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선교, 아웃리치, 전도여행 조각글 모음 1 엡6:20 ▣해외 선교 글 모음
※여러 설교에서 <단기선교, 아웃리치, 전도여행>주제의 조각글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전도여행 가서 망신당하는 일을 극복하는 비결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행13:4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이 보내셨다는 사도의식이 있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엡 6:20
바울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대사 의식(사신),
즉, 예수님의 권위를 가진 종이라는 그런 자의식이 있었다.
저는 주일에 설교를 여덟 번 한다. 서 있는 시간만 12시간가량 된다.
만약 이것을 내가 먹고 사는 직업정도로 생각한다면... 힘들어서 못 한다.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원래 주님이 오셔서 친히 말씀을 증거해 주셔야 하는데,
나같이 연약한 종을 불러주셔서 대언케 해주시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중노동이나 고난이 아니다.
임무, 사명task이요, 도리어 기쁨이다.
전도여행을 가면 종종 소금뿌림 또는 조롱을 당하게 된다.
만약 직장이나 학교 등 일상생활에서 그런 일을 당하면... 정신병에 걸린다.
그러나 전도여행 중에 당하니까... 그런 일을 도리어 영광으로 여기는데
바로 내가 보냄 받았다는 사명자 의식 때문이다.
왕자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거지처럼 대우 받아도, 절대 거지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나를 보내셨다는 사명감(자의식)이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과 역경의 환경에 처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요셉이 애굽의 종살이 하면서, 감옥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언제나 생생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자기를 먼저 보냈다는 사명의식 때문이었다.
“사람 하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곧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다” 시105:17
이런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결코 썩지 않는다. 항상 싱싱함을 유지한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롬15:23
사도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그 정도로 일을 했다면 기득권에 안주할 수도 있습니다.
원로목사가 되어 자기가 고생한 것만큼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거절하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 서바나에 관심이 있고
그곳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한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인
위구르족, 하나 족과 같은 미전도종족을 입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풍토병도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전도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의 영혼이 있다면
그곳(서바나)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고한 대가로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있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있고 한 나라가 있다면,
한 민족이 있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사도바울의 이 뜨거운 심장이 여러분의 혈관 속에서
똑같이 맥박 뛰기를 바랍니다.
♣라오스 단기선교 간증
제가 2005년경 7월에 캐나다에서
10대 청소년 13명을 이끌고 라오스로 단기선교를 갔다.
대단한 선교가 아니었다.
그냥 그곳 유치원에 가서, 현지인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까,
이 청소년들이 주님에 대한 헌신의 마음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사춘기의 상처, 이민 문화의 상처가 많았다.
그걸 보면서,
저녁에 갑자기 제가 잠이 오지 않았다.
‘주님, 이 청소년들, 이번 선교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주님, 어떤 학생에겐 이런 문제가 있는데, 어떻하죠?’
저는 마치 밤에 양을 치던 목자의 심정처럼 되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을 놓고, 기도했다.
두 시간인가.. 계속 기도했다.
그냥 어떤 밤에, 대단하지 않은 밤에
제게 맡겨진 양떼를 지키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기도로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밤에 베들레헴의 목자처럼..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주님이 임하기 시작하셨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조그만 여관에,
아침에 큐티 묵상하느라고 모두 모였는데,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일상적인 날이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제 마음에 주셨다.
그래서 제가 그 말씀을, 학생들에게 나누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그저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회개’를 했다.
자기 입속으로 어물거리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사도행전 2장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강림하셨다.
강권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셨다.
그 멍하던 아이들이, 주님이 임하시니까, 자기 죄 때문에 비명들을 질렀다.
그리고 회개가 터지는데,
한 시간이 넘도록 막 자기 가슴들을 부여잡고, 비명들을 지르며, 회개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그 다음부터
라오스에 있는 동안, 매일 하나님의 역사들이 계속 일어났다.
저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주님의 영광을 대면하고 나서, 내가 바뀌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남들 하는 만큼 사역도 했다.
그런데 제가 그날 아침에, 임하신 행2장과 같은 주님의 영광을 보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주님 뜻대로 성령을 쫓아, 강력하게 순종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면.. 내가 바뀐다.
주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고 나서.. 내가 안 바뀔 수 없다.
그냥 대충 주님을 믿고 사는 것..
그것으로 만족하시면 안 된다.
여러분이 그게 얼마나 답답한 삶이라는 것을..
이미 겪어봐서 잘 알지 않으신가.
우리는 주의 영광을 봐야 하는데,
성령님의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주님이 얼마나 위대 하시고,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실재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완전히 바뀌게 되어 있다.
내 속사람이 완전히 바뀌게 되어 있다.
내 자유의지로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것.. 그게 필요하지만
그런 수준으로는 뭐가 잘 되지 않는다.
주님이 내게 강권적으로 임하셔야 하는데,
행2장의 성령의 역사와 같은 역사가 내게도 일어나며,
들판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에게, 주의 영광이 환하게 나타나듯이..
나도 그런 주의 영광을 체험해야 하는데..
그것은 ‘얼마 안 되는 자기 양떼를 성실하게 치는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예상하지도 않았던 때에'
그 영광의 주님이 나타나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라오스 단기선교 현장에서!
그 주님의 나타나신 영광을
제가 1995년 라오스 단기선교 가서,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그 체험을 했고,
여러분도, 그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바란다.
‘주님의 영광’을 대면한 사람은..
반드시 ‘영광스런 주님의 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
♣대학시절, 볼리비아 단기선교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다.
저는 대학 3학년 때부터 한국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섬기는 봉사를 했다. (남자임)
또 그 대학시절에 남미 볼리비아에 가서 단기선교를 했는데,
제 첫 텀 term인 3개월이 끝나갈 즈음에,
볼리비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개인적 예언, 음성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네) 기업과 교육을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돌아오게 하시겠다’ 였다.
