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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은 왕이지만 종으로 산다

LNCK 2019. 12. 26. 16:40

www.youtube.com/watch?v=LDNigStV3TI

신분은 왕이지만 종으로 산다 (이중적 정체성)             37:1~11            06.08.06.

 

1. 세상 승리주의에 취한 현대 크리스천

 

이상현실괴리

우리는 지금까지 큰 꿈을 꾸라!”는 설교를 듣고 자랐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인생역전을 이룬 성공 신화들을

많이 듣고 자라왔다.

 

그런데 막상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하나님이 돌봐 주신다는 크리스천들도 예외 없이...

조기 퇴직, 청년 실업, 심지어는 신용불량자 신세까지 전락하고 있다.

 

그런 이상현실괴리 속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신에게 복을 바라는 인간의 본능

수능 시험을 앞두고 모두들 좋은 성적 얻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입사 시험을 볼 때도,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종교) 믿어서 세상에서 잘 되겠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본능이다.

 

요셉 - 인생역전의 삶의 모델이라는데...

꿈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은 어릴 적에 큰 꿈을 꾸었다.

그런데 삶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인내와 의지로 이 꿈을 성취해 냈다.

그래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 는 식으로 설교하고, 사람들은 듣는다.

그가 가진 자화상을 버리지 않았더니, 결국 그 자화상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셉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인생역전의 삶의 모델이 되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왕 노릇을 강조하는 기독교 승리주의자들에게는

요셉만큼 매력적인 예도 없다.

 

성경은 왕 꿈을 준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승리와 성공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권과

왕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신분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 1:1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벧전 2:9

 

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 성경의 명령

성경이 증거 하기를, 예수님이 창조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계시고,

성도들이 그 왕국에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 자동적인 우리의 운명은

앞으로 전진해서 그 분의 이름으로 모든 세상을 정복해서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칼빈주의 대가 아브라함 카이퍼는

창조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주권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과, 동물과 식물까지도(모든 창조물을)

다스리고 보전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하등 잘못이 없다.

 

단지 어떤 태도가 문제

문제는, 이런 그리스도의 우주적 승리와 정복을

어떤 태도로 하느냐, 어떤 어조로 말하느냐 - 에 달려 있다.

힘의 논리에 의한 정복자의 어조와 태도는 - 비성경적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법론은, 십자가를 통한 고난, 희생, 섬김의 방식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하고

힘의 논리라는 세상과 똑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데서 - 변질이 생긴다.

 

십자가의 승리 방식은,

승리의 전리품을 지금 당장, 또한 현세에서 챙기지 않는다.

 

현세에서 챙기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왕 노릇 하려 한다. 고전 4:8

왕처럼 먹고 마시고 힘으로 다스리고 정복하려고 한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대가로, 내가 주님 나라의 좌우편에 앉아서

큰 덕을 보며 살겠다는 심보다. 태도와 방식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자기의 이기적 유익을 구하느냐?

타인과 그리스도의 유익을 구하느냐? 의 문제이다.

 

한국교회 안에 고린도 교인들과 유사한 세상 승리주의 방식을 많이 본다.

그러다보니 많은 크리스천들이 두 살배기 아기의 소유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위 내 것도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는 논리다.

이런 이기적인 소유욕에 깊이 뿌리박힌 심성에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과 온 인류를 내 것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이기심과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자기 몸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소유권을 주장하셨다.

 

반면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 이기심과 소유욕을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니,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 탈취하려고 한다.

 

바울의 본을 애써 외면하는 한국 크리스천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승리의 열매를 따 먹고 그 혜택을 누리며 희희낙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희생적으로

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다.

 

이런 고린도인의 관점, 세상 승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의 고난은... 바울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승리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배부름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고난과 희생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고난과 희생도 잘 견뎌내면

이 세상에서 언젠가 영광의 관을 쓰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견뎌내라고 한다.

(원래 성경적 관점은, 그 열매와 영광은 주로 내세에 약속하고 있다.)

