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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값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다

LNCK 2019. 12. 28. 12:21

값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다            고전15:11                여러글 취합

    

값없이 주신 은혜가 종종 값싼 은혜로 취급당하고 있다.

하나님이 피 값을 치르시고 주신 값없이주신 은혜

사실 값진 은혜이다. 결코 값이 싸지 않다...

     

값없다"는 뜻

값없이 주시는 은혜, 값없이 얻는 구원에 있어서 값없다는 뜻은

그것이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값으로 치를 수 없는 것이어서

그냥 (값없이) 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값을 안 치러도 된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이 도저히 치를 수 없는 값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공로merit결코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공로를 깡그리 무시하는 사상은 잘못되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행위구원이 아니라,

값싼 구원의 허구성을 성토하는 것이다.

      

은혜” ("값없다"는 뜻으로 쓰는 말)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1)

      

바울은, 자기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열심을 이룬 원인이

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오해 할 수 있다;

바울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일했으니

바울은 아무 노력한 것이 없어....’

      

그래서 바울이 다른 사도보다 아무 수고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우리 역시 아무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바울은, 하나님이 100% 다 일하시고

자기는 아무 할 일 없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의 겸손한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천국에 간 성도들은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실 때

그 면류관을 다시 어린양 앞으로 던지는 것이다(4:10)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겸손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이다.

      

은혜로 구원받으니까, 우리는 손끝 얄랑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원래 <하나님의 구원 능력의 독자적 완전성>을 표현한 신학이었으나

그것이 오늘날 <구원 무임승차권>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옛날에는 돈을 많이 내고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간다고 했으나

요즘은 아예 무료로 아무 대가도 없이 천국에 간다는 공짜 면죄부를 준다.

      

<인간의 공로로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공로를 많이 쌓아도, 인간은 자기 공로로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이 신학이 발전해서

<그러므로 아무 공로도 필요 없다... 공로는 전혀 필요치 않다.>는 논리는

큰 오해이다.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는 이유가 은혜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은혜는 원래 값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값없는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것이 한낱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값을 치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값진(=값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값없는 것이니... 아무 공로merit도 필요 없다.

또는, 은혜이니... 아무 노력도 필요 없다는 논리는

그것을 값싼것으로 폄하시키는 우를 범한다.

값없는 은혜는, 실상은 값진 것이니, 그것에 보답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값진 은혜의 보답의 삶을 사는 것은.. 값진(값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요

값싼 삶을 사는 사람은... 값싼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인스 워드(한국계 미식축구 선수)어머니 은혜를 결코 되갚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정말 은혜를 안 갚아도 된다, 못 갚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값없이=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주셨다고

정말 <안 갚아도 된다.>는 식으로 까지 발전되면.... 큰 오해이다.

      

<(해도 해도) 못 갚는다.>는 말이 되지만

<(못 갚으니까) 안 갚아도 된다.>까지 발전된 것은... 큰 오해이다.

      

요약하면,

1. 값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다. '못갚는 은혜'이다.

2. 그러므로 값없는(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보답하는 삶merit이 증거로 나타난다.

3.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은혜이니까 -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가 아니라 (값싼은혜의 논리)

은혜이니까 - 그 은혜에 감격해서 보답하는 삶을 산다.(못 갚는 은혜)

4. '못 갚을 정도로 큰 은혜'

못 갚으니까... 안 갚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헌신(공로)개념이 제자리를 찾아야...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가르칠 때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음에 당연히 뒤따라와야할 <은혜 보답 차원의 "헌신"(=공로)>

은 동시에 가르치지 못 했다.

왜냐하면, 혹시나 '공로신학'을 주장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헌신(공로)의 필요성을 따로 가르쳤는데

그것은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구원에 따른 마땅한 보답의 헌신(공로)'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현세적 보상(축복)을 기대하는 (기복적) 헌신'으로 지금까지 가르쳐왔다.

쉽게 말하면 '헌신하면 복 받는다'는 논리였다.

 

그런 인과율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의 원래 의미의 헌신

'갚을 수 없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성도의 마땅한 반응'이다.

 

그러니까 헌신이 등장해야 될 곳에서는 쏙 빠지고, 엉뚱한 곳에서 되려 나타났다.

앞으로는 "헌신(공로)" 개념이 원래 제자리로 찾아 가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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