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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158 보상적 상급주의 신앙은 비성경적

LNCK 2006. 3. 21. 13:28

◈보상적 상급주의 신앙이 성경적 관점이라고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눅17:10


*글: 김성주 목사                      *출처보기


*주제 요약: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현세적 보상(축복)을 바라고 헌신한다.

(소위 ‘보상적 상급주의’ 관점을 가진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헌신은, 보상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해서, 자발적인 헌신이다.


그러므로 어떤 보상(축복)을 기대하며 헌신을 종용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는 주장.... (소위 기복주의)


또한 성경은 영혼구원 이외에 다른 어떤 현세적 보상(축복)도

약속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전체적으로, 너무 현세적 보상 기대심리에 기울어버린 기독교로 인해

기독교의 본질적 “구원의 은혜-자발적 헌신” 신앙이 퇴색되어버림을

저자는 염려하며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편집자


◑1. 들어가면서 (서론)


흔히 의식 있는 기독교 신앙인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진단된 한국적 기독교 신앙의 특징들은

기복주의, 상급주의, 지성감천주의, 신비주의, 체험주의, 은사주의 등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해 설명한다면

지나치게 현세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신앙의 현재성을 언급하지 않는다거나

중요시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요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본질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을 지향하는

종말론적 신앙관에

보다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전15:19, 요11:25-26, 14:1-4,

마25:31-33, 히9:27, 11:1-2, 계21:11-15, 마6:33).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기독교 신앙의 성격 속에

위에서 언급한 제반 요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로되,

중요한 관점은 그런 내용들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과 본질적인 요소로

자리매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인간의 현세적인 유익과 소원성취,

성공의 수단과 방편으로 기능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면

여타의 종교와 다를 바가 없으며

계시종교로서 기독교의 차별적 은혜성과 특수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2. 펼치면서 (본론)


▲1. 기독교 신앙의 특징인 “은혜성”

기독교 신앙의 계시적 특수성과 차별성은

단연 은혜성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친히 죄인 된 인간을 먼저 찾아 오셨고,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의 방식을 구원의 도리로 정해 놓으셨으며,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는 약속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엡1:4-14, 2:8-9, 롬1:16).


자력구원이 아닌 타력구원의 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2. 은혜에 수반되는 인간의 “자율적”(자발적) 책임과 의무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와 관련해

시혜자(施惠者)인 하나님과

수혜자(受惠者)인 인간 사이에

필연적이고 당위적으로 발생되는

상호관계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원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당신의 언약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고유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된 인간 편에서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당연한 심리적 발동으로 자원해서

헌신/봉사하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엡2:11, 4:1-3, 골3:1-3, 딛2:14,

롬6:12-14, 12:1, 고후5:15, 약2:22, 26절).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수밖에 없는 감사와 보답의 반응 차원에서 말입니다.

이를 달리 은혜는 상응하는

구체적 행동을 수반한다고도 표현합니다.


①이 사실을 구약적 배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 언약의 징표로 하사(下賜)하신

십계명 서문에서 밝히 선언되고 있습니다.


출 20:1-3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그러므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본문에서 3절인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의 말씀 앞에는

문맥상 ‘그러므로’란 접속사가 들어갈 때

십계명 본문과 서문과의 관계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순종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주신 십계명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로서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보상적 관점이 아닌

감사와 (자발적) 보답의 심정을 가지고

‘마땅히 그리고 자율적 책임과 의무감’으로

적극 추구해야 할 행동지침이란 사실입니다.


② 이런 사실의 신학적 상응성(相應性, correspondence)을

신약기자는 소위 “무익한 종”의 심정을 통해 밝히 해명함으로서

구약적 사상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눅17:10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그렇습니다.

종의 사명은 주인의 뜻을 충성스럽게 받들어 행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삯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생명의 은인’으로서 주종관계가 성립된 사이라면

본문의 ‘무익한 종’의 심정이란

더할 나위 없는 당연지사(當然之事)한 고백일 뿐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은혜로 말미암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의

구원을 선물로 받은 사실이야말로

평생토록 충성된 종의 심정을 가지고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그 은혜를 갚기에는 그저 부족할 뿐이기에 말입니다.


③ 성도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음에 빚진 자

혹은 사랑에 빚진 자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롬 1:14, 8:12 등)


이런 원리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강요된 의무이기 이전에

사랑의 강권으로 말미암는 당위적인 명제입니다.

성도의 마땅한 본분과 도리의 의미로서 말입니다(전 12:13).


▲3. 은혜성과 보상 개념의 불일치성

(은혜를 받은 자는, 보상 심리로 헌신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본질에서 은혜성에서 찾아집니다.

은혜는 보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선물이며 호의적인 무조건적 성격을 띱니다.


만일 은혜가 보상적 개념일 수 있다면

본성적으로 죄인 된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앞서

죄의 대한 진노로 심판과 형벌을 면치 못할 자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롬3:10, 5:12).


그러나 성경은 이런 진노와 심판의 자리로부터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인해 심판에서 제외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바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고 증언합니다(요5:24).

이것이 은혜의 본질입니다.


무자격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자비와 긍휼과 호의 말입니다.


이 때문에 참된 구원의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정상적으로 접촉된 자는

결코 어떤 형태의 보상심리를 발동시킬 수 없습니다.