 

 

2. 요셉의 모델

 

세상 승리주의자들의 모델로 곡해되는 요셉

이런 관점에서 요셉의 꿈과 생애는

승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요셉처럼 큰 꿈을 꾸고,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기만 하면

승리의 열매를 얼마든지 이 땅에서(현세)에서 따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 꿈이란, 개인적 야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꿈을 (제가 보기에는) 오해한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어려서부터 남에게 절 받는 삶(성공적 생애)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요셉이 인생역전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삶을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

 

요셉은 자기가 원해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의 습격을 받았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요셉을 선택하셔서 꿈을 주셨다.

 

1. 하나님은 성도에게 성경말씀()을 주신다.

얼핏 보면 요셉의 꿈은, 일신상의 성공을 보여주는 꿈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요셉의 꿈은 개인적인 성공의 꿈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의도를 요셉을 통해 전하신 꿈이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열방에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드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요셉의 꿈을 통해 알려졌다.

장차 있을 기근에, 이스라엘과 온 열방이 요셉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꿈으로 미리 보여주셨다.

 

2. 하나님은 약하고 낮은 자를 택하여 말씀()을 주신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할 인물로,

야곱의 모든 장자들을 제쳐놓고

거의 막내아들인 요셉을 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형들은 물론 심지어는 부모까지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요셉의 꿈은, 아버지 야곱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꿈의 내용이 당시 사회 기존 질서를 뒤엎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야곱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대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동생인 자기가 받았던 것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셉의 꿈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요셉의 꿈 얘기를 듣고는, 요셉을 꾸짖었다.

 

3. 성경말씀()은 세상에서는 위험하고 과격하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요셉에게 주신 꿈처럼, 오늘날 성도 여러분에게 주신 꿈은 위험한 꿈이다.

이 세상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과격한 꿈이다.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1-53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같은 당신의 꿈을 성취하시기 위해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다.

 

권세 있는 자들과 교만한 자들이 이런 꿈을 들으면 좋아할 리 없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일종의) 꿈을

이 세상의 기득권자들이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런 하나님의 꿈은, 세상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4. 성경 말씀()은 세상과 대립 하게 한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꿈과 비전은

일차적으로 우리 개인적인 소망과 꿈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위험한 꿈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소망 이 아니라, 사명 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건설하는 사명이다.

 

이 때, 이 땅의 권세자들과 공중권세는 이런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들을

항상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없애버리려고 했다.

자기들이 권세를 잡고 있는데, 그리스도라는 왕이 나타나서

그 권세를 접수하려고 하면, 순순히 내어줄 리가 만무했다.

 

5. 성경 말씀()에 사람들은 대적 한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권세를 동생에게 빼앗기고 절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는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 라고 했다.

 

그것은 단지 미움 이상이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기 위해,

그 꿈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긴 것이다.

 

6. 성경 말씀()은 성도를 고난 에 빠뜨린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 시위대장 보디발 집의 노예가 된다.

요셉은 자기 꿈을 성취하기 위했고,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애굽에 간 것이 아니었다.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사명인지도 모르는 사명 때문에

형들에게 팔려 강제적으로 애굽으로 갔다.

그에게 놀라운 꿈을 두 번씩이나 심어주신 하나님은 어떻게 이렇게

요셉에게 잔인하셨을까?

꿈은 같은 데 반해, 실제 요셉의 모습은 이 아니었던가?

(예수님도 이셨지만, 의 모습으로 사셨다.)

 

7. 성경 말씀()은 고난 중에 형통을 준다.

이제 보디발의 집에서, 애굽의 감옥에서

요셉의 앞날에 엄청난 먹구름이 몰려 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 가 되어... 39:2

 

우리는 여기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형들에 팔려서 애굽으로 오지 말았어야지...

현재 우리 시각으로는, 요셉이 팔려 종이 된 것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보기 어렵다.

 

(요셉이) 형통한 자 가 되어...