당시 저는, 한국에 돌아오기 싫었고, 볼리비아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
여러분, 볼리비아는 세계에서 5번째로 못 사는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마음이 가난하고,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신앙심이 있다.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가난한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보는 곳이었고.. 나는 그런 그곳의 분위기가 좋아서,
거기에 계속 눌러 붙어있고 싶었다.
여러분, 만약에 물질적 가난이 하나님을 더욱 앙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저는, 가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본다.
부유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몰라 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복 받은 것이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서 수고하시는 두 선교사님을 섬기면서
계속 볼리비아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저를 ‘한국에 가라’고 명하셨다.
그 때 제 나이가 26살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몇 개를 뛰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을 앞두고 있었다.
*제가 볼리비아로 날아갔는데, 계속 콧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나중에 한국에서 알게 된 원인은, 아마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제 뇌에 두 군데 골절이 생겨서,
그 벌어진 골절 틈을 통해서 뇌척수액이 계속 코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뇌척수액은, 보통 사람에게 약 500cc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볼리비아에 와서는, 머리에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아마 뇌척수액이 거의 다 소진되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직 이 때까지, 저는 뇌에 이상이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콧물이 심하게 나오고, 머리가 아픈 .. 단순한 감기증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그 곳에는 뉴저지 어느 한인교회가 단기선교로 와 있었다.
또한 현지인 다빗 전도사도 다리가 아파서 고통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뉴저지 단기선교팀과 볼리비아 성도들이 합심해서
다빗 전도사의 다리와 제 머리 통증을 고쳐주시도록
차례로 우리 각 사람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그 다음 날은 주일이었고, 다빗 전도사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
그 시간에도 제가 교인들로부터 특별기도를 받았다.
저를 위한 교인들의 합심기도를 받는 시간에 제가 여쭈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제게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상재야, 네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네가 외로워하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는지, 보여주려고
네게 고통을 주었다.’
사실이 그랬다. 주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때때로 외로울 때가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를 정말 사랑하는지, 느끼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제가 아파서 드러누워 보니,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저를 사랑하고, 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는지,
그 사랑과, 그 관심을 아주 잘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제게 몰려왔다.
신기한 것은, 그 성도들의 사랑의 기도를 받고서.. 제 콧물이 멈추어졌다.
저는 감기가 심하게 들었다가, 나은 것으로.. 그 때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제가 볼리비아를 떠나 한국에 돌아와서,
지난 번 교통사고의 휴유증이 있는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던 중에,
제가 콧물이 심하게 나온 적이 있었다고 진술하니
의사가 안색이 변하면서 MRI(자기영상) CT(단층촬영)를 찍어보자고 했다.
뇌 사진 판독 결과, 뇌에 골절된 곳이 두 군데, 사진에 나타났다.
더 신기한 것은, 그 골절이 봉합된 것으로 사진에 나타났다.
의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뇌 골절이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자연치유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뇌에 골절이 생겼고,
급하게 미국으로 가느라, 발견/치료도 못 했고,
그래서 뇌척수액이 골절된 틈사이로 계속 새어나와서 콧물이 심하게 흘러나왔고,
그 결과 뉴욕에서 길바닥에서 기절했으며,
볼리비아에서 그것이 더 악화되었으나,
볼리비아 성도들의 간절한 사랑의 기도로.. 신기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의사가 다시 제게 물었다.
‘언제 콧물이 멈추었나요?’
그 콧물이 멈춘 시각은,
볼리비아 성도들의 사랑의 중보기도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그들의 기도를 통해, 나의 뇌골절이 기적적으로 봉합된 것이다.
그런 사실은, 사실 하나님만 정확히 아시겠지만,
의사의 MRI, CT 판독결과 내린 진단이었고,
콧물이 심하게 새다가,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서
그것이 멈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신유의 기적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단, 의사는 ‘자연치유’로 믿고, 나는 ‘믿음의 치유’로 믿는다.
*출처 : 한 직장인 크리스천의 간증 https://rfcdrfcd.tistory.com/15972269
▲저는 지난 열흘 동안, 교우들과 함께 방글라데시에 단기선교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이 두 번째 방글라데시 여행이었습니다.
처음 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심하게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다른 선물을 주시리라고 기대하고 갔습니다.
이번 선교 여행을 통해 방글라데시 개발협회
(Korean Development Association in Bangladesh : KDAB)의 사역을 돌아보며,
그곳에서 일하시는 사역자들을 만나고, 그 지역 주민들을 뵈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물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제 눈을 새롭게 열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말로만 전달되지 않고, 사랑의 행동으로 전달됩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저 자신에게 혹은 선교단원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빛, 손짓, 발짓, 말, 행동..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역하는 기간 동안 제가 끊임없이 올렸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주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지극히 작은 소자의 모습을 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뵙게 하시고,
그분들은 또한 저희에게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소서.’
우리가 그분들에게 물질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약품이나 학용품, 안경이나 정수기, 선교비 같은 것들은
그분들을 만나도록 돕는 방편일 뿐이었습니다.
그 모든 활동을 통해 진정으로 일어나야 할 일은, 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는 일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신들을 새롭게 보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활짝 꽃피어 나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것은 천 마디, 만 마디 말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질 공세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분들이 저희를 통해 그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보도록 도움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말로 복음을 전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의 빛이, 우리의 행동에서.. 발산되도록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방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겸손히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저희 주제에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히 저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사용하도록 맡길 때,
하나님은.. 저희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아침 경건 시간 마다, 혹은 사역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을 다스리고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과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시는 도구로 삼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방글라데시 개발협회 (KDAB)가 하는 일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장 선교사님은, 지난 22년의 청춘을 그곳에 파묻고,
쇠힘줄보다 더 질긴 투지로 그 엄청난 사역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못 산다는 방글라데시,
그곳에서도 가장 낙후되어 있다는 찔마리와 울리뿔,
그리고 그곳에 붙어있는 다섯 개의 섬들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하는 사역은.. 의료 지원과 생필품 지원
그리고 학교 사역과 농업기술 전수사역이었습니다.
