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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가정생활

LNCK 2006. 4. 25. 13:02

 

 

◈크리스천 가정생활               골3:18~21             출처

 

 

바울은 골로새서라는 편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삶’,

혹은 ‘그리스도의 주권’이라는 주제를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현되어야 할 삶의 첫 번째 장소가

바로 가정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직장생활 골 3:22~4:1, 다음은 사회생활 4:2~6)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장소는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말이다.

 

▲혁명적=동등한 충고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쓰던 당시 유대 문화, 로마 문화의 시각에서 볼 때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건으로 취급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당시 사회는 남자들만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회였다.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는 노예처럼 매매되었고,

부모가 자식을 죽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던 사회였다.

 

그런 사회를 향해서 바울이 던지는 이 교훈은

매우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다 못해 혁명적인 말씀이었다.

바울은 ‘아내들 남편들’을 향해서, 그리고 ‘자녀들과 아비 된 자들’을 향해서도

교훈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에게 동등한 충고를,

부모와 자식에게 동등한 충고를 하고 있다.

 

바울이 사회적 흐름에 역행하는 혁명적인 교훈을 던질 수 있었던 힘이,

그 비밀이 어디에 있었을까?

 

▲주안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주 안에서’라는 말이다.

이 표현이 본문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

 

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고 해서 믿지 않는 가정과 확연히 다른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비슷한 가치를 갖고 가정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불신자들보다는 가정생활에 한층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주안에 있는 남편은, 다른 남편들보다 자기 아내를 더 사랑하고,

주 안에 있는 아내는, 남편에게 더 순복하며,

주 안에 있는 부모는, 자녀를 더 제대로 양육하고,

주 안에 있는 자녀는, 부모님에게 더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가정의 회복이다.

 

 

◑1. 부부 관계

 

주 안에서 바람직한 부부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울 사도는 아내의 책임과 남편의 책임을 동등하게 말하고 있다.

 

▲1. 순서상 먼저 언급된 것이 아내의 책임이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골 3:18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만 복종을 요구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동일한 저자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21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종이 된 사람들은

주인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는 종처럼, 사랑하고 복종한다.

 

▲아내의 책임을 말하면서 주께서는 특별히 복종 의 교훈을 강조하신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차례로 정렬시킨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는 가정 내의 질서를 위해서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아내들에게 권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의도대로, 남편이 가정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복종은 약한 자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들이 남편들에 비해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동등한 인격 사이에서도 복종 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최고의 실례를 보여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전적으로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철저히 복종하는 삶을 사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1세기에 복음이 세계에 전해지면서 여성들은 전에 없던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해방이 방종으로 변질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여전히 가정에는 질서가 필요했고, 그 질서를 위해 아내의 복종이 필요하다고

바울은 가르쳤다.

 

▲2. 남편의 책임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19

 

먼저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에 ‘아가페’라는 단어가 쓰였다.

 

그 당시에는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을 뜻하는 단어인 에로스라는 단어가

이미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말할 때

특별히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아가페는 조건이 없는 사랑이요,

자신을 전부 내어 주는 희생적인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남편 여러분! 아가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시기 바란다.

 

▲또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골 3:19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괴롭힐 소지가 많다는 것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아내에게 학대받는 남편들도 적지 않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내가 남편에게 괴롭힘 당하고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여기서 ‘괴롭히지 말라’는 것은 신체적 학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괴롭힌다.’는 것은 ‘독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는 뜻이다.

즉, 모진 말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이다.

 

여성은 남편보다도 훨씬 더 정서적인 존재다.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에 아내의 삶이 형편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

 

▲어느 외과 의사의 비망록

미국의 한 크리스천 의사가, 그가 수술했던 환자들의 삶의 애환을

한 편의 글로 써서 「어느 외과 의사의 비망록」이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중 어느 부부의 애틋한 사연이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와서 소개하면;

 

아내는 수술을 받은 뒤 아직 마취에서 깨지 않은 채 침대에 잠들어 있고,

남편은 아내의 침상 곁에 앉아 아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수술을 두 번째 했는데도 아내의 입은 여전히 비뚤어져 있었고,

볼에는 흉측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가 남편을 쳐다보며 묻습니다.

 

“여보, 내 얼굴 어때요?”

남편은 애써 웃음 지으며 아내를 내려다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긴, 당신 너무 귀여운데!”

“정말이요?”

“정말이고 말고!”