더구나 본질에서 육신의 정욕과 깊이 연관돼 있는

보상과 상급주의를 목적삼아

신앙을 도구화 할 수는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은혜는 기가 막힐 죄의 웅덩이에서

거저 구원해 주신 사실을

감심(感心, 감사 마음)으로 깨닫고 확신하는 데서 나와지는 믿음을

정당하게 유발시킴으로

오직 감사와 보답의 심정을 가지고

평생 하나님을 충성된 종의 신분으로

섬길 것을 강력히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고후5:15, 눅17:10).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며

복의 근원이요

상급의 본질입니다(히11:6).


▲4. 성경은 “궁극적으로” 구원 이상의 다른 복과 상급을

결코 보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형태로 약속하고 있는

복과 상급의 설명과 표현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지향하는 본질은

궁극적으로 구원에로 귀결될 뿐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본질이 의미하는 바가

이렇게 예수님의 고귀한 생명을 지불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무한가치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구원의 생명을 소유했다고 하면서도

 

보상심리를 발동시켜

또 다른 상급과 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로서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포괄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데서 야기된

계시의 부족과 결핍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5. 성경적 상급에 대한 오해와 정립의 필요성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만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보상과 대가성의 상급이 없다면

열심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면서 성경 곳곳에서

상급이나 복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을

증거 본문으로 제시하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항변에 대한 우리의 소견은

사두개인들의 곡해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해하였도다”라는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마22:23-30).


특별히 주님께서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씀을 하실 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첨언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의 어떤 주제를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는

총체적인 계시관의 부족과

하나님 심정으로 접근해 해명해야 하는

천상적 관점의 결핍을 지적함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언약적 구속의 경륜을

성령의 영감을 통해

인간의 경험과 지식과 언어라는 제약성과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세상 가운데 선포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란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철저히 계시의존적이고

천상지향적이며

총체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해석해야지


자의적이고 현세지향적이며

지엽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게 될 때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본의와 상치되는

인위적인 해석과 적용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구원의 생명에 바르게 접촉된 자는

본질적으로 결코 (구원받은) 이후의 신앙생활을

보상심리를 발동시켜

상급지향주의의 심정을 가지고

영위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로 보답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임)


나아가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은혜성에 기초한 사실로 인해

성경적 계시관에 바르게 접촉된 자는

결코 기복주의적인 대가성의 상급주의 신앙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이유들로 인해

성경의 도처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급과 복에 관련된 구절 또한

앞 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언약적 구속사의 경륜과의 연관 속에서 해석하면

결코 세속적이고 자의적인 관점으로 해석될 성질의 내용이 아님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6. 성도의 상급은 - (궁극적으로)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 있다는 주장.

성경이 약속한 상급인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뿐인데,

그것은 내세에 받는 것임.

(특히 신약) 복음에는 현세적 상급(축복)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

은혜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무슨 상급을 요구하랴?

 

상급과 관련해 가장 보편적인 일례로 지적할 수 있는

소위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수여 등등의 표현은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는

칭의와 영생과 미래적 영광을

면류관이란 표상적 상급 이미지와 결부시켜

종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일 뿐입니다.


실제로 하늘나라에서 의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과 영광의 면류관 등등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각자 신학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음)


때문에 계시록에서는 24장로들로 표상되고 있는 성도들의 무리가

자신들이 쓰고 있는 면류관을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일제히 벗어 던지면서

구원의 은혜의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계4:10-11)


우리 스스로는 구원과 영생과

부활의 생명 및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급으로 받을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기에


오직 그 모든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마땅히 주께서 홀로 받으셔야 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시종일관하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구원의 생명과

종말론적으로 소유해 누리게 될

구원의 미래적 완성

복과 상급의 실체로 설명합니다.


◑3. 마치면서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당연한 봉사와 헌신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보상해 주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과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누리게 될

천상적 교제와 교통이란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감히 비교가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왕의 아들이란

그에게 약속된 후계자로서

미래의 보장된 신분과 영광된 왕적 삶을 고려할 때,

왕으로부터 하사된 다양한 형태의 상급과 포상이 있다 한들

차기 왕의 신분으로 누리게 될

왕적 권세와 영광에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지요(롬8:18).


종말론적 구원 속에 담겨 있는

실질과 가치와 영광이 의미하는 바가 이렇듯 중차대할 진대,


구원의 상급 이상으로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끌게 하는 다른 상급(현세 축복)의 내용이

어찌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추구하는

여호와 신앙의 동기부여로 작용할 수 있겠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바

바른 구원의 은혜에 정상적으로 접촉된 자라면,

그래서 구원의 가치야말로

다른 무엇에 비교될 수 없는 최선의/최상의 상급인 사실을

전인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자라면,


오직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자원해서 적극적으로

감사와 보답의 심정으로

평생 하나님을 신앙하며 섬길 뿐입니다.


구원 이외의 어떤 상급이

추가적으로 있는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신앙의 본질은

이미 은혜로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발로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자칫 구원의 은혜의 종교인 여호와의 신앙을

다른 여타의 종교와 동일한 수준에서 평가하는 나머지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여긴다면


여호와의 종교 또한

이교도적 우상숭배신앙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바

정당한 여호와의 신앙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가장한

사이비 기독교일 뿐입니다.

마치 여로보암의 종교처럼 말입니다(왕상12:25-33).


거기에

여호와의 이름과

제사장과

절기를 지키는 율법적인 요소가

분명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본질에 있어서는

율법의 원리에서 빗나갔을 뿐 아니라,

신앙을 사욕(私慾)의 수단으로 삼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

우상 숭배적 신앙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롬10:2-3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김성주 목사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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