두 개의 거대한 실험 농장을 세워 놓고, 그곳을 거점으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형식은 NGO 즉 비정부기관으로서
그들의 생활 전반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1992년, 처음 이 협회가 사역을 시작할 때,
전체 섬에서 굶어죽는 사람의 수가 한 달에 3천명 당 4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역이 자리를 잡고 난 후, 2002년에 조사를 하니,
1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일구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섬으로 진료를 나가 주민들을 만나보았는데,
태반이 영양실조로 인한 무력감을 호소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KDAB에 속한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곳 정부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낮아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헌신적인 사역자들을 보면서 ‘아, 저들은 진짜다!’라고 느꼈고,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너는 뭐냐? 너는 그 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
하고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저는 별로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 자신이 가짜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섬기는 목회사역도.. 나름대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건이 좋은 곳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제가 이번에 받은 하나님의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이런 번민 가운데서 저를, 회복시켜 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2645
♣지난 주간(2006년 7월)에, 교회적으로 가슴 철렁한 일이 있었습니다.
몽골에 단기선교를 떠났던 교우들이, 현지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주문진교회 부흥회를 인도하고 그다음 날 아침, 아내가 갑자기,
'이유는 모르겠는데 금식해야 할 마음이 강하게 든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 (방어)기도를 꼭 해야 할, 어떤 절박한 일이 생기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날 오후 몽골에 갔던 단기선교팀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우리 교우들이 많이 다친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음 날 급히 돌아오는 단기선교팀을 맞으러 공항에 나가서,
자세한 사고 경위를 들어보니, 팀원들이 다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붙들어 주셨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 오는 차가, 앞차를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넘어와서
우리 선교팀이 탄 차와 정면충돌하는 사고였습니다.
운전자(현지인)는 병원으로 후송하는 도중에 숨졌고,
1시간 후에 그곳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큰 사고였답니다.
선교팀원들이 공항 출국장을 통하여 나올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생명의 위협이 있었던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이럴까 싶었습니다.
다행히 출국장으로 나오는 선교팀원들의 부상 정도는
그러한 사고를 당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미했습니다.
정 권사님만 골절임이 드러났고, 다른 분들은 큰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걱정을 많이 했던 최은O 청년도, CT촬영 결과 별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단기선교팀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교우들과
순회선교단 중보기도팀과
사고 소식을 듣고 특별히 힘을 다하여 기도해 주신 교우들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선교팀원들을 생명싸개로 싸서 안으셨다고 밖에 고백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좌절시키려고 역사하지만
사탄의 악조차도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몽골선교팀의 이번 사고는, 앞으로 우리가 선교하는 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교팀을 보내거나 선교사를 파송할 때
우리의 기도가 건성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절실히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런 사고 소식을 듣고도 위축되지 않고,
계속 선교운동이 일어나는 일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3278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체험했던 네팔 단기선교
제가 2009년 초 네팔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 일입니다.
주일예배 때 선교사님이 새로 세운 군자너거르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팀이 왔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결국 그 작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교회 건물 옥상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네팔에서는 예배가 보통 2시간 이상씩 계속됩니다.
제가 네팔의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도 6-7명 정도의 무리가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중년의 네팔 사람들이었는데,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온 몸에는 우상 장식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의 특징은,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육체적 질병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풀마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아주머니가
제게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척을 따라 예배를 나왔는데,
자신은 밤만 되면 귀신이 자신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겠느냐고 물어 봤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귀신을 쫓아내도록 기도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기도를 해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자신이 지금까지 섬겨오던 신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고 우겼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기도를 해 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여인의 기도요청을 거절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너무 그 여인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악한 영이 그 여인을 사로잡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들게 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네팔 사역자들과 함께 그 여인을 붙들고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이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그 모든 묶임에서 놓임을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한참을 기도하고나자
그 여인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순간 자신의 머리 아픈 것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여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온갖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질병에 눌려 있던 그 어둡고 침울한 얼굴은 사라지고
그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를 받고, 그 억눌림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복음에 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순간부터 복음이란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고,
더 나아가 그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를 못합니다.
설사 말씀을 통해 복음을 지식적으로 알았다고 해도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눌리고 찢기며, 상처 입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3009
♣작년에 인도 첸나이에 저희 교회 비전트립 단기선교 팀이 갔었습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도마기념성지 안에 있었는데,
1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도마기념교회가 있습니다.
비전트립 마지막 날, 다함께 도마기념교회에 올라갔는데,
교회당 안에, 도마와 예수님의 만남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었습니다.
도마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고,
그 때 예수님은, 못 자국 난 손으로, 도마의 손목을 잡아당겨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도록 하고 계셨습니다.
차마 손을 상처에 대기를 주저하는 도마의 손목을
잡아당기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도마의 손을 잡아당기듯이, 상처로 이끌고 계셨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부활하셨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온전히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때로는 배고픔을 겪으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하셔서 폭풍이 치는 배 위에서조차 곤히 주무셨습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정말 온전히 인간으로 사셨는데, 참 고생하시면서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으로 찔림을 당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이란, 그런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몸에도 여전히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손을 잡아당기시면서, 그 상처를 만져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상처와 부활은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합니다.
상처가 없으신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중보기도의 힘 (제리 렌킨)
나는 중국에서, 한국출신 젊은 선교사를 한 분 만나서 이야기 해 보았다.
