큰 소리좀 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좀처럼 그런 결론이 안 나올 듯싶습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시키는 분들의 가정이 상당히 안정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제사를 굉장히 반대하고 있지만 제사를 한번 드리고 나면 아이들 생각이 참 많이 바뀝니다. 그런데 가정예배 드리고,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것이 1년에 한두 번 있는 제사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하는 생각을 할 때 참 안타까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등한히 하고 있는 이부분에 대해서 손양원목사 자신은 철저히 교육받았고, 자녀들에게도 이 효행 교육을 아주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욕정이 풍부지 자욕양이 친부대"(樹慾靜而 風不止 子欲養而 親不待)

 

"나무가 비록 가만히 있고자 하지만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그 시간을 기다리시않는다"즉 돌아가신단 말이죠. 이런 말을 하고, 생각하면서 자식들에게 효행을 권고하시고 자신도 거기에 앞장서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즉 착한 선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는 것이니,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대소를 불문하고 행하라"이 말은 부모님에게 효행을 하고 싶어도 때가 있으니 놓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손양원의 기독교 신앙

그는 효행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순진무구한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뒷날 신사참배에 반대하면서 강골의 의지를 가졌던 것은 철저한 신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신앙을 분석해 보면 몇 가지가 나옵니다. 우선 그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신()도 있을 수 없다"하여 기독교가 유일신 종교임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중 351페이지를 보면 "유일신 종교"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하늘에 두해가 있을 수 없고, 일국(一國)에 두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이것은 유교 경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어떻게 둘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외에 구원이 또 있으랴.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는 다른 신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대성이지만, 오직 내 구주는 홀로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자 또 어디 있으랴.

이 신을 위하여는 아까울 것 무엇이며, 이 주()를 버리고 내 어디 가랴"


하는 운문체로 된 글을 남긴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오늘날의 종교다원과 비교되는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아주 확고 부동한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해 "기독교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운문체로 쓴 글이 있습니다.

 

"불붙는 듯한 열심,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

산을 옮길 확신,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

취하는 감동,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

고생을 무시하는 인내,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

현재를 업수이여기고 장래의 광명을 안전(眼前)에보는 신앙,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타계주의 신앙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한국교회가 3. 1운동에 참여해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해서 실의와 좌절을 겪고 있었을 때 길선주목사, 김익두목사, 이용도목사등 많은 부흥강사들이 나와서 새 하늘과 새땅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3. 1운동을 통해서 이 땅에 독립된 조국을 다시 찾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걱정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어서 갈

저 나라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해 놓고 있다. 그러니 용기와 확신을 다시 갖자"고 하면서

새하늘과 새 땅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세지향적, 타계지향적인 신앙으로 점차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1930-40년대의 일제의 혹독한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박해와 50년대 6. 25사변으로 인한 민족적인 혼란 등으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으로 대표되는 타계주의 신앙이 한국교회에 팽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시절에 그는 "현재를 업수이녀기고 장래의 광명을 안전(眼前)에 보는 소망,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내세에 다가올 소위 하늘나라의 영광과 이 세상에서의 생활 자체를 하나로 융합하려고 하는 말하자면 이원론, 이분법이 아니라 일원론적인 하나님 나라관을 이미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가 얘기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신앙은 진리이니라"하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의 "나의 기독교 감명"이라는 것을 보면 그의 신앙관이 일부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게 된 이후 벌써 25개년동안이나 되었다. 나는 그 동안에 천태만상의 신앙으로 복잡하였다. 여러가지의 각 신앙 방면에서 오는 신앙 관념에서 헤매이기도 하고 나의 내적 실생활에 있어서 많은 의심과 고민 중에서 헤매었다. 그러다가 30세 되던 해(1932년경)부터 정통의 기독신자가 된 것 같다. 그전에는 기독자는 되었으나 이교도의 색채가 많아서 의심과 고민에서 불만을 종종 느꼈다. 그러던 것이 30세부터 참 기독자의 생활로서 내려오다가 이제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제부터는 별 기이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려한다. 세중(世中)의 잡다한 학설에나 각종교 등의 신비한 교리에나, 기독자 중의 별 이상한 여러 가지의 신앙 관념에도 눈을 뜨거나 귀를 기우려보지 않으려 한다. 다만 예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고, 그의 부활을 나의 부활의 사실로 하여 그 자체를 받게 되어 나의 사는 현재 생활이 즉 예수의 생활 그대로가 됨을 믿어 나의 평범한 생활에서 그를 믿고 자라서 나아감을 믿는 신앙이 되게 되었다. "

