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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정신질환

LNCK 2020. 1. 5. 18:01

vimeo.com/470020843

 

◈기독교와 정신질환       마12:42~45    11.10.09. 김영준 목사님 설교 녹취

 

 

◑현대로 갈수록 더 거세게 등장하는 ‘정신질환’의 문제

 

저는 귀신 내어 쫓는 사역을 믿는다. 저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은, 병자를 고치는 것과,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것(축귀)을 부인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비중을 두셨던 만큼,

귀신들림이나, 귀신 내어 쫓는 사역이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그 대신, 그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질고(정신병)

인류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제가 가지는 의문은,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처럼, 귀신들린 현상을 널리 보지 못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경험도 흔히 경험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귀신들의 숫자가, 과거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늘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러나 이런 설명↑은, 뭔가 불충분하다고 생각이 든다.

귀신이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더 중요한 설명은, 이제는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과거에는 ‘귀신들림’이라면, 이제는 ‘정신병’으로의 변화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부분(축귀)은,

현대인에게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지만,

오늘날 현대인의 삶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질환의 문제이다.

 

정신질환은, 오랜 세월동안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과거에 사람들은, 정신 질환을 단순하게 그저 ‘귀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당에게 데리고 갔고, 쇠줄로 묶어 놓았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거라사의 광인처럼.

 

20세기에 들어서야, 정신질환을, 비로소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질환을 앓는 이유로서,

외적인 요소도 한 몫을 하지만,

생리적인 요소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리적 이유란, 다시 말하면, 인간의 호르몬과 화학적 이유로도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갱년기 질환이 호르몬 변화로 말미암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현실성경의 말씀을 대조해 볼 때,

괴리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성경이 자주 언급하는 <귀신들림 현상>이

현대인의 경험 속에서는 제한되어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현대인에게 아주 잦은 <정신질환의 문제>가,

성경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이 괴리 현상을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성경이 우리 현실과 더 이상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지 않는,

현실과 성경이 서로 빗나가는 그런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의 현실에 맞추어서 성경을 다시 읽어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리한 해석을 걸러내야 한다.

 

◑정신질환에 관한 무리한 기독교식 해석

 

1. 모든 정신질환 문제의 핵심에, 마귀가 존재한다는 식의 해석이다.

물론 일부 정신질환 문제의 핵심에 마귀는 존재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베뢰아 파의 설명인데, 이것은 극단적 견해이다.

이건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는 대신, 약을 올리는 처사이다.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너는 지금 귀신 들려서 그렇다’ 라고 말하게 되면,

그 환자는 지금 정신질환을 앓는 것도 괴로운데,

‘자기 속에 귀신이 있다’는 악담까지 듣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 해결을 해주지 않는다.

 

섣불리 그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모든 질병, 모든 정신적 질환이 마귀로 말미암는다..’는 식의 해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항상 귀신을 내어쫓음으로 고치신 것은 아니다.

(모든 병의 근원에, 귀신이 있지 않다는 뜻)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서, 올바른 분별력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병들게 만들고,

사람을 위로해주지 못하고, 더 번민을 안겨다 줄 수도 있는 것이다.

 

▲2. 예수 믿는 사람은, 정신 질환을 앓으면 안 된다는.. 극단적 주장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속에 예수님이 내주하여 계시기 때문에,

그의 속으로, 마귀가 절대 들어올 수 없으므로, 정신 질환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다보니까 크리스천들 중에,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이것은 무슨 주장과 비슷하냐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병을 앓으면 안 된다’는 주장과도 비슷하다.

 

누가 어디서 이런 생각을 퍼뜨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건 성경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경험과도 맞지 않는 괴변이요, 광신에 불과하다. 

 

사도바울에게도 육신의 가시가 있었고, 디모데에게도 위장병이 있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도, 본인의 질병은 정작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베니 힌 목사도, 본인이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남의 병은 고치지만, 자신에게 병이 있는데, 고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 존 윔버 목사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병이 많았다.

 

여러분, 이런 억지에서 어떤 주장이 나오냐면,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병원에 가지 말고, 약을 의존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믿음으로 고쳐야 된다’는 억지와도 비슷하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런 주장을 간혹 한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그래서 자기 아이가 아픈데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서,

오직 기도만으로 고치려하다가, 귀한 목숨을 잃게 되거나,

장애아가 되는 불상사도 가끔씩 일어나고 있다.

 

여러분, 누가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은, 감기에 걸려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극단적 주장이라고, 여러분은 무시해 버리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정신병에 걸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역시

똑같이 극단적인 주장인 것이다.

 

누구는 원해서 아픈가?

살다보면, 질병이 생기듯,

살다보면 정신병이 생기는 것이다. 크리스천에게도 똑같이 생긴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각종 다양하게 많은 정신질환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햇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사람의 몸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많은 것처럼,

사람의 정신을 아프게 하는 원인도.. 많다.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이 꼭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일부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

 

저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의학적인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 도시인들 중에,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우울증, 정신분열증, 강박증, 망상(피해 망상, 추적 망상) 등

별의별 정신질환이 존재한다.