정말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면,

그가 종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가 되어야 되는데...

 

성경 기자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이렇게 막 매몰차게 기록해도 되겠는가!

팔려 와서 남의 집에 종 된 것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태연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고나니까, 당시 과거의 종살이도 추억으로

여겨져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가?... 아니다.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꿈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을 순종하며 걷고 있는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어 계속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8. 성경 말씀()성취는 나도 모르게 진행 된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은 자기가 장차 총리가 되리라고 내다보고

꿈의 대가를 치르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고난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셉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단지 묵묵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종의 길을 걷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 점을 하나님은 보시고,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기자는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성경기자의 논평은

실제로는 요셉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꿈으로 제시해주신 그 계획이

마지막으로 실현될 때까지는

요셉의 형들은 물론, 요셉 스스로도

그 계획이 어떻게 성취될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두고

숨어서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9. 성경 말씀() 종의 현실을 통해서 성취된다.

요셉은, 꿈은 왕 같은데 반해서

실제 현실은 종의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종살이 하면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주인인 보디발조차 분명히 보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 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며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39:3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 39:5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너희로 인하여 열방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을 주셨다. 12:3

이 약속이 보디발의 집에서 성취되고 있다. 종의 현실을 통해서...

 

요셉의 왕() 꿈이 보디발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증거는 거기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여호와의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의 모든 소유에 미쳤다는 것인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요셉의 종의 현실을 통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 방식이다.

 

적용 : 종의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라

교우여러분, 왕 꿈을 꾸었는데, 현실은 종이신가?

사실 교회 와서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왕자,

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우리는 붕 띄운다.

그런데 된 현실과 괴리감으로 종종 절망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이, 나 자신의 꿈이 아닌

그런 나의 종 된 신분을 통해, 미미하게 나마도 성취되어져 가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꿈이 이루어지고, 개인적인 소망이 성취되기는커녕

오히려 요셉처럼 남의 일터에서 머슴살이 하고 있어서 실망하는가?

그러나 비록 요셉처럼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당신을 통해 그 집이나 기관이 복을 받는다면

당신은 지금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

 

그런데, 꿈을 크게 꾸고 그 대가를 치르고 그 꿈이 이루어져서

이미 부요하고 풍요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이 열방과 이웃에 복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꿈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10.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형통 하다.

보디발의 집에서 10년이 지났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도 신실했고, 보디발이 그것을 보았다면

10년 종살이 후에 미래가 활짝 열려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요셉은 또다시 급전직하(걷잡을 수 없이 돌변)한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well built and handsome 39:6

 

요셉은 당시 27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well built 몸짱에다가 and handsome 얼짱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

이보다 신실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신실함으로 보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어떻게 지난 10년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한 결과가 이 모양인가?

10년간의 성실함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재앙이다.

 

이로 인해 요셉의 왕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더욱 적어졌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감옥에 갇힌 요셉에 대해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창 39:23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감옥에서 형통해봐야 얼마나 형통하겠는가?

남의 일이라고 우리도 대강 읽고 지나가지만 본인 입장은 다를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누명을 쓰고 3년간 감옥에 갇혀 있은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인가? 아니면 벌을 내리신 것인가?

 

11. 무엇이 참된 형통(=성공)인가?

창세기에 요셉이 형통하다prosperous, successful는 말은

성공했다는 말과 뜻이 같다. 39:2, 39:23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사람이... 형통(성공)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개인적인 풍요와 성공 가운데서 찾으려 한다.

그런 관점으로는, 39장의 요셉 사건을 이해하기 힘들다.

 

감옥에서 전옥이 감옥의 일체 행정을 요셉에게 맡긴 것이 무슨 축복인가?

해봤자 감옥인데...

감옥에서 형통한 것이 무슨 형통인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를 개인적 성공에 두지 않는다.

비록 요셉은 개인적으로 성공 못했지만(감옥에 있으니까)

그로 인해 감옥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면

성경은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비록 자기는 종의 신분에 있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자가 바로 - 형통한 자, 복된 자이다.