 

신사참배 반대 투쟁

이런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1930년대 말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파동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대해서 용감하게 반대하고 나오는 신사참배 기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주기철목사, 이인제 전도사와도 상당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서로 신앙 동지들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유일신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옥중에 들어가서 혹은 경찰서, 구치소에 들어가서 검사나 경찰서 고문들과 여러 가지 토론을 합니다. 이 토론에서 점차 그가 왜 신사참배를 할 수 없느냐에 대한 명확한 이론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검사와 만나서 천황이 현인신(現人神)됨을 부정합니다. 일본의 신사, 신도에서는 천황을 사람으로 나타난 신이라 하여 현인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손목사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만이 너희 들이 말하는, 너희들 문자로 얘기하는 현인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검사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현인신이 되는지 얘기해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현인신 됨을 말하면서 동시에 일본 천황이 현인신이 되지 못함을 얘기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시게 된 것은 4천년 전부터 예언을 통해서 오신 것이다. 예언을 통해서 그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이다. 너희 천황이4천년 전부터 예언된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그리스도는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났다. 너희 현인신이 그러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다. 너희 천황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을 내보아라. 또 십자가를 지셨는데 속죄, 구령을 위해서 지셨다. 너희 천황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얘기가 어디 있느냐? 그 예수는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너희 124대 천황가운데 다시 살아났다는분누가 있느냐? 나아가서 예수께선 그가 오신 그곳으로 승천하셨다 너희 현인신 가운데 그런 사람어디 있느냐?“ 하고 따졌습니다. 따지니까 검사가 더 이상 얘기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찰서나 구치소에서 동방요배, 즉 동경의 황궁을 향하여 허리 굽혀 절하는 것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검사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계명이니 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비를 참 잘했 습니다. “일국(一國)의 황제의 명령도 어겨서는 안 되거든 하물며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가 어떻게 어길 수 있겠느냐? 너희 검사들은 천황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되지 않느냐? 천황보다 몇 배나지엄하시고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어떠하겠느냐?"

 

둘째, "우상에게 절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다"고 말함으로써 현인신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일본의 천황과 신사에 안치된 모든 신들을 우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셋째, 그는 아주 이상한 논리를 폈습니다. , 국민 된 의무로서 하 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취조하던 검사가 눈이 뚱그레져서, “국민 된 의무라면 신사참배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 세상 역사를 볼 때 우상숭배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 그런데 국민 된 자가 우상숭배함으로써 왜 그 나라를 망하게 만들겠느냐?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장숭배를 안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보면 이분의 반어적인 논리가 당당합니다. 앞서도 언급했습니다만 검사측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려고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 있으면 탁탁 끊으며 자기의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검사와 재판장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니까 결국 징역 16개월의 선고가 났습니다

 

그후 한 번 항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항고한 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제가 항고한 것은 재판이 잘못되었거나, 16개월 감옥살이 하는 것이 싫어서, 불평의 감정을 나타내거나 벌을 면해보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한 번 더 재판을 받게 되면 재판 정에 가서 기독교 진리를 더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항고한 것이니, 아버지, '저 놈이 감옥살이 하기 싫으니까 구차스런 항고까지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 결국 항고는 기각되고 원심대로 16개월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16개월의 징역이 확정된 후 그가 보인 태도가 참 훌륭합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기쁜 소식을 듣게하시니 무엇이라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 다시 말해 무엇이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물론 후일 두 아들이 죽고 난 후 얘기한 "열 가지 감사"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만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감옥살이 하게 해주시고, 나 같은 죄인에게서 순교하는 아들이 둘씩이나 나오게 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겁니다. 그의 생활이 감사로 일관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의 한문 지식과 옥중서신

그는 한문을 잘 썼는데 한두 가지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항고가 기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난뒤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원본은 한문으로 되어 있지만 그냥 한글로 번역된 것을 읽겠습니다

 

"멀리 집을 떠나서 옥 가운데 들어오니   

깊은 밤, 깊은 옥에 가득찬 근심이 깊구나.    

