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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LNCK 2019. 12. 28. 12:04

부흥                    13:8                  06.03.17. 장경동 목사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13:8


진정 예수님을 만나야 부흥된다.

빌립은 "와 보라" Come and See(1:46)고 전도했다.

교회에 와서come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see 되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람들이 인도되어 교회까지는 오지만 (come은 되는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see가 안 되고 있다.)

 

대신에 목사님을 만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부흥은

목사님을 쳐다보고 일어나는 부흥이 많다.

 

목사님 백 날 쳐다본다고 별 소용없다.

목사가 은혜 주는 것 아니고, 구원 주는 것 아니다.

목사는 예수님을 연결해주는 중매자일 뿐이다.

 

그러니까 (너무 부각된) 목사가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목회자가 너무 우상시, 떠받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모습은 다 감춰지고, 주님만 보여 지고

주님만 나타나고, 주님만 증거 되고, 주의 음성만 들려지도록

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록기도해야 한다.

 

요즘 목사님의 이미지 때문에 부흥되는 현상...

이것이 좋은 면도 있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상당히 회개해야 할 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교인부흥은 되는데, ‘제자부흥이 안 되는 원인이

거기에도 상당히 원인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은 교인 부흥이지, ‘제자 부흥이 아니다.

교인은 언제든지 왔다가 실족할 수 있는 사람이고

다른 말로, 아직 은혜 받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다.

 

제자는 생명을 걸고 그 신앙을 지켜 나가는 사람이다.

다른 말로, 정말 은혜 받고 변화된 사람이다.

교인제자는 겉으로 보면 비슷한데 본질이 다르다.

 

제자는 자기를 부인한다.

구약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은 반드시 먼저 죽여져야 했다.

오늘날 예배(제사)를 드릴 때, 우리는 자아가 죽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 산제사living sacrifice 인데, 살아있으나living 자아가 죽은sacrifice

예배라는 뜻이다.(12:1)

 

그런데 오늘날 죽은 교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대부분 자아가 펄펄 살아있는 교인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죽인다고 했다.(고전 15:31)

그래야 그 속에서 예수님이 살아나니까....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진다.

요즘 큰 교회로 교인들이 몰리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십자가 안 져도 되니까...이다. 신앙생활이 편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너도 나도 원하고 있다.

 

어떤 교인은 교회 다니다가도 돈 얘기만 하면 다음부터 안 나온다.

가시밭 교인이다. 자라다가 재리의 가시가 막아서 결실치 못하는...

 

그래서 그 돈 가지고 뭐하나 봤더니

쓸데없는 곳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제 멋대로 쓴다....

주님 뜻대로 쓰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더 좋으련만....

 

제자는 재생산(전도)을 한다.

제자는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4가지 마음 밭이 있다.(13:8)

*옥 토 : 교회 속의 제자, 3060배 백 배의 결실 맺었다.

*가시밭 : 교회 속의 교인, 언제든지 실족할 가능성 있다.

*자갈밭 : 교회 다니다 나간 실족자

*길 가 : 아예 불신자

 

적어도 우리가 옥토(제자)라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

30명이든, 60명이든, 백 명이든... 내가 전도해 놓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옥토는 30, 60, 백배의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년에 한 명씩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를 평생하면 그렇게 된다.

 

 

참된 부흥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1. 참 부흥은 반드시 회개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래서 오늘 날 프로그램에 의해 부흥되는 것은 본질적인 부흥이 아니다.

프로그램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에 온 사람들이 진정 예수님을 못 만나고 있다.

 

오늘날 부흥된다는 교회도, 외부적 현상적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부흥인지

회개하고 변화되는 내면적 본질적인 부흥인지 스스로 진단해 보자.

 

그래서 교회를 잘 지어놓으면 교인들이 온다는데

이렇게 모여지는 부흥은, 죄송스럽게도, 참된 부흥이 아니다.

 

그 속에 자기 부인, 회개, 십자가, 은혜가 있어서 부흥되어야 되는데

거기에 십자가도 없고, 자기 부인도 없고, 전도 안 해도 되고

? 가만 놔 둬도 오니까....

여러분, 가만 놔 둬도 오는 부흥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부흥과 연결되지 못하면...말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모이더라도

그 속에서 반드시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 제자의 헌신들이 나타나서

진정한 본질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는다.

 

2. 성령의 불을 붙어야 부흥이 일어난다.

부흥의 역사는 성령님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20:22)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날 생각 하지 마라’(1:4)

부흥이 일어나려면,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기도,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성령의 불을 붙이는 사람이 필요하다.