 

교우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회에서

요셉처럼, 우리 때문에 우리가 처한 사회가 복을 받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는 형통한(=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형통해 보여도, 이미 풍요롭고 이미 부요해도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어쩌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 형통(성공)한 사람이다.

요셉은 어떻게 이런 힘든 종살이, 감옥살이를 버틸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총리가 되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요셉이 버틸 수 있었다.’

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13년의 긴 어두운 터널을,

요셉이 총리되는 꿈으로 버텼다는 기록은, 성경에 안 나온다.

애굽에 총리가 될 때까지, 꿈에 대한 언급은, 그 중간에 나오지 않는다.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와서,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고는

요셉이 자기가 꾼 꿈을 기억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42:6, 9

 

지난 13년간 요셉은 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극복했다.

 

고난의 면제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도 함께 하신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형들이 요셉을 질투해서 팔아버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미워해서 감옥에 가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인간들이 미움과 질투로 만들어낸 비극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하나님의 섭리

어떤 비극적 상황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를 돌봐 주셨다는 것이다.

종살이할 때도, 감옥에서도

언제나 요셉과 함께 하시고 돌보아 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따라서 요셉의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예로 팔려간 후에나

감옥에 들어간 후에나

동일하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로 인해 요셉은 형통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기록한 성경기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의 인생에서 고난을 면제하지 않았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는 것과, 감옥에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랑은

요셉이 곤경 중에 있을 때에도 늘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곤경가운데서 요셉은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풍요가운데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사명, 우리의 꿈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다가 당하는 그 고난 때문에

그 고통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게 경험한다.

 

벤자민 바이르 목사의 예

장로교 목사로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거의 30년간 선교활동을 하던

벤자민 바이르는 이란 콘트라 사건이 터지자

1983년 이슬람 지하드 테러단체에 납치되어

16개월 동안 잡혀 있었다.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어둔 방에 혼자 갇혀 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외로움과 절망으로 폐인이 되었을 터이지만

바이르 목사는 이 처절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애를 썼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있다.

 

나는 낮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낮잠, 담요, 버티는 힘이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렸다.

그 외에도 감사 드려야 할 하나님의 선물을 찾아보았다.

가려진 창의 가리개를 올려서 빛이 어두운 방으로 스며들게 했다.

방안을 둘러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천정에 달린 전깃줄이 보였다.

전구와 소켓은 제거되었고, 전깃줄 세 가닥이 나와 있었다.

마치 세 개의 손가락이 아래를 향해 내려오려고 하는 듯 보였다.

 

나는 로마 시스틴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그림 중에서

아담에게 손을 뻗치시는 하나님의 손(세 손가락)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마치 하나님이 제게 손을 뻗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심을 느꼈다.

너는 살아있다. 너는 나의 것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너를 불렀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정체성

교우 여러분,

마치 태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야곱과 요셉이 선택된 것처럼

우리 역시 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택해졌다.

하나님은 거의 막내인 요셉을 택하시고, 왕을 꿈을 통해

요셉이 평생 이루어야할 사명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천하고 미련한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요셉은 자신에게 그 꿈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 사명인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역시 우리에게 주신 꿈 때문에 얼마나 큰 시련을 당할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루터가 말한 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왕의 신분이지만

종으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 꿈을 꾸지만, 현실은 의 모습인 것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정체성 때문이다.

신분은 왕인데, 종으로 섬기라니...

이런 이중적 정체성은 종종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이는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예수 안에서 이 되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처럼 누리고 살려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힘들뿐더러

혹시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권리포기하고, 으로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길만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그리고 오직 여기에만 우리의 희망이 있다.

요셉이 왕의 꿈을 꾸고도 13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만을 신뢰한 결과

요셉은 물론,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 꿈을 실현하셨다.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꿈에 비해 우리 삶의 현실이 이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상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를 요셉처럼, 열방의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요셉처럼 순결한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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