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수드가 죽고 세계 무역 센터는 무너져 내리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린지 4년이 지났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도,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사라졌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빈 라덴, 탈레반, 알 케에다 같은 이름들과 함께
세계 언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아프가니스탄 항쟁과 독립 투쟁의 주역이었던 한 유목민 전사의
죽음은 이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나 작은 일인 것처럼 잊혀졌다.
여기 한 자루의 칼리슈니코프 소총과 한 권의 시집을 들고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 아프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한 유목민 전사가 있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ed Shah Massoud)”.
마수드는 소련과의 10년 전쟁(1979-1988)을 승리로 이끈
아프간의 전설적인 야전 사령관이었다.
천부적인 전략가, 탁월한 군사 전문가였던 마수드.
사람들은 그가 밥 딜런을 닮았다고도 말했고
체 게바라를 닮았다고도 했다.
그를 따르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프간 사람들에게 신앙이자 전설인 마수드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판지셰르의 사자>일 것이다.
판지셰르 계곡은 마수드 군대의 본거지였다.
또한 판지셰르 계곡은 러시아 붉은 군대의 무덤이기도 했다.
최신 전투기와 장갑차 그리고 붉은 군대의 막강한 전력으로도
판지셰르 계곡에서 칼리슈니코프 소총 한자루를 들고 싸운
이 초라한 아프간 게릴라들을 이기지 못했다.
소련군은 판지셰르 계곡에서 전멸 당했고, 아프간에서 철군했다.
그 후 사람들은 마수드를 판지세르의 사자 라고 불렀다.
마수드는 10년 동안 소련의 붉은 군대와 싸웠고
다음 10년은 미국과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탈레반과 싸웠다.
편하게 사는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혈도 없고, 죽음도 없고, 과부도 고아도 없는, 더 이상의 폭격도,
폐허도 없는 삶, 안락함이 오후의 햇살처럼 고요하게 펼쳐지는 삶,
마수드에게 그런 선택도 있었다.
그는 단지 성(城)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는 소련이 주인으로 있는 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주인으로 있는 성이었다.
한 번만 백기를 들어주면 되었다. 적들은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열강이 만든 성곽 속에는 굴욕적이지만 평온한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마수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마수드는 말했다.
“가장 나쁜 삶은 가난한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다.”
1998년, 소련과의 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의 삶에 잠시 평화가 깃드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아프간 내부의 또 다른 적인 탈레반과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마수드는 테러리즘을 싫어했다.
그는 평생 아프간의 사막과 거친 계곡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한번도 테러리즘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릴라전은 빈자(貧者)들의 전쟁이지만 테러는 전쟁이 아니라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하는 협박이었다.
마수드는 소련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과 불리한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번도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다.
자신의 정의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수드가 탈레반에 맞선 이유다.
마수드는 수도 카불에 입성해서 정권을 장악했지만
탈레반이 카불을 폭격한다고 협박하자
탈레반에게 무혈로 카불을 넘겨주고 다시 판지셰르로 돌아간다.
카불의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카불은 결국 탈레반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1993년, 프랑스의 기자 퐁피이는 폐허가 된 카불의 거리에서
울고 있는 마수드를 보았다. 기자는
“그가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라고 했다.
9.11 테러 이틀 전, 탈레반은 자살 폭탄 테러단을 보내 마수드를 암살했다.
탈레반은 9.11전에 왜 마수드를 먼저 죽여야 했을까?
마수드는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미국 본토에 심각한 테러를 저지를 것이라고 누차 경고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수드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은 마수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미국에 맞서기로 결심한 탈레반에게
마수드는 너무 강력하고 불편한 적이었다.
탈레반의 입장에서 마수드는 협상이 불가능한 평화주의자였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다.
마수드가 암살당하고 이틀 후 세계무역센타는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오사마 빈 라덴과 함께 6년 동안 소련군에 맞서 싸웠던 옛 전우였지만,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동맹군 지휘관인 사예드 지아 아흐마드 는
“미국이 빈 라덴을 키웠다. 내 눈 앞에 보이기만 하면 당장 죽이고 싶은
단 한 사람은, 내 친구 오사마 빈 라덴이다.”라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의 인터뷰를 통해
옛 동지에 대한 애증(愛憎)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는 북부동맹의 전설적 사령관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9·11 테러 직전 암살된 것은
빈 라덴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조선일보 박해현 파리특파원 2001년 12월 8일)
미국의 CIA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탈레반과 빈 라덴은
마수드의 살해로 부담스러운 적을 제거했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역센터라는 미국의 심장을 저격했다.
무장 게릴라 지도자였지만, 테러리즘을 혐오했던 사람,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위해 산화한 한 인간 마수드.
빈 라덴과 알 카에다 라는 조직이 일으킨 9.11의 검은 연기는
이 아프간 전사의 진실을 덮어버렸다.
결과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13세기의 칭기즈칸이 성공한 유목민 리더였다면
20세기의 마수드는 실패한 유목민의 모습이었다.
20세기의 만리장성은 13세기의 만리장성보다 더 높고 단단하다.
한 전설적인 유목민 전사는 죽고 그의 시신 위로 미국의 가스 송유관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나갈 것이다.
소련이 놓으려고 했던 그 송유관 말이다.
그러나 마수드의 삶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아프간 사람들은 마수드를 ‘최고의 용사, 최후의 전사’로 기억한다.
“마수드는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한번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으며
한시도 적을 향한 총구를 내려 놓은 적이 없다.
마수드가 살아 있었다면
미국의 허수아비 카르자이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그랬다면 마수드는 명실상부한 아프간의 지도자로
지금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확고한 리더쉽을 발휘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패했지만,
탈레반에 패하고 빈라덴의 폭탄테러에 목숨을 잃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결코 패하지도, 죽지도 않는 길을 갔던 전사 마수드.
아프간 국민들의 마음에 독립에 대한 의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한
마수드는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이다.
유목민 전사로서 장엄한 삶을 살다간 그의 영전에
한 잔의 따뜻한 술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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