 

이렇게 말하는 남편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고,

그 눈물이 아내의 흉터 진 뺨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 눈물이 비록 아내의 흉터를 지을 수는 없다 해도

남편의 그 한마디에, 그리고 진실한 눈물에

아내의 마음속 상처는 치유되었을 것이다.

 

▲당신도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여러분 혹시 찰스 린드버그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는가?

그는 비행기로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대서양 횡단에 최초로 성공한 조종사다.

그는 당시 세계의 영웅이었다. 그의 아내 앤은 남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의 남편을 영웅이라고 말한다. 국가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국가의 영웅이기에 앞서 아내인 나의 영웅이다.

그이는 또한 우리 가정의 영웅이다!

 

처음 결혼했을 때, 나는 심약하고 부끄러움 많고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초조해 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나에게 늘 “당신은 할 수 있어. 당신은 넉넉히

그 일을 할 수 있어, 힘을 내야 하오”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 남편은 본인이 하늘을 날기에 앞서

아내인 나로 하여금 가능성의 하늘을 날게 한 진정한 영웅이었다.

 

우리 시대는 이런 영웅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아내 위에 군림하고 아내를 학대하는 영웅들이 아니라, 아내를 세우고

아내를 아름답게 만들고, 아내를 건강하게 하는 이런 영웅들 말이다.

누가 아내를 그렇게 만드는가? 바로 남편이다.

 

 

◑2. 부모와 자녀 관계

 

▲순종하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 3:20

 

성경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순종’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 믿는 자들의 ‘순종’을 표현하는데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순종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도 같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자녀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간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권위에 대한 순종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자리는

바로 가정이다.

 

▲미국식 교육의 실패 - 순종의 실패

미국의 유명한 가정 의학자요, 상담가인 제임스 답슨은

미국의 민주주의적 교육이 크게 실패했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까지 미국의 교육은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만큼의 책임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또한 우리는 독립성을 강조했지만, 독립성 못지않게 중요한,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는 일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미국은 지금 그 실패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

 

부모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매우 중요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골 3:20

자녀로서 해야 할 순종은 선택적인 순종이 아니라 절대적인 순종이다.

 

▲권위자를 무시하지 말라

그렇다면 “부모가 도둑질을 해 오라고 해도 순종해야 하는가?”

물론 그런 것에는 순종할 수 없다.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되는 경우에는

궁극적인 권위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부모에 대한 순종의 자세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 부모를 무시하지 않는 태도)

이것은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자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무시하지 말라!

 

▲아버지는 가정의 책임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 3:21

 

여기서 특별히 ‘아비들아’라고 그랬을까? ‘어미들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정의 지도자요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의 책임 또한 아버지에게 있다.

그러면 한국의 대다수 바쁜 아버지들이 이렇게 반박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아니, 가족들 벌어 먹이기도 바쁜데, 언제 자녀 교육까지 책임집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책임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다고 말한다.

 

▲어느 가정의 에피소드

어느 가정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권위를 가르치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그 집에는 식탁에 아버지 의자가 따로 있었다.

 

아빠가 안 계실 때도 그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 것이 그 가정의 법칙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출장 중이었는데,

그 집의 일곱 살 먹은 꼬마가 갑자기 아버지의 의자에 가서 앉더란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려고 하다가 ‘네가 아빠가 되고 싶은 모양이지?

그래, 오늘 한번 만이다. 오늘은 네가 아빠 역할을 하렴’ 하며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장난기가 발동한 누나가 옆에 있다가 동생한테 이렇게 말한다.

‘아빠(동생에게), 식사 끝나고 제 숙제 좀 도와주셔요!’

그랬더니 꼬마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아빤 바쁘단다. 너희 엄마한테 물어 봐라.’

 

그 아이의 대답 속에서 그 아빠의 평소 모습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책임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다는

성경의 원리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격노케 말지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 3:21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부모를 향해서 분노하고 반항하게 되는가?

첫째는 지나치게 징계할 때,

둘째는 부모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때이고,

셋째는 자녀에게 무관심할 때라고 한다.

 

①교육적 차원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징계할 때 자녀들은 분노한다.

아이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고, 매도 들어야 하지만,

부모도 인간인지라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매를 위한 매를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아이들은 반항하게 된다.