그 선교사는 중국에 간지 1년 만에 중국 변방에 약 50개 교회가
세워진 것을 목격했다고 간증했다.
저는 너무 놀라서, 1년 만에 어떻게 그런 수확이 생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첫 해라서 언어공부에 주력 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정말 그 지역에서 어떻게 그런 부흥이 일어났는지 잘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궁리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작년 여름에 한국의 3개 단기선교팀이 그 지역을 다녀갔다는 것이다.
그 단기선교팀은 무엇보다 그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에 헌신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기도 때문인지, 하나님은 그 지역에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다.
저희 교단선교국 중보기도국장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열방을 향한 영적전쟁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무릎에 그 결과가 달려있다!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은, 그 기도의 열매를 거두러 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방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시2:8
당신은 지금 그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십 몇 년 전에, 우리 교단(미국 침례교) 단기선교팀이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했다.
당시에 아직까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는 알려진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었다.
중보기도팀은 정부청사에 가서 그곳 정부를 위해 기도했다.
또한 대학 캠퍼스를 다니면서 그곳에서 학생들을 위해 중보기도했다.
처음부터 아제르바이잔 외무부 직원이 이 팀을 안내하며 따라다녔다.
그는 이 팀이 중보기도, 단기선교 팀 인줄 알지 못하다가, 점점 알게 되었다.
단기선교팀 중 한 사람이 이 안내원에게 기독교신앙에 대해 나누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제가 신앙이 없는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런 것에 대해 한 번도 권유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팀원은
“제게 신앙이 없는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라는 그 안내원의 말이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 귀에 왱왱 그렸다.
‘그렇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바로 내 잘못이다!’
이 세상에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들 잘못이 아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은, 모든 족속에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그 명령에 순종하지 못한 내 잘못인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게 무섭게 공포의 도가니로 변한 것도
누구 탓이 아니라, 바로 복음전파에 충성하지 못한 내 잘못인 것을
우리는 겸허히 시인해야 한다.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6330
♣복음에 빚진 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예수를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된 것은
이 백부장과 같은 믿음, 즉 민족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산 넘고 바다 건너 믿음의 여행을 결심하고, 과감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지금부터 120년 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의 성도들이
자기 나라에도 아직 봉사할 일, 전도할 일이 많은데,
저 동방의 작은 나라 코리아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이냐고 생각했더라면,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 때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빚진자다.
이런 의식을 평생 갖고 신앙 생활해야 한다.
유학 시절의 꿈이 오늘날 드디어 이뤄지다
저는 일찍 1970년대 초, 미국 신학교에 유학하면서
어느 여름에 캐나다 토론토의 people's church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 교회는 세계선교를 가장 많이 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다.
당시 그 교회는 150명이 넘는 장기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그 해 여름철 단기선교에 2백 명 이상이 다녀온 것을 보고하였다.
그런 꿈같은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저는 그 교회 구석에서
‘주님, 언젠가 한국 교회에, 제가 목회할 교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저는 오늘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그 날 캐나다 토론토의 피플스 교회의
의자에서 드려진 한 한국 신학생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감사한 것은, 이번 여름 우리 교회 많은 성도님들이
이런 민족을 초월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갖고서
동서남북 국내외로 나아가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신 것이다.
많은 분들이 여름철 휴가 대신 단기선교에 참여해 주셨다.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신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아예 선교지에 교회당을 지어 주시고 오신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도 해외에서 땀 흘리고 전도, 봉사하고 오셨다.
우리 교회가, 개 교회차원으로 이렇게 수많은 인원들이 단기선교에
동참한 것을 보면... 예수님도 놀라하실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지구촌교회는 이미 71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지금 현재 223명의 협력선교사를 지원하고 있다.
2006년 여름에만 국내외 합해서 단기선교와 사회봉사에
총 108팀, 3,031명(해외 866명)이 참가했다.
국내신문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천국 뉴스에는 반드시 나왔을 것이다.
우리 예수님도 감동하셨을 것이다. 이런 감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지구촌 교회 모든 성도들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가진 부족함도 많고, 약점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교회가 자랑스럽다.
우리 지구촌 교회가 자랑스럽다.
우리 중에 백부장의 믿음을 가진 많은 평신도지도자를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 안에 아름다운 일을 이루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린다.
이런 감동의 역사, 민족을 초월하는 믿음의 역사가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단기선교운동의 발흥
아울러 단기선교운동이 물밀 듯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까지 대거 방학을 이용해서 단기 선교를 떠난다.
①대학생인 제 딸이 이번 여름에 전쟁이 났던 레바논 바로 옆인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에 선교하고 돌아왔다. 35명이 같이 갔다.
시리아에 가서 보니 레바논에서 탈출한 60만 명의 난민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들을 섬기고 돌아왔다. 이런 단기선교는 인생의 깊이를 주고,
앞으로 차세대 글로벌 리더쉽으로 준비시켜 준다.
②작년에 이란에 초등, 중학생 250명이 단기선교 갔는데, 우리 아들도 갔다.
이란 정부는 아마 환영의 뜻인지,
250명 학생 전원에게 좋은 기념시계를 선물로 주어서 받아 왔다.
*평화행진 운동
2004년에 우리는 2천명이 팔레스타인에 가서 평화행진을 벌였다.
2006년에도 2천명이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5개 도시에 나뉘어 잘 사역했다.
아프간 정부와 국민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환대해 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3일을 남겨두고, 한국정부의 개입으로 조기철수하고 말았다.
그러자 우리는 주변국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아라비아로 5백 명, 이란으로 5백 명, 중앙아시아로 5백 명,
북부 인도 카시미르로 5백 명, 중국 신장 위구르 족에게로 5백 명
이렇게 주변 5개국으로 흩어져서 2주간 더 단기선교를 하고 돌아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30개 도시로 흩어졌다.