 

게다가 밤에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까지 포함하면,

아마 놀라울 정도의 숫자이다.

 

최근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 아동의 10%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던데,

그렇다면 성인들은 훨씬 더 그 비율이 높을 것이다.

 

군대라는 말이 ‘우리가 많다’ 라는 뜻이었던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원인도 아주 많을 수 있다.

 

그럼 정신질환의 이유가 무엇인가?

①스트레스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스트레스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현대인의 삶에서, 스트레스 라는 것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생각을 해야지..

스트레스만 탓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②또 하나는 사랑이 부족해서 그러니, 사랑만 주면 된다는 주장이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랑만 해 준다고 해서, 정신질환이 낫는 것은 아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해봤자 여전히 아프다.

 

외로운 사람을 사랑해 준다고, 외로움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실존(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③요즘은 사람이 약해서 그렇다고 한다.

맞는 얘기다. 몸이 약하니까 병드는 것처럼, 마음이 약하니까 정신병이 든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마치 사람이 잘못해서 병든 것처럼,

사람을 탓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에 약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는가?

 

약하지 않는 사람, 강한 사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지는 않겠지만, 그 대신 굉장히 악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약하다는 말은, 그 말은 일면 그가 착하다, 여리다는 뜻이다.

착하기 때문에 그만큼 인생의 아픔을 겪을 때, 그것이 질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④또 하나는, <기도하는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으면 안 된다>잘못된 논리이다.

‘모든 사람이 수퍼맨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식의 발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

이 귀신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부탁했는가 하면,

‘이 지방에서 내어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막5:10

 

거라사 지방이 어때서,

이 지방에서 내어보내지 말라고 부탁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서, 정신건강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은 다 도시에 산다. 도시가 주는 편안함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도시가 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과거에 인류가 농촌에서 살 때는, 오늘날처럼 정신적인 질병이 많지는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땅을 일구며 육체 노동을 하고, 애기가 생기면 낳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삶에 충실하고, 자기 몸으로 일하고..

그때는 불면증도 없었고, 위장병도 없었다. 강박증도 없었다.

 

인생이 좀 지루하고 느릴 뿐이었다.

지금보다는 덜 풍족했겠지만, 그러나 원래 인류는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서, 세상은 놀랍게 빨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늘 그렇게 빠르게만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시속 100킬로도 부족해서, 앞에 가는 차에 빵빵 경적을 울리면서 가시는 분들,

어디를 그렇게 서둘러 가는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개개인을 탓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방식을 탓할 수는 있다.

우리가 사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물질문명은, 정신적인 소외감과 불안감을 가져다준다.

극심한 경쟁사회,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남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괴롭힌다.

 

이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이,

돌로 긁어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괴롭힌다.

부모인 내가, 내 자녀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소화가 되지 않고, 잠을 못 이루고, 불안하고, 그렇게 산다.

귀신의 목적은, 인간이 스스로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반인간적, 파괴적으로, 생명을 부인하게 한다.

 

정신과 의사 칼 융이 말하기를,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공격할 때, 인간의 영혼을 보호해 주는 것이 2가지 있다고 했다.

 

①인간의 영혼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서 그를 지켜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가족 사랑의 필요성이 거기에 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정과 교회의 울타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문자도 주고 받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운동도 하고,

놀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기도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늘 혼자 있는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유학을 가서, 계속 혼자 지내는 것 같으면,

빨리 가서 데리고 오셔야 한다. 애 교육시키려다가 정신병 들게 만든다.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사무실에 독방을 만들지 말고, 터서 칸막이를 만들어서,

자기 프라이버시도 보존 되고, 공동체 의식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식사시간에 누가 혼자서 식사하는 것 같으면, 그와 같이 가주시라.

그를 우리 멤버에 끼워주시라. 사람은 사람을 서로 필요로 한다.

 

②영혼 내면에, 마귀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어서,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시니라. 요일3:8’

 

예수님은 빈 집의 위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귀신이 사람을 떠나간 후에, 물 없는 곳을 다니다가, 갈 길을 얻지 못하여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이 비어 있고, 소제가 되어 있어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왔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빈 집이란, 예수님이 거하지 않는 빈 영혼의 위험성을 말한다.

빈 집은 위험하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셔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소리를 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고,

 

이렇게 우리 안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야

어둠의 권세가 우리 안에 쳐들어오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은,

물질적인 풍요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더 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의 빈곤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현실을 기정사실화 하고, 여기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 아프다. 아프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아프기 때문에 젊은 것이다> 라는 책이 있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에 사람이다.  

 

예수님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라야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예수께서 거라사의 한 사람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배를 타고 건너가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먼 길을 거쳐서, 우리를 도우러 와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