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아버지의 돌보심 요20:17
Touches of Tenderness by Max Lucado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20:17
내 딸은 기분이 상했다.
아빠는 딸에게,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야!”라고 용기를 준다.
내 아들이 다쳤다.
아빠는 아들이 낫도록... 무엇이라도 다 한다.
내 자녀가 두려워하면
아빠는 자녀가 안전함을 느낄 때까지, 먼저 잠들 수 없다.
그렇다고 아빠는 무슨 영웅도 아니다.
슈퍼스타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부모이니까 그렇게 한다.
자녀가 상처 입으면,
부모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자녀들 돌보는 것, 그것은 부모에게 기쁨이다.
고생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부모는 자녀를 자연스럽게, 기꺼이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돌본다.
그건 고생이 아니라 낙이다.
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즉, 부모의 최고 특권이 자녀를 돌보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시도록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는가?
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 받기를 주저하는가?
왜 하나님은, 내 문제들을 일일이 들으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인도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도 내 문제를 보잘것없다며 내버려 두시리라고 지레 짐작하는가?
그렇지 않다!)
혹시 하나님이 너무 바쁘셔서 나 같은 것, 돌보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전 우주를 돌보시느라 얼마나 바쁘실 텐데... 언제 나까지 돌보시랴?
그렇지 않다!)
혹시 내 문제는, 이때까지 내가 늘 반복해서 간구하던 것이므로
하나님이 또 들으시기에, 지루하고 덧정 없으실 것이라고 짐작하는가?
하나님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번민을 시작하실 것으로 여기는가?
내가 용서를 구하며 “이 문제로 여러 번 기분이 좋지 않으셨죠?”라고 할 때,
하나님은 리스트를 체크하시면서, ‘이 번이 또 몇 번째인가?’ 하시면서
꼼꼼히 내 과거의 죄를 낫낫이 따지실 것이라 지레 겁먹는가?
왜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거룩한 언어(방언)로 기도하지 못하면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스스로 자신을 비하시키는가?
아빠인 내가 내 자녀들에게 기꺼이 잘 해 주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도, 그처럼 내게 잘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왜 거절하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다 보니,
신학 과정을 밟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를 배운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내가 비난받고, 상처입고, 두려워할 때
내 곁에 항상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더 성장하도록 잘 붙들어주실 것이다.
내가 상처 입을 때도 기꺼이 언제든지 도와주실 것이다.
내가 두려운 문제로 잠 못 이룰 때에도, 곁에서 같이 깨어있으신다.
언제나 영원히 그렇게 하신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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