거기 두바이의 한 한국인 집사님은, 이런 대규모 한국인이 아라비아 반도로
선교하러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이번 여름에는 아이들도 많이 참석했다.
초등학생 2백 명, 중고등학생 3백 명, 대학생, 어른, 노인들까지 모든 세대가
다 참여했는데, 다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6802
♣비단 군대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자(크리스천)는 열심히 해도 욕을 먹고,
반대로 농땡이 쳐도 욕을 먹는데,
이왕 욕을 먹을 바에는... 열심히 하고서 욕을 먹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어떤 신자들이 단기선교를 너무 ‘열심히, 공격적으로 하면’... 사람들이 욕을 한다.
(물론 일리가 있다. 그러나 완벽한 신자는 세상에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살살, 소극적으로 하면’... 세상에서 욕을 안 먹을 것인가?
군대 예를 들었지만,
직장 생활에서도 흔히 겪게 되는 일이다.
적극적으로 신우회 활동해도 욕먹고, 소극적으로 숨기며 다녀도 욕먹는다.
그 때는 비겁하고, 몸 사리고, 나이롱이라고 욕한다. “진짜 신자 맞아?”
그래서 직장 생활하면서도 주일날 출근하라 그러면 (적어도 오전은) 안 가고,
여름에는 욕먹으면서도 억지로 휴가 받아서 <단기 선교>도 가야 된다.
아니면 ‘나이롱 신자’ 취급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신자 티를 내면서, 욕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지내면
처음에는 욕을 듣지만... 지나면 그것이 도리어 칭찬으로 바뀐다.
‘아무개는 진짜 신자야!'
'저 친구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일 나겠어...’
반면에 소극적으로 대충 분위기 봐 가면서 살살 지내면
계속 욕만 듣지, 결코 신자로서 칭찬은 못 듣는다.
소위 ‘사람들 발에 밟히는 소금’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회도 재미없어진지 오래고,
이제는 ‘여름수련회, 해외단기선교’ 마저도 위협 당하고 있다.
‘가봤자 뻔하다’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이동한 이유 중 하나도,
‘개신교는 얄팍하고, 천주교는 영성이 깊다’고 누가 말한 것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이때 우리는 참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체면을 살려드려야 한다.
♣아름다운 단기선교
(18년 전에) 저희들이 에티오피아에 병원을 짓겠다고 하자,
그 정부에서 우리에게 땅 3만평을 내어주었는데
에티오피아 정부가 바보가 아닙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자존심이 대단하고,
지금까지 외국인에게 1천 평도 거저 준 적이 없는데
우리에게 이렇게 내어주는 것은, 사실 비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희들이 18년 전에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
그 나라에는 괜찮은 호텔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이 호텔은 각종 회의로 투숙객들이 늘 북적거리며
하루 자는데도 방 1개에 5백 불이나 되었습니다.
국제구호기구들의 아프리카 대륙의 전체 본부가 주로 에티오피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의가 많고, 치안은 불안하니, 외국 손님들이 모두 이 호텔에 갑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선교회 일행이 여러 사람인데
에티오피아에 가면 호텔비만 해도 몇 만 불이 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이러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사는데
이 가난한 나라에 와서 잠자는데,
무엇 때문에 꼭 이런 호텔에 이렇게 많은 돈을 씁니까?’
그런데 그 다음은 아주 초라한 몇 십 불짜리 밖에 없습니다.
중간 등급이 없습니다.
치안도 믿을 수 없는 형편없이 누추한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거기로 갑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관에 가서 허름한데서 잡시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그렇게 절약한 숙박경비를 모두 모아가지고
그 나라 총리를 찾아가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쓰라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총리가,
극히 치안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외국 사람들이 찾아와서
호텔비까지 아껴서 주었다고 하니까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무회의에서 의결해서, 개발지역 3만평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그 곳에 병원을 짓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 사건을 두고, *2007년 7월말 아프간 피랍 및 순교
정말 순교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 21세기 한국 교회에
아주 거룩한 순교가 일어났다고 너무 감격해한다.
혹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열정과 위상을
전 세계 기독교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CNN 등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나(설교자)는 해마다 방학이면 선교지로 단기선교를 떠난다.
집을 나서면서 저는, 배형규 목사의 순교를 떠올리며 아내에게 꼭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가는 선교지에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의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받으시기 원하신다면,
우리 팀원이 아니라, 목사인 나의 생명을 먼저 가져가시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목산데, 당연히 그래야죠!”
영원에 견주어 보면, 일찍 천국 가거나, 늦게 천국 가거나... 똑같은 ‘잠시’다.
그런데 우리가 ‘잠시’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내 가장 귀한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기선교 다녀와서, <이번에 기적이 없어서 썰렁했어요!> 이런 간증 하지 마시라.
기적을 바라고 단기선교를 떠났다는 얘긴데,
그런 것을 부추기는 설교/책을 워낙 많이 접해서 그런 영향을 받은 모양인데,
여러분, ‘기적’은 있어도 되고/없어도 된다.
단기선교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다.
무슨 기적 보여주러/보러 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생애의 하이라이트는 십자가였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적을 많이 행하셨다면,
왜 십자가 지실 때는 기적을 한 번도 행하지 않으셨을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기적을 행하며 살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기적 추구> 인생이 되지 마시고
<십자가 추구> 인생이 되시기 바란다. 그게 올바른 신앙생활이다.
♣한 알의 밀알이 된 몽골 선교사
우리 중에 말할 수 없는 시련의 때를 지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다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어려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막연히 믿던 사람이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만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 부흥회를 인도하고 온 송천교회 김여일 목사님은
그 아들이 2000년 여름 몽골로 단기선교를 갔다가
태풍으로 날아간 교회 지붕을 수리하다가 전기 감전사를 당해 순직했습니다.