밤 깊고 옥 깊고 사람 근심 깊으나  

주와 더불어 같이 거하니 항상 기쁨이 넘치는구나   

옥고 4년 많고 많은 날이나,    

주와 더불어 함께 즐기니 하룻밤과 같았구나.    

과거 4년 동안 안보하신 주께서는   

미래에도 함께 하실 줄 확실히 믿노라. "

       

여기에서 4년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손 목사님은 정식 재판을 받기까지 25-6개월간을 이 경찰서에서 저 경찰서로끌려다니며 예비 구금 상태로 지낸 적이 있는데, 그것까지 합쳐서 4년 동안 옥살이를 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한문으로 된 시구가 번역문보다 한결 간명하고 감동이 진합니다.

 

신학적 입장과 성경관

그는 이런 신앙 확신뿐 아니라 신학적인 입장도 대단히 분명했습니다. 특히 그의 성경관을 볼 때 그의 신학과 신앙의 확신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학과 신앙 면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에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진보와 보수가 요새는 서로를 상당히 수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운동이나 사회의식 같은 면을 볼 때 오히려 복음주의 계열이 청년층에서는 훨씬 더 활발하고 예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 수렴되지 아니한 특별한 것 하나는 성경관입니다. 이것은 변한 게 없습니다. 복음주의의 대명제는 성경은 유일무이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데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확신을 거의 못 갖고 왔다갔다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다가, 또 필요에 따라서는 어느 성경을 말하느냐?" 하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경관은 우선 "성경은 유일 절대 지상의 교리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 확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라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때는 그다지 보편화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새로운 조류로서의 신신학이라는 것이 일부 들어왔습니다. 김장호 목사라는 분이 당시 "월리엄 커"라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성경에 대해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해석을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1910년대였습니다. 예를 들어,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을 두고 "그건 모두 점심밥을 싸와서 한 어린아이가 점심밥을 내니까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도시락을 끌러 먹고 나서 12바구니를 남기게 되었" 하는 식의 해석이라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도 사실은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는 식의 얘기 말이죠. 그리고 새로운 신학 해석 방법으로서 소위 고등비평이라는 것이 1930년대 초부터 들어옵니다

 

20년대 말에 프린스턴과 노스웨스턴신학교를 거쳐 돌아오는 김재준 목사가 한국으로들어오면서 이 신학 방법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자유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성경관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 목사님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검사와의 대화에서 "일자일획이라도 가감해서는 불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성경의 내용은 다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용기있게 말했습니다. 또 그는 '성경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지배자 신이시요, 너희 일본이 얘기하는 천황신을 비릇해서 800만 신도 그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하에 있다. 여호와 이외에 소위 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검사가 나중에 우리 천황도 그렇단 말이냐?”하니까 손목사님은 "천황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은 것에 불과 하다'고 긍정적으로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빼앗으면 너희 천황도 미끄러진다"는 얘기를 반어적으로 한 것입니다.

 

손양원과 말세론

특히 길선주 목사를 비롯해서 타계주의적 신앙을 강조했던 많은 분들의 글 가운데 말세론이 1920년대부터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 글들을 살펴보니 손양원 목사님도 전천년설에 입각해서 자기의 말세론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검사나 경찰에게 취조를 받으면서, 또한 재판을 받 으면서 자신의 말세론을 펼쳐보입니다. 그는 말세에 예수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때 부활한 신도들은 7년간 공중 혼인잔치에 참여한다. 이 때가 되면 땅 위는 대환난 시대가 와서 소위 아마겟돈전쟁이 일어날것이다 이 전쟁 말기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지상으로 재림하시고, 이 때는 세속권력이 모두 파괴되고 기독교 교리의 통치제도를 가진 국가가 조직되면서 이 사회나 세계가 변혁된다. 이 때가 되면 일본을 비롯해서 지상의 모든 국가가 멸망할 것이다 또 이때가되면 예수 그리스도가통치하시리 이때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잘믿은 사람들은 지상의 분봉왕으로, 신앙이 약한자들이나 불신자들은 백성이 되거나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나름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때때로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일본이 망할 것을 강력하게 예언합니다

 

