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 discipline 의 비밀을 깨닫자 히12:4~7
◑1. 싸우는 군사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12:4.
▲신앙의 은유 metaphor - 싸우는 인생
신앙생활을 “달리기 경주”race에 비유하기도 하고 히 12:1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전투적인 ‘군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딤전 1:18, 6:12
엡 6장에서도 우리 싸움을 ‘혈과 육에 속하지 않은’ 전쟁에 비유했다.
신앙생활에서 선한 의미의 “싸움, 전쟁”의 비중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죄와의 전쟁이며, 죄와는 타협이 아니라 언제나 싸움의 입장에 서 있다.
또한 성도는 그런 싸움하는 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엡 6:12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존재(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다.
(이런 것들을 ①악한 천사로 보는 입장이 있고
더 확대해서 ②‘악령의 통제를 받는 악한 세상 정부’까지 보는 입장이 있다)
오늘 날, 신앙생활에 입문하고 계속 유지해 감에 있어서
“싸우는 군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문제다.
특별히 “죄”가, 내가 대항해서 싸워야하는 처절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잘 각인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죄와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죄와 그의 권세에 대해 피 흘리는 싸움을 벌이셨고 히 12:4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성도 역시, 이 전쟁에서 결코 면제되지 않는다.
▲죄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영적 삶이 무기력하고 미지근함을 벗어나기 힘들다. 히 12:4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죄와 전면전을 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탐색전만 벌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죄에 대해 반기를 들고 목숨 걸고 피 흘리기까지 하는 투쟁이 아니라
싸울랑 말랑 하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하면서 은근히 죄와 함께 공존을 꾀하기도 한다.
‘정말 집요하고 무식하게 투쟁해야 하는가?’ 라는 반문을 가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제일 역겨워하시는 것은 적당한 종교생활이다.
이런 것에 교회가 일조해서 거드는 일도 있다고 본다.
▲지난 2천년 교회 역사를 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그 사회에 받아들여졌을 때(핍박이 사라졌을 때)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멋있어 졌을 때.... 늘 문제가 있었다.
로마 황제들에게 핍박 받고, 황제들은
그들의 실정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희생양escape goat을 삼았고
그 때 기독교는 핍박과의 싸움이었고, 그 고난으로 자연히 정결케 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때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공인된 이후로
교회는 그 강력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역사를 기독교는 이후에도 누차 반복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지금 북한, 중국, 구 쏘련의 핍박 속에서 믿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의 순수성과 다이내믹 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우리 신앙은 나약하다.
기독교가 자기에게 하나의 ‘치장’에 불과한 사람도 있다.
바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다. 히 12:4
▲하나님은 적당한 종교 생활을 역겨워하신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6
가련하게 자신의 믿음이 앵꼬된(동이 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체 살거나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영적 안일함에 파묻혀 사는 우리에게 대한
날카로운 하나님의 지적이다.
▲여호수아와 12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거기 살던 아모리, 헷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심부름이나 시키면서 데리고 살지’ 하던 것이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분쟁으로 번지고 있지 않은가?
여호수아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승리를 얻긴 했지만
거기 있는 이방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여(오늘날의 “죄”)
나중에 그들로 인해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받고 살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수 13:13, 17:13, 23:12~13.
◑2. 연단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면, 거기서 회복되어진다.
*연단discipline은 - 개역성경에 히 12:5절에 ‘징계’로 번역된 말로
징계라 함은 ‘벌’punishment이란 뉘앙스가 강하나
연단이라 함은 ‘교정, 고쳐서 잘 되게 함’이란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 개역 번역인 ‘징계’보다는 ‘연단’으로 쓰는 듯함.
▲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희석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히 12:5
‘한국인의 정체성’은 일제 치하에서 가장 뚜렷하고 강하게 각인되어졌다.
한국의 정체성이 말살되려고 하던 그 시절에,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독립투사들이 앞장섰고, 모든 국민이 뒤따라 정체성 찾기 투쟁을 벌였다.
싸움 속에서, 독립투쟁 속에서 그것이 되살아났다.
믿음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고난의 상황 속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더욱 되살아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편한 상황이 오면 그런 정체성이 점점 흐릿해 진다.
성도들도 처음 진정 거듭났을 때는 그런 정체성이 강하다가
시일이 지나면 그런 정체성들이 점점 흐릿해 진다.
▲자녀이므로 연단받는다.
내가 연단을 받을 때,
그것으로부터 회복하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고 히12:7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연단을 받는다.’는
역설적(자녀면 사랑받는데...)인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12:8
미성숙한 자녀들은 이런 ‘역설적 사랑’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매 맞는 자녀보다 때리는 부모/교사의 마음이 더 아픈 것을 이해 못 한다.