김우현 감독이 만든 <팔복 2편, 부흥의 여정>에
목사님의 아들 김성호 선교사의 죽음의 현장이 그대로 나옵니다.
김여일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 김성호선교사를 세 번 하나님께 바쳤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역자로 바쳤고
두 번째는 선교사로 바쳤고
세 번째는 순교자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김선교사의 순교를 계기로 몽골 선교가 꽃이 피었습니다.
김선교사가 순교한 지역에 기념 교회와 선교 센타가 세워졌습니다.
선교 센타 건립비로 김여일 목사님은
김선교사 장례식 조의금과 사랑하는 딸 결혼식 축의금을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몽골 선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번에 부흥회에 가 보았더니
아버지인 김여일 목사님이 아들의 순직이 헛되지 않게 하기 원한다면서
자원 은퇴하고 몽골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교사 훈련을 받고 계십니다.
♣암수술 하고도, 선교사로 떠나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면 반드시 생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롬6:3~4,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생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 중국 선교사로 가시는 권태환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사님은 10년 전, 선교사로 부름을 받으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두려워하기에 결단을 하지 못하고 소명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회도 내려놓고, 요양을 하고 계신데, 다시 주님이 중국 선교사로 부르셨답니다.
‘건강도, 사모님도, 다 불가능한 여건인데 어떻게 선교사로 가나?’ 하다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답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었던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완전히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답니다.
‘주님이 보내시려면 주님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건강도/사모님도 주께 맡기고 중국 단기선교를 갔다 왔습니다. 주께서 도우셨습니다.
사모님이 마음이 바뀌어져서 완전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리던 담임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시고, 후원하기로 결정하였답니다.
그래서 건강할 때도 못 갔던 선교사의 길을.. 암 수술을 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바뀐 사람은 “못해요.” “안돼요.” 하는 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만난 뜻하지 않는 손님들
저희 교회(미국 LA) 단기선교팀이 지난 달(09년4월)에 중국에 갔었다.
저희 교회로 봐서는 이번이 4번째 방문이었다.
그런데 둘째 날 저녁, 제가 설교하고 있을 때,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공안들과 안전부(정보부)에서 약 20명이 들이닥쳤다.
결과는, 우리 팀 중에 아무도 잡혀 가거나, 고통을 당한 일은 없었지만
우리 팀은 그 시각 제 설교를 끝으로, 이후 모든 선교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좋았다고 본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우리 선교팀을 보면서
오히려 그런 와중에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겠다는 현지인 결신자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떠난 이후에도, 많은 중국 학생들이 주일날 교회로 찾아왔다고 한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도
열매를 맺게 하신다... 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중국에서, 우리 단기선교팀은 아래 말씀을 나누고 묵상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딤후2:9
바울 자신은 때로는 chained/ bound/ imprisoned 된 적이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not chained/not bound/not imprisoned 되었다는 뜻이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는 위 말씀이, 디모데후서의 주요 메시지(주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환경도 복음을 묶을 수 없다’는 말을
바울이, 자기의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서신서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인생을 뒤돌아볼 때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굴곡의 인생을 살아왔지만
‘결코 복음의 말씀은 매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복음의 말씀이 매이지 않고
지난 2천년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왔다.
복음의 역동성, 복음의 힘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는 없다.
♣감소하는 단기선교, 증가하는 배낭여행
비록 짧은 기간의 단기선교.... 별 소용없는 듯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다녀온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매우 크다.
“강 건너 불 보듯”과 “깊은 관심”의 차이다.
대부분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은, 먼저 단기선교를 통해 그 지역에 관심을 가진다.
단기선교 열기가 줄어드는 것은, 장래 해외선교 선행지수(미래 예측 가능 숫자)의
하락이며, 날로 증가추세인 유럽배낭여행과 비교해 볼 만 하다.
◑무디의 전도 여행
1870년, 33세
유명한 음악가 생키(Ira D.Sankey, 1840~1908)를 만나 전도 사역에 동역하게 되었다.
1871년, 34세, -성령세례 체험-
무디는 성령체험을 하였는데, 그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거듭나게 하신 후, 16년(34세)만의 일인데,
곧 성령께서 나에게 충만하게 되신 일이다.
그 후로는 성령께서는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1872년, 35세, -1차 영국 순회전도-
이 여행은 무디의 전도 여행에 긍정적인 큰 영향을 미쳤다.
무디의 두 번째 영국 방문은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 성서학자들 밑에서 성서를 더 배우기를 바라 1872년 6월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런던 북부 한 교회의 초청으로 주일 설교를 하였다.
설교 후 무디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일어설 것을 부탁했을 때,
청중 2백 명 중 1백 명이 일어섰다.
무디는 그들이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반복하여 말하고 상담실로 갔는데,
1백 명이 상담실을 메웠다.
무디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각자 죄를 회개하는 통성 기도가 있었다.
초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화요일에 다시 초청을 받고 10일 동안 집회를 열었는데
결과로 4백 명이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1년 전 그가 성령세례 -아마 거듭남-의 체험을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다.)
1873~75년, 36~38세, -2차 영국전도여행-
무디가 2차 영국 방문 기간 동안 사귄 목사 세 사람으로부터
부흥회를 위한 초청이 있었다.