취조관의 논리와 손양원목사의 대응논리

당시에 신학을 공부한 일본 기독교인 한 사람이 장로직에 있으면서 감옥소 과장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와 대화할 시간이 생기자 손목사님은 그를 크게 꾸중했습니다 내가 들으니 당신이 신학을 공부했고 일본 기독교의 장로라고 하는데 일본이 망한다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상숭배하는 나라는 모두 망하므로 당연히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하는 일본은 망할 것이며, 그 책임은 직접 신사참배를 한 국민에게 있다는 논리가 여기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생활을 할 때 올무가 되는 사람은 핍박하고 불신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옆에서 예수 믿는다 고 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느 교회 목시님은 술, 담배 다 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못 합니까?" 하면서 유명한목사님들을들먹입니다. 그럴 때 굉장히 곤혹스럽지 않습니까?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경찰이나 검사가 토론하고 문답할 때 손양 원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유명한 목사들은 신사참배 하는데 너는 무슨 특별한 예수 믿는다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느냐?" 하는 식의 논리로 굉장히 곤혹스럽게 만든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취조하는 중에 그를 괴롭힌 논리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다른 목사와 다른 신학자들은 다 신사참배 하고 국체를 인정하는데 너만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목사와 이론가를 직접대면시켜 손양원목사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목회자가 목회를 해야지 당신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결국 당신 혼자 감옥에 가게 되면 교회를 버리고 도피하는 것이다. 당신 혼자 도피하고 한국 교회를 방치해서 되느냐?“하는 논리가 나왔읍니다. 넷째는, ”기독교는 믿어도 좋다. 그러나 미국식 기독교는 믿어서는 인된다. 나아가서 일본식 기독교를 믿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적 기독교를 믿는 것을 반대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 때 손 목사님도 많이 동요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미. 일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하에서는 "미국적 기독교"를 믿는 예수 교인들이 미국인들의 스파이로 오인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기독교인에게는 미국적이니, 일본적이니 하는 말은 붙일 수가 없다. 만약 미국적이니, 일본적이니 하는 얘기를 하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기독교를 일본적으로, 미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미 기독교가 될 수 없고 단지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을, 일본을 기독교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대응했습니다.

 

다섯째는, 일본이야말로 종교를 창조한 나라요, 종교를 개혁하는 개조하는 나라라는 논리입니다. 결국 불교나 유교도 일본에 들어와서 일 본적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 기독교도 일본에 왔으니까 일본식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대해 손 목사님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유교나 불교가 참 유교나 참불교가 될 수 없다. 참 기독교는 일본에서 일본적으로 되어야만 완성되는 것 같이 국기를 무시한 종교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국가가 있고 난 뒤에 종교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당신같이 국가를 무시한 종교가 있을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신사참배나 동방요배를 반대하는 것을 통해서. 그를 비애국자, 비국민으로 몰아가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 그는 "만약 국가가 있고 난 뒤에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인 경우에는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신 후 만물과 사회와 조직으로서의 국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전에, 기독교 이전에 국가가 있 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반박했습니다. , 하나님은 국가가 있기 이전에 있었으므로 국가가 있고 난 뒤에 종교가 있다는 식의 논리는 맞지 않다는 답변이죠! 더 나아가서 일본인들은 유대의 멸망을 들어거 국가가 있고 난 뒤에 종교가 있음을 역설, 했지만 그가 "유대의 멸망은 완성적 멸망이다. , 유대교가 갖고 있던 옹졸한 것 자체가 기독교에 의해 망함으로써 기독교로 의식전환이 되었고, 종교적으로 승화되 었으며, 치역적으로 승화되었다"고 답변한 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손양원목사의 경건생활의 기초

오늘 우리의 제목 가운데 하나가 손양원의 경건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첫째로 그의 경건생활의 기초는, 그의 글과설교를통해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 말씀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 곧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순종이 부족 한 것이 죄"라고 정의합니다. 손 목사님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대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나 순종의 부족함이 곧 죄악"이라고 정의합니다. 그의 태도로 볼 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은 곧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결국 유일신, 즉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 말씀을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가 죄를 얼마나 경계했는가는 자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늘 죄에 대한 경계의 글을 썼습니다.