 

②그러나 자녀들을 분노케 하는 더 큰 원인은

부모들이 보이는 삶의 이중성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부모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자녀들은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부모에 대해 반항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③그러나 자녀를 분노케 하는 가장 큰 원인은 부모의 무관심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다가, 무슨 잘못만 했다 하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혼낸다거나 할 때,

자녀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대화 vs 잔소리

어떤 고등학교에서, 남학생 한 명이 아버지와 함께 교무실에 불려 왔다.

학생과 아버지 그리고 교무 주임 선생님이 앉아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선생님이 그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아버님, 평소에 시간을 좀 내셔서 아드님과 대화도 해보고 그러시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갑자기 신경질을 내면서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대화요? 제가 얼마나 대화를 많이 하는데요. 애한테 한번 물어 보세요.”

 

그러자 아들이 갑자기 아버지를 향해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가 언제 저랑 대화 를 했어요? 잔소리 나 하셨지!”

 

이 경우, 아버지는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자녀는 그것을 대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듣기 싫은 잔소리로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화를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부모가 자녀 얘기를 들어 줄줄 알아야 한다. 싫어도 들어 줘야 한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대로의 고민과 좌절과 고통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부모 취항에는 맞지 않더라도 자녀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들어보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관심거리를 이해할 때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 속에서만 비로소 교육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격노 vs 격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낙심’이라는 단어는 본래 ‘용기를 잃다’라는 말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그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절대 자녀들을 비판해서 낙심시키면 안 된다.

 

오늘 우리 기성세대는 신세대들을 비판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격려해 주고 있는지 말이다.

‘자녀들을 격노케 말라.’ 이 말은 다시 바꾸면

‘자녀를 격려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가슴 뜨거운 격려는 우리 자녀들과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생명과 같은 용기를 준다.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 될 수 없어요」

상담, 심리학 정동섭 교수님의 아들 정명훈 군이 쓴 책이 항간에 인기다.

 

이 책에는 그가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식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러서 대학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체험한,

나름대로의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느낌과 도전과 고발이 기록되어 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16번, 왜 이렇게 시험을 못 봤어?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자식아!”

국어선생님은 아까부터 계속 그런 식의 말투로 우리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싫었다.

 

“17번 일어나 봐, 명훈이.

너 왜 이렇게 시험을 못 쳤어. 부끄럽지 않아? 이 녀석아!”

 

나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아닙니다. 부끄럽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실이었다. 나는 큰 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분명 다른 애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기껏 우리들이 듣는 말은 왜

‘부끄럽지 않냐, 임마? 공부나 해, 이 자식아!’

와 같은 말뿐이란 말인가?

 

내가 한 말 때문에 국어 선생님한테 매 맞고 퇴학까지 당하게 된다면

그렇게 되라지.

나는 선생님 앞에서 우리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정명훈 학생은 선생님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차라리 우리를 이렇게 교육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공부를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셔야 합니다.’

 

선생님들은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는

“너 이 자식 공부 안했지?”라고 하시고,

공부 잘하는 학생의 성적이 떨어지면

“허 이놈 자꾸 떨어지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벌써 이만큼 했구나’와

‘아이쿠, 이제 겨우 요만큼 했네”가

판이하게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점 맞은 학생에게, “와, 너 이번에 20점이나 맞았구나,

조금 더 하면 올라가겠다. 이번에 틀린 것을 확실히 알아서

다음번엔 틀리지 않도록 해라.”라고 한다면

그 학생을 때려서 공부시킬 때와는 달리

더욱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마치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20점 맞은 아이가 당장에 90점 맞기를 원하십니다.

조금 더 좋은 성적을 얻게 하고 싶은 선생님들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갓난아이보고 달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에잇, 공부하면 뭘 해, 맨 날 맞기만 하는데”

하면서 공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린 학생답지 않는 진지함으로

우리 한국 교육의 나아갈 길을 애절하게 호소한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작은 것부터 고쳐 나가자.

자녀에게 오늘 무엇을 배웠나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 보자.

자녀들에게 좋은 만화책을 사 주자.

자녀들을 칭찬하고 격려하자.

굳이, 거창한 것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

남들에 대한 작은 관심과 배려,

자녀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의 모습을 되찾자.

청소년들이 새벽같이 등교해서 별을 보며 하교해야 하는

이 서글픈 나라를 만들지 말자.

우리 모두에게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나라를 따뜻하고 평화스럽고 사랑이 넘치는 나라로 만들

의무가 있지 않는가? 이것은 국가의 의무만이 아니다.