▲사랑하므로 연단한다. ★
오늘 이런 성숙한 사랑이 점점 희석되고 있다.
자녀를 사랑하므로,
자녀의 아픔을 허용하고
자녀에게 아픔과 연단(디스플린, 징계성 훈련)을 초래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랑은 '아픔의 부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픔의 부재가 곧 행복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왜곡이다.
‘아픔이 없으면 행복하다!’ - 이것은 인본주의 사회가 심어주는 가치다.
그래서 아픔과 불편함을 제거하려고, 사회는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한다.
조금이라도 안 아프게 하려고 - 무통분만을 한다.
‘아프면... 무식하고 구시대적이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는 아픔을 즐기는 자학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삶=행복한 삶’이 과연 성경적 가치인가?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픔의 부재가 사랑이 아니다.
(‘안 아프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가 아니다)
자녀를 안 아프게 만드는 것 - 이것이 부모의 참 사랑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 가치관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가치관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지....
자녀의 아픔을 못 견뎌 하는 부모는... 성숙한 부모가 아니다.
자녀를 모든 아픔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은 근시안적이고 본능적이다.
숭고하고 깊은 성숙된 사랑은 아니다.
아이의 두려움과 눈물을 매정하게 뒤로 하고
아이를 혼자 학교에 남겨두고 떠나는 신입생 부모의
‘사랑의 내어 몰음’이 바로 성숙한 사랑이다.
왕따, 갈등, 오해, 실패 등의
인생의 쓰디 쓴 길거리에서,
아픔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내 자녀가
스스로 울음을 그치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너무 성급하게 뛰어가서 안아주고 달래주지 않는 것!
이런 진정한 ‘사랑의 방임’이
성숙한 사랑이다.
정말 자녀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의 미성숙한 자기보호본능의 발산인지
말초적인 반응으로 자녀를 과잉보호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어린 자녀를 학교에 보냈는데
자녀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울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고
그것이 학교 당국이나 교사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부모는 빨리 성숙해서
자녀가 아픈 것이 -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자녀의 아픔을 (나의 아픔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을 가지자.
여러분의 자녀가 평생의 인생 속에서 겪게 될
아픔이나 실패, 고통없이 자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계신다면
(그런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사랑의 부모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성숙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아픔은 필연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아픔 당하는 것을 보시고 무조건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
▲아픔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이유
① 죄를 제어하기 위한 교정적인 아픔
아이가 가시에 찔렸는데, 그것을 뽑는 데는 아픔이 따른다.
그러나 아프니까 그 가시를 안 뽑고 놔 둘 부모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죄의 가시가 깊숙이 뿌리박힌 것을 아신다.
그것을 수술해서 뽑아내는 데는 반드시 아픔이 동반된다.
② 더 큰 아픔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적 아픔이 있다.
어느 어머니고, 그 간난 아기가 수많은 면역주사를 맞는 것을 좋아할
어머니는 없다.
그러나 그 아픔이, 앞으로 당할 더 큰 아픔을 방지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하게 큰 바늘에, 아이가 기겁을 하면서 찔려도
그것을 막지 않고, 도리어 아이가 고통을 받도록 팔을 힘껏 붙잡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에게 더 큰 아픔을 예방하고 싶으셔서, 작은 아픔을 허용하신다.
③ 변화되기 위한 아픔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려면, 거기엔 자기 변신의 심한 아픔이 있다.
어두움과 어려움과 고통의 과정 속에서 성숙과 변화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밀알이 죽어야만 사는 아픔이 체험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고 아프게 하신다
는 사실이다.
너희가 참음은 연단을 받기 위함이요... 히 12:7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
아들을 연단(징계)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고
이와 같이 연단(징계)은 다 받는 것인데, 사생자는 받지 않는다 히 12:7~8
이렇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사랑의 부자지간)를 회복하면
그 아픔이, 내가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픔이 된다.
고통을 그냥 무조건 참고 꿀꺽 삼키는, 무조건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사랑의 부자)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2. 연단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9
나는 때로 하나님이 실수하셨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하나님은 왜 나를 혼혈아로 만들어주셨을까?’
(김요셉 목사님은 부친 김장환 목사님과 모친 트루디 사모님 사이)
한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은 나한테 물어보지 않아서 실수하셨다.
나한테 직접 물어보셨더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는 결코 실수가 없으시다.
비록 실수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오묘하게 완벽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아버지도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때로는 아픔의 연단도 주시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시랴! 히 12:9
모든 것을 선하시고 올바르게 섭리하시고 제어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길 수 있는 이해와 순종이 필요하다.
▲3. 연단은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는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
아버지는 우리의 미래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연단!
결국 그 열매를 바라보며, 오늘의 연단을 이겨야 하겠다.
김요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