더구나 죄 짓지 말라고 하면서 옥중에서 구체적인 상황까지 얘기합니다. 그의 "기도의 일절"이라는 제목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죄 짓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한 죽음이 신앙정절에 기상이 되리로다. , 주여 ! 하루를 살지라도 무죄(無罪)의 생활, 백년의 괴로움이라도 무죄(無罪)의 생활, 나는 원하고 또 원하오니 피 묻은 그 손으로 나를 도와주소서. 죄 짓고야 이 땅에 살 맛 없사오니 차라리 이 몸을 데려 가소서. "

 

그가 죄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가졌는가가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경건생활에 대한 기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이것은 바꾸어 죄에 대한 두려움, 즉 죄를 멀리 하려는 것으로 나타나고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지식의 구비

둘째로, 그의 경건생활의 다짐은 결국 믿음과 지식, 즉 신()과지 ()의 구비, 이 둘을 같이 갖추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확신, 곧 신의 구비를 위해서 무엇에 열심이었습니까?기도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한 분입니다. 나중에 6. 25사변이 나서 애양원으로 피난 온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사님만은 피하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거의 한두 달 동안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이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통해서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기도가 없었더라면 그는 동요되었을 겁니다 결국 그가 믿음을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기도입니다. 또 지()를 구비하도록 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신과 지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무신(無神)의 지(), 즉 신앙이 없는 지()나 무지(無知)의 신() 지식이 없는 신()은 있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과 학문이 똑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군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의 실천

셋째로 그의 경건생활은 신()과 지()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긋났을 때 회개를 외침으로써 다시 개혁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신과지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는 신과 지를 행()과 일치 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나 아는 것을 행위, 실천과 분리시키고 있다는 데 한국교회의 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이분법적인, 이원론적인 신앙형태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국민으로서 신사참배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앎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명제에 대해 결국 옥에 갈지라도 자기는 신사참배를 반대해야겠다고 나왔습니다.

 

이런 장면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순교하게 되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하느냐? 목회 제일은 양떼 위주다. 양떼 위주라면, 천백 명 되는 애양원의 의지할 데 없는 형제 자매들이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온다해서 이들을 두고 나혼자 피난 하는 것이 낫겠느냐? 그렇지 않다. 목회가 양떼를 위하는 것이요, 양떼를 위하는 것이 목회의 제일의()라면 나는 갈 수 없다'는 입장 판단을 하고 거기에 몸을 던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과 지를 실천과 결부시키는그의 신앙형태였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옥중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하고 또 나와서 60여 회의 부흥운동을 하면서 그 때마다 강조한 것이 한국교회의 회개였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한국교회가 이렇게 잘못되었으니까, 이것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한 번 재출발하자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의 경건생활의 극치는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던 원수사랑에서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민족의 분단에서 오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 경건생활의 극치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방종과 유혹에 대한 경계

넷째로 그의 전도생활과 목회생활이 남아 있습니다. 해방 후 60여 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부흥회를 자주 나갔기 때문에 자신이 행여 방종이나 극단으로 나갈까 대단히 조심하고 경계했습니다 그는 "나의 부흥회 시에 먼저 읽을 것"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써놓고 부흥회 나가기 전에 몇 번씩 읽었습니다.

 

첫째, "하나님 지능을 의뢰하고 나의 지()를 믿지 말 것. "

 

둘째,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나타낼까삼가조심할 것. " 흔히 부흥회를 인도할 때 제일 빠지기 쉬운 유혹이 바로 이것입니다.

 

셋째, '성경원리를 잘 모르고 내 지식대로 거짓말하지 않을 것.

 

넷째, "간증 시에 침소봉대하여 거짓말 되지 않게 할 것. "

 

우리는 흔히 이 유혹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간증에서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습성이 있어서 자기가 조금 살을 붙이게 되면 나중에는 자신의 원래 체험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실을 얘기합니다 자기의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이 말을하니 흥분하고 저 말을 하니 좋아 하더라' 해서 곧장 왜곡시킵니다. 손 목사님의 경우를보면 말이죠, 그가 그런 유혹을 얼마나 많이 받았겠습니까?

 

6년 동안 옥중에 있었으니 옥에 있는 사람 뭐했는지 누가 보았나요?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침소봉대, 침같이 작은 것으로 막대기같이 큰 것을 만든다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하지 않도록 그는 간증 시에 침소봉대하여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빠져 있는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이것입니다. 간증자들이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나도 못 행하는 것을 남에게 얘기하여 무거운 짐 지게 하지 말 것. " 오늘날 부흥강사들이나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정말 양떼들의 신앙적 수준을 생각한다 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얘기할 때 하나님의 말 씀이니까 한다고 하는데 참조심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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