그리하여 무디와 생키의 두 가족이 준비를 갖추었으나
초청한 사람과는 연락이 되지 않아,
그들은 막연히 1873년 6월 17일 영국 리버풀에 건너와 기회를 기다리다가
무어하우스의 도움으로 요크 市에서 집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푸대접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집회로 요크 지방① 목사들의 결의로 5주간을 연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요한 웨슬리 이후 가장 큰 부흥운동의 불길이
이곳 요크에서 무디에 의하여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후 무디는 썬더랜드 지방②에 초청받아 갔는데,
그 마을의 거리에는 "무디는 복음을 설교할 것이다. 생키는 복음을 노래할 것이다"
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6주간의 집회를 마쳤다.
무디와 생키는 교파를 초월하여 전도 운동에 나섰기 때문에
각 교파의 지도자들도 격의 없이 서로 협동하여 지원을 했다.
이어서 있었던 뉴캐슬 집회③도 성공적이었고,
뉴캐슬 크로니클 (Nwecastle Chronicle)의 편집자인 코완(Cowan)은 그의 기사에
"놀라운 종교적(신앙적) 현상"으로써 논평하였다.
코완의 글은 심오한 감명을 영국에 주었다.
뉴캐슬의 부흥의 불길은 에딘버러④에도 미쳤다.
에딘버러에서 3개월 동안 집회 후 글라스고우⑤에서 집회를 가졌다.
무디를 초청한 글라스고우 지방 교회들은
한 달 전부터 준비 기도회를 연일 계속하고 있었다.
맨 처음 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집회를 가졌다.
제한된 3,500명을 위한 집회가 한 주간동안 있었다.
다음 주간은 킵블 수정궁(Kibble Crystal Palace)에서
군중을 위한 집회를 가졌는데, 마지막 주일 저녁에 어림잡아 5만을 헤아렸다.
수정궁의 화원과 뜰의 수레 위에서 무디는 설교 했고,
생키는 7천명의 즉석성가대를 조직하여 총 지휘를 하였다.
스코틀랜드 북쪽 끝에 있는 마을에서까지 이 집회에 참석 하였다.
1874년 9월, 무디와 생키는 아일랜드 벨파스트⑥에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스코틀랜드처럼 깊은 감명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1875년 3월 9일, 런던 집회⑦에 돌입하였고, 7월 12일까지 계속 되었다.
무디의 세 번째 영국 방문의 절정을 이루는 이 런던 집회는
치밀한 준비와 대규모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런던 집회는 오전에 기도회로 모이고
오후에는 성경강의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모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집회도 가졌다.
당시 런던 47개 초등학교로부터 모인 5-7천명의 어린이들에게
쉬운 성경 말씀을 들려주며 생키는 찬송가로 즐겁게 만들었다.
런던 집회 수는 285차에 달했으며,
동원된 연인원은 259만 명이었고 운용된 재정도 거액이었다.
매일의 신문들은 확장된 기사를 실었다.
부흥은 런던 자체만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놀라움이 되었다.
AM디의 방문을 통하여 영국에서 복음주의의 부흥이 일어나
수 천 명의 불신자와 타락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도시 선교 단체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단체들이 설립되었으며,
교파간의 불일치 현상이 현저하게 없어져 버렸고
모든 교파 성직자들은 '영혼구원'이라는 공통적인 명제 하에 서로 협력했다.
회심자들은 주님의 훈계로 양육받기 위하여 지역교회에 출석했으며
찬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 순회 설교를 통해 영국 교회에 커다란 부흥을 일으켰다.
그 후 무디는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 등지에서
계속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1875년, 38세 -미국 부흥운동, 3차 영적 대각성운동의 시작-
영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돌아온 무디는, 미국의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제1차로 열린 전도집회는 1875년 11월에 브룩클린에서 모였다.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 보스턴, 그 밖에 각 도시에서 집회가 열려
수많은 잃었던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브룩클린 교회 목사들은 준비 기도회를 갖는 한편 큰 건물을 세내고
5천 개의 의자를 마련하여 놓았다. 집회는 오후에 성경공부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가졌는데,
건물 밖 뜰까지 청중들이 꽉 들어찬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필라델피아 교회의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는,
철도 정류장이 집회 장소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무디는 7천~1만 3천에 이르는 많은 군중에게 설교했고,
집회 기간 중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청으로 캠퍼스에 들어가 강의를 함으로써
학원 전도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876년, 39세
2월 7일에 개회하여 4월 19일에 마친 뉴욕 집회는 별칭 ‘경마장’에서 열렸는데,
이 집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7-8천의 군중들이 의자를 가득 채웠다.
이 집회의 효과는 그 후 25년 동안 계속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뉴욕 신자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1875~6년경이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무디의 부흥운동의 광범위함을 입증하여 준다.
1876년 10월 시카고 집회에도 1만 여명의 회중이 회집하였다.
이곳은 무디가 전도 사업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집회를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보스톤 집회는 각 교회와 교사들이 적극성을 보였다.
무디가 여기서 전도집회를 계속한지가 2개월인데,
참석하는 군중이 많아 밖에 서 있는 자들이 많았다.
보스톤은 1740년의 화이트릴드의 집회가 역사상 가장 큰 집회였었는데,
이번 무디의 집회는 이에 비교할 바가 아닐 만큼 대규모의 맘모스 집회였다.
무디는 집회 설교 뿐 아니라 거리와 가정을 방문하며,
또한 사업가들과의 상담으로 많은 복음전도의 효과를 거두었으며,
많은 매스컴들도 처음에는 회의적이다가, 좋은 평판으로 돌아섰다.
1879년, 42세
여자 전도자를 양육하기 위한 여자신학교를 세웠으며(당시 매우 선구자적인 결단)
그 후 수양관 건립해서 산상부흥회를 열었으며,
마운트 헐먼 학교 건립하였다.
1882년, 45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집회
무디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1882년 11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무디의 부흥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명문대학 졸업생(케임브리지 세븐)이 자신들의 화려한 장래를
버리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무디가 불을 질렀다.