1907년에는 길선주 목사 한 사람이 성령의 불을 붙여서

불길이 점점 커져 한반도 전체가 활활 타올랐는데

오늘날 이런 성령의 불길을 붙일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사방에 성령의 불길이 다 꺼져서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기독교TV 방송을 통해서라도 성령의 불이 심령들에 붙여지기를 바란다.

 

기도의 불길, 전도의 불길, 말씀의 불길

성령의 성령의 불길 성령불이야

온 천하 세계 만방에 퍼지자 성령의 불길

 

예수님은 내가 땅에 불을 붙이러(던지러) 왔다고 하셨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49)

이렇게 예수님은 성령의 불을 붙이러 이 땅에 오셨다.

 

빌립 집사 속에 성령의 불이 붙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고

스데반 집사 속에도 이 불이 붙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도 이 불이 붙어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룬 것처럼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도 이런 불이 붙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19:2절에,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만나자마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요즘은 장사 잘 되요, 집사님?”하고 묻는다.

 

구원도 없이, 성령도 없이, 심령의 변화도 없이

장사만 잘 되면 뭣 하겠는가?

오늘 교회가 본질은 잊어버리고, 장사 잘 되는 것에 피차 관심이 많다.

 

성령 없으면 교회 아니다.

왜 마가의 다락방을 교회의 시작으로 보는가?

바로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 본질적인 의미로 교회가 아닌 것이다. 교회당일지는 몰라도.

 

본질적 부흥을 잃어버린 오늘 세대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흥을 위해 교회당만 잘 지으려고 하고 있다.

(교회당도 잘 지어야 한다. 나도 교회 건물을 잘 짓길 원한다.)

 

요지는, 그 교회 건물 속에 교회의 본질인 성령의 역사에 더 관심을 쏟자.

교회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받아, 제자가 되어야 되겠다.

 

3. 기도와 말씀의 불이 붙어야 부흥이 일어난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6:4)

 

한국 교회가 왜 부흥이 안 되고 침체되었나?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하던 그 기도가 사라지고

간단히 기도하니라로 대치되었다.

 

사무엘도 삼상 12:23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불이 기도하기에 전혀 힘쓸 때 일어났다.(1:14, 2:42)

과거 한국교회 부흥도 기도에 전혀 힘쓸 때 일어났다.

요즘은 옛날처럼 전혀 기도에 힘 안 쓰니까, 점점 심령이 가라앉고 있다.

 

4. 심령의 변화를 통해 제자가 되는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오늘날 불신자들에게 설문을 하면, 앞으로 종교를 가지게 되면

안타깝게도 불교나 천주교를 기독교(개신교)보다 더 원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 때 교회 다녔던 실족자들이 나가서 교회의 이미지를

흐려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실족자들이 많은 이유는,

그들이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님을 진정 만나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화된 사람인 제자, 절대 실족하지도 않고, 남을 실족시키지도 않는다.

 

회개하고, 성령 받고, 기도와 말씀에 힘쓰면 반드시 심령의 변화가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사랑 없으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다.

교회 안의 원수가 세상의 원수보다 더 무섭다는데...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왜냐면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첫째는 사랑이다.

그것은 닭살 돋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다.

 

보통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원수도 사랑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니...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겠는가?

 

성령의 사람은,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다.

성령의 사람은, 서로를 불쌍히 여긴다.

 

마치는 말

오늘 우리는 좋고 아름다운 교회를 다니는데도

옛날 천막교회 다니던 시절의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는, 우리의 부흥이 프로그램과 건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고

심령의 성령의, 회개의, 말씀의, 기도의 부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은 매우 좋은 것을 분양받아 사는데,

과거 단칸방 시절의 사랑과 재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발걸음이 너무 즐겁고 흥겨웠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 부르며 갔고

그래서 가는 길에 동네 사람들 손 붙잡고 함께 교회로 갔다.

요즘은 교회를 가지만, 마지못해 발을 질질 끌며 가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는 설교에 은혜 받고 말씀을 사모해서 갔는데

요즘에는 설교에 흥미를 느끼고 즐기는 정도면 다행이다.

옛날에 그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설교가 어디 갔는가?

 

부흥은 내게서 출발한다.

다 그만두고... 남들 바라보지 말고, 내 심령을 들여다보자.

내 심령 속에 참된 부흥이 있는지...?

없다면 성령의 불이 붙는 자리로 다시 돌아가자.

그런 심령의 변화, 즉 내면적/본질적 부흥이 일어난 다음

외형적/현상적으로 전도와 구제가 나타나야 되겠다.(사도행전)

 

여러분 개인의 심령의 부흥, 성령의 불길이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 번지고

그 불이 나라와 민족의 부흥으로 확산되기를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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