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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부드러운 아버지의 돌보심 / 맥스 루케이도

LNCK 2019. 12. 27. 10:10

부드러운 아버지의 돌보심                    요20:17

 

Touches of Tenderness by Max Lucado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20:17

 

내 딸은 기분이 상했다.

아빠는 딸에게,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야!”라고 용기를 준다.

 

내 아들이 다쳤다.

아빠는 아들이 낫도록... 무엇이라도 다 한다.

 

내 자녀가 두려워하면

아빠는 자녀가 안전함을 느낄 때까지, 먼저 잠들 수 없다.

 

그렇다고 아빠는 무슨 영웅도 아니다.

슈퍼스타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부모이니까 그렇게 한다.

자녀가 상처 입으면,

부모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자녀들 돌보는 것, 그것은 부모에게 기쁨이다.

고생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부모는 자녀를 자연스럽게, 기꺼이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돌본다.

그건 고생이 아니라 낙이다.

 

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 부모의 최고 특권이 자녀를 돌보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시도록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는가?

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 받기를 주저하는가?

 

왜 하나님은, 내 문제들을 일일이 들으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인도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도 내 문제를 보잘것없다며 내버려 두시리라고 지레 짐작하는가?

그렇지 않다!)

 

혹시 하나님이 너무 바쁘셔서 나 같은 것, 돌보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전 우주를 돌보시느라 얼마나 바쁘실 텐데... 언제 나까지 돌보시랴?

그렇지 않다!)

 

혹시 내 문제는, 이때까지 내가 늘 반복해서 간구하던 것이므로

하나님이 또 들으시기에, 지루하고 덧정 없으실 것이라고 짐작하는가?

 

내가 주님께 나오는 모습을 보시자마자,

하나님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번민을 시작하실 것으로 여기는가?

 

내가 용서를 구하며 이 문제로 여러 번 기분이 좋지 않으셨죠?”라고 할 때,

하나님은 리스트를 체크하시면서, ‘이 번이 또 몇 번째인가?’ 하시면서

꼼꼼히 내 과거의 죄를 낫낫이 따지실 것이라 지레 겁먹는가?

 

왜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거룩한 언어(방언)로 기도하지 못하면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스스로 자신을 비하시키는가?

 

아빠인 내가 내 자녀들에게 기꺼이 잘 해 주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도, 그처럼 내게 잘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왜 거절하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다 보니,

신학 과정을 밟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를 배운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내가 비난받고, 상처입고, 두려워할 때

내 곁에 항상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더 성장하도록 잘 붙들어주실 것이다.

내가 상처 입을 때도 기꺼이 언제든지 도와주실 것이다.

내가 두려운 문제로 잠 못 이룰 때에도, 곁에서 같이 깨어있으신다.

언제나 영원히 그렇게 하신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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