1886년, 49세 -영적 각성을 통한 미국의 해외선교운동 촉발-
무디는 헐먼산 집회를 열었다.
오늘 우리로 치면 ‘여름산상수련회’였다.
거기엔 젊은 대학생, 청년들이 주로 참석했고,
이 헐먼산 집회에서 ‘학생자발운동’이 태동되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미국의 무디의 대각성운동의 결과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당시 미국의 10만 명의 청년들을 ‘학생자발운동’으로 일으켰다.
거기서 자원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왔고,
그들에 의해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연대를 보시라.
*출처
◑문준경 전도사님의 전도
남편 삼년 상을 치르고 목포에 사는 오라버니의 권유로 셋방 하나를 얻어,
20년 시집생활을 청산하고 손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도시로 올라왔다.
예수님과의 만남
그 무렵 성결교단에는 오순절 같은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목포에는 북교동교회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부임하여 축호전도니 하며
부흥성회에 불이 붙은 때였다.
문준경 전도사님이 그 전도팀의 그물에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을 만났다. 이성봉 목사님이 그에게는 직접적인 천사였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다. 그 나이 37세 때였다.
신앙성장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교회집회, 장례식, 혼인식 때면, 문 집사는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특송을 했다.
일가친척, 친지들 집을.. 칡넝쿨 같은 연줄을 타고, 행상여인같이 축호전도로 누볐다.
첫 전도여행을 암태면의 친정으로 떠났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20년 만에 집을 찾은 불쌍한 생과부 딸을 맞은 부모님의 가슴은 아팠다.
골수 유교전통의 아버지께 전도하기란 무리한 일이었다.
“네가 시집가서 고생하더니 서양귀신 들려 실성했구나.”하고
오물을 퍼다 머리 위로 퍼부으면서 “썩 물러가라.”할 정도였다.
길을 가며 찬송하고 꿈속에서도 찬송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한 맺힌 인생 때문에 눈물의 샘은 마를 날이 없었다.
경성성경학교는 성결교신학교였다.
6개월은 전도실천하고, 6개월은 공부하는 6년제 학교였다.
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청강생이었으나, 뒤에 원입생이 되었다. 물론 고학이었다.
마늘장수, 물장수, 삯바느질 등 온갖 일을 했다. 고되고 허기졌지만 꿈만 같았다.
그의 기숙사 방은 ‘사랑의 방’으로 소문이 났다. 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다.
그의 삶은 항상 사도행전의 원색적인 신앙생활이었다.
한 번은 병든 홀어머니 때문에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고
단 하나의 재산인 손재봉틀을 들고 나가 팔아서 100원을 마련해주었다.
또 한 번은 유일의 유산인 명화병풍을 200원에 팔아, 딱한 신학생을 도왔다.
이런 일화도 있다. 6개월의 인턴 실습을 마치고, 목포역으로 돈 없이 가고 있었다.
학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과 행상하는 여집사님이 ‘돈도 없이 나왔지라우?’라고 말했다.
여집사는 문 전도사님에게 돈 한 푼 없음을 알고 있었다.
문 전도사님은 ‘사람이 가지, 돈이 간당가?’라고 대답했다.
그 여집사님이 학비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이 그 분 삶의 연속이었다.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열한 개 섬을 24시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니셨다.
그 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사람들에게 그 분은 예수의 증인이었고 편지였다.
중동리교회를 세울 때에는 시숙(媤叔)과 전도 받은 시집 친척들,
이만신 목사님 자당(慈堂)을 포함하여 20여 명 성도들과 함께
한 달 동안 목재와 기와를 이어 나르고, 터 닦고 흙 일구느라 손발이 터졌다.
그렇게 하여 대초리, 방충리, 우전리, 병풍리, 진리, 재원 등
많은 교회들이 그 분의 몸으로 세워졌고 또 지교회들도 세웠다.
그 분이 전도해서 키운 제자들은
성결교 중진 목사인 이만신, 이봉성 목사 외 10여 명의 목사님들,
그들의 제자의 제자들이 오늘도 그 순교정신을 이어 복음의 씨앗을 부리고 있다.
진리교회에서는 그가 키운 이판일 장로, 이판성 집사의 두 가정, 열세 명이 순교했고,
유일한 유족인 이인재 목사님은 그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다.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3598
♣조선 최초의 단기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 선교사 (1803 ~ 1851)
그는 당시 무인도 같은 상황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사역했던
조선 최초의 내방 단기 선교사였습니다.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조선에 도착하기 전,
그보다 앞서 53년 전 1832년에
이 땅에 단기 선교사로 일종의 <비 거주 선교사>로 찾아온
카를 귀츨라프 Carl Guzlaff 란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그는 본래 독일에서 태어난, 폴란드계 유대인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목사였고 의사였으며,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분으로
중국 선교사 모리슨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에 와서
인도네시아, 태국, 중국 등을 순회하며,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 선교에 큰 열매가 없다고 느낀 그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다가
동인도 회사 소속 함선이 조선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배를 타고 1832년 7월에, 조선반도 서해안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는 황해도 몽금포,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에 도착하여
일종의 단기 선교를 시도합니다. (섬에만 내림)
그는, 본래 관원의 허락을 받으면 조선 거주 선교사가 되려 했지만
허락을 받지는 못하고 철수합니다.
그러나 그가 서해안 섬에 상륙한 몇 달 동안
그는 한자로 된 중국 성경을 전달했고, 의사로서 병자들을 고쳐주었고
감자씨 재배를 가르쳤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국 땅에서 최초의 단기 선교사였습니다.
특별히 그는, 조선에 최초로 감자 농사를 들여온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그가 이 땅에 처음 뿌린 감자 씨와 함께
복음의 씨가 맺은 무성한 열매를 인해
천국에서